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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가끔은 좋은 일도 있다] 피아노의 시간

<월간 채널예스>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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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운반 업자를 부르고, 조율사를 부르고, 『바이엘』, 『체르니 100』, 『하농』 책을 샀다. 첫 수업을 했다. 내가 도레미를 치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말했다. (2021.10.06)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흔한 이야기지 싶다. 15년 차 뮤지션이 갑자기 기본부터 다시 익히고 싶어 체르니 100을 사고 동네 선생님께 피아노를 조금씩 배워나가는 이야기. 정말 딱 그런 이야기지만 읽는 분들의 시간이 된다면 조금 자세하게 얘기해볼까 한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 이 부분도 역시 흔하다. 미학이나 즐거움, 열정 같은 것 없이 그냥 손가락을 빨리 돌렸다. 체르니 40을 치는 아이들이 멋있어 보였다. 손가락이 더 멋있게 돌아가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써 도달한 체르니 40은 별 재미가 없었다. 나의 첫 선생님은 조금 특이하셔서 ‘어이 그런 재미없는 음악 그만 치고 여기 와서 이승철이나 쳐보라고’ 하는 느낌으로 레슨 막바지에 내게 가요나 팝 악보를 연주하게 했다. 그는 빨간 소파에 앉아 믹스 커피를 마시며 말이 안 되는 나의 연주를 들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나의 첫 번째 관객이었고, 그때 얼떨결에 배운 몇 개의 코드로 나의 직업이 시작된 셈이지만 항상 그랬듯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건 수업이 아닌데…’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흔한 결말이었다. 다른 공부가 더 중요해졌고, 악보가 어려워질수록 흥미를 잃었고, 부모도 ‘아, 이쯤 치게 했으면 약간의 교양은 길러진 거겠지?’ 하고 만족한 눈치였다. 그렇게 피아노와 나는 완전히 멀어졌다. 거실의 갈색 삼익피아노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타이밍에 처분되었다.

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건반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세상에는 훌륭한 연주자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요런 느낌으로 요로케 해주세요’하고 삐죽삐죽 낙서 같은 데모를 내밀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유려한 연주로 돌려주었다. 이런 마법이 있나. 요술 선생님들이 계신데 내가 왜 하농을 연습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나이를 먹고, 다음 앨범을 만들고, 또 나이를 먹고, 또 다음 앨범을 만들고, 그랬다. 나이를 먹는 것도, 앨범을 만드는 것도 간단치 않았다. 가끔은 바람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땐 앞으로 나아가긴커녕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바람이 등 뒤를 밀어주는 기분이 드는 날도 있다. 분명히 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연재 이후로 좋은 일이 생기는 쪽에 조금 더 손을 뻗으며 살게 되었다. 하늘에서 감이 똑 떨어지길 기다리다 역시 안 떨어지잖아 하고 냉소하는 사람 쪽에서, 감나무에 올라볼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 쪽으로 조금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다큐를 하나 보았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는 동네(뉴욕이지만)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사는 할아버지의 얘기다. 그는 건반 소리를 가냘프고 아름답게 내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지,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피아노곡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피아노는 항상 저런 악기였지. 저렇게 섬세하고 따뜻한 소리로, 저렇게 음악을 표현할 수 있었지. 그리고 세상에는 저런 아름다운 곡들이 있었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곡의 음을 하나하나 짚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당연한 것들이 깨닫기 전까진 생각나지 않는다. 항상 그렇다. 

얘기를 들은 친구가 4살 때부터 연주하던 업라이트 피아노를 준다고 했다. 항상 인사를 하던 이웃이 생각해보니 피아노 전공자였다. 수업 얘기를 꺼내니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등 뒤에서 멋진 바람이 불었다. 

피아노 운반 업자를 부르고, 조율사를 부르고, 『바이엘』, 『체르니 100』, 『하농』 책을 샀다. 첫 수업을 했다. 내가 도레미를 치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말했다. 왜 팝 하는 사람들은 (고작 도레미를 치는데) 일일이 손목을 달그락거리죠? 선생님, 그것이 바로 팝입니다. 첫 소절 우우- 에 온 영혼을 담아야 한다고요. (영혼을 담으려면 꼭 손목을 그렇게 해야 하나요 - 아닙니다. 고치겠습니다)

좌우지간, 역시 피아노는 멋진 악기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피아노는 항상 멋졌지만 몇 템포 느린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가끔은 인생의 특정 시간이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청춘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방식, 그리고 에너지가 뻗는 방향을 찬미한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그럴 만하다. 하지만 청춘이 끝나면 삶이 회색이 되어버리는 걸까? 이렇게 피아노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데 그럴 리가 없다. 

1658년생 바흐부터 1833년생 브람스, 1862년생 드뷔시까지, 내가 앞으로 펼쳐볼 수 있는 몇백 년어치의 악보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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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지은(작가, 음악가)

작가, 음악가. 책 <익숙한 새벽 세시>, 앨범 <3>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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