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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하루] 손톱을 깎으며 – 김진경

에세이스트의 하루 3편 – 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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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낮이면 볕 좋은 시간을 골라 아이를 거실 창가에 앉힌다. 작은 손톱깎이를 들고 일주일 동안 자라 있는 아이의 손톱과 발톱을 살핀다.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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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낮이면 볕 좋은 시간을 골라 아이를 거실 창가에 앉힌다. 작은 손톱깎이를 들고 일주일 동안 자라 있는 아이의 손톱과 발톱을 살핀다. 내 손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아이 손을 활짝 펴고 자라난 손톱 길이를 가늠한다. 너무 길게 자르면 주중에 한 번 더 잘라야 하고, 욕심을 부려 짧게 자르면 피가 날 수 있다. 잠시도 가만있기 어려워 엉덩이를 들썩이는 네 살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종이처럼 얇은 손톱을 신속하게 깎는다.

이 아이 전에도 내게 손톱과 발톱을 맡기던 사람이 있었다. 이십여 년 간 함께 살았던 우리 할머니다. 할머니는 내 이름을 ‘진경’이가 아니라 ‘진겅’이라고 불렀다. 노화로 얼굴 근육이 약해지면서 ‘경’ 발음이 어려워 좀 더 쉽게 부를 수 있는 단어로 옮겨간 것 같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이름 가지고 ‘질경이’라고 놀려서 싫었는데 할머니까지 내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것이 밉던 때였다.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 혼자 손톱과 발톱을 깎는 것이 어려워졌다. 손톱깎이의 양날 사이로 손톱을 끼워 넣고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어 단번에 누르는 일은 가만히 있어도 손이 조금씩 떨리는 노인에게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손톱을 깎아달라고 부탁했고 중학생 무렵부터 그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손톱을 정리할 때가 됐다 싶으면 할머니는 신문지와 손톱깎이를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렸다. 평소에는 돈 아깝다며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컴컴하게 지내는 할머니지만 이때만은 방에 불을 환하게 켜놓았다.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할머니의 손을 살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툭 튀어나오고 얇은 살가죽만 남은 손은 어느 날은 차가웠고 어느 날은 따뜻했다. 할머니는 연신 손이 못생겨서 부끄럽다, 손톱이 왜 이렇게 빨리 자라나, 하는 멋쩍은 이야기들을 하며 내게 미안해했다. 그리고 항상 바짝 잘라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잘린 손톱이 신문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할머니의 열 손가락을 끝냈다. 

손톱을 마친 뒤에는 발톱 차례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손톱은 깎아도 발톱은 싫었다. 뭉툭한 발톱을 보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할머니라도 남의 발을 만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톱을 깎는 내내 어떻게 하면 손톱만 하고 도망갈 수 있을까 궁리했다. 애석하게도 할머니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손톱을 끝내자마자 할머니는 내 앞에 발을 척 갖다 댔다. 팔십이 넘은 노인이 어쩜 이렇게 빠르지 싶을 만큼 놀라웠다. 내가 중간에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할머니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도망갈 배짱은 없어서 나는 입이 뚱하게 나온 채 발톱까지 마무리했다.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오면서 고향 집을 떠났지만 할머니의 손톱은 여전히 내 담당이었다. 손녀딸이 언제 오나 기다리던 할머니는 내가 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준비해 둔 신문지와 손톱깎이를 펼쳤다. 매일 보던 할머니를 자주 못 보게 되어서인지 이때부터는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다듬는 일이 귀찮지 않았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불과 이 년 남짓. 수업 시간이라 집에서 오는 전화를 안 받았더니 언니의 다급한 문자가 연달아 왔다. 허겁지겁 기차를 타고 집에 왔지만 할머니는 이미 없었다. 노환으로 인한 별세였다. 팔십 중반을 넘어선 연세여서 다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차분했고 어떤 이는 조용히 주무시다 가셨으니 호상이라고 말했다. 

돌아가신 직후에는 할머니가 종종 꿈에 나왔다. 둥글게 굽은 허리, 하얗게 센 머리, 작은 몸은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 뒤로 한참을 안 보이던 할머니가 다시 꿈에 나온 건 결혼 사 년 만에 가진 첫아이가 유산된 뒤였다.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하고 언덕을 내려와 나와 남편에게 다가왔다. 꿈에서 남편은 우리 할머니를 보더니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남편을 보고 빙긋 웃던 할머니는 마디가 굵은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진겅아, 잘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한마디만 남기고 할머니는 다시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김진경 

진압할 진(鎭), 서울 경(京). 서울을 진압하진 못했지만 진출에는 성공한 지방 사람. 5년간 출판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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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진경(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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