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신유진의 글 쓰는 식탁] 나의 여름과 당신의 여름이 만나면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풀벌레의 시간 속에서 나는 오직 여름만을 산다. 그리고 그 여름은 이렇게 반쪽짜리 하트와 해를 구하려는 소년의 마음과, 모기로부터 구하지 못한 어떤 이의 어깨 그리고 연인들의 손뼉으로 기록되어 누군가의 여름과 만나기를 희망한다. (2022.08.08)

언스플래쉬

“아, 여름 진짜 징그럽다.”

무더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절로 나오는 소리다. 호숫가에 있는 우리 집은 여름이 되면 끝내주게 습하고 덥다. 설상가상으로 에어컨이 고장 나서 일주일도 넘게 수리 기사님을 기다리는 중이다. 내 생에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이토록 애태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요즘 우리 가족은 저녁이 되면 습식 사우나 같은 집 안을 탈출한다. 반려견은 혀를 길게 빼고, 나와 반려인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천천히 해가 지는 호수로 향한다. 공원에 들어서면 이미 행렬이 시작됐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를 찾아 나왔거나 일몰을 보러 온 사람들이 호수를 따라 걷는다. 여름만큼 사람이 싫은 계절이 없는데 사람의 행렬이라니... 그러나 그 저녁에는 어쩔 수 없이 호수의 둥근 어깨를 나눠 갖는다. 사람뿐 아니라 벌레, 개구리, 두꺼비도 함께. 오늘은 두꺼비 세 마리가 행렬에 합류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엄마야!”, 주저앉은 여자들, “만지지 마.”, 손을 뻗는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어른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길을 가던 두꺼비는 어쩐지 조금 더 원초적인 시간으로 들어오라는 여름의 손짓인 것만 같았다.

두꺼비의 등장에 뒷걸음을 치다가 “할머니도 ○○이 사랑해.”를 외치며 영상 통화도 아닌데 머리 위로 반쪽짜리 하트를 그리는 노인을 봤다. 지는 해를 두고 해가 물에 빠졌으니 당장 구하러 가겠다는 아이의 우렁찬 목소리도 들었다. 중년 여성이 개구리의 울음을 듣고 옛 만화 영화 주제곡을 부를 때는 몰래 화음을 얹기도 했다.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필릴리 개굴개굴 필릴릴리~” 

모르는 사람의 어깨 위에 모기가 앉았다. 차마 손바닥으로 내리칠 수 없으니 기침만 두어 번.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은 서로의 취향을 말했다. 삼겹살보다 치킨이 더 좋고, 고소한 커피보다 산미 있는 커피가 더 좋은, 취향이 닮은 두 사람. 그러나 역시 냉면에서 갈리고 말았다.

“나는 비냉이 좋아.”

“어, 나는 물냉이 더 좋은데.”

연인들은 잠시 걸음을 멈췄고 서로를 마주 보다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네가 좋아하는 냉면을 좋아해 볼 테야.”

나는 서로 손뼉을 마주치는 그들을 보며 내가 건너왔던 어떤 여름들을 떠올렸다. 취향을 맞대고 오려서 너와 닮은 무언가를 갖고 싶었던, 너와 닮은 것들로 나를 꽉 채웠던 시절. 그때 그 여름에 나도 물냉면의 맛을 배웠었는데... 나는 지금의 내가 지나간 사랑의 총합인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여름도 뭔가를 부지런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연인은 이제 한겨울에 우동을 먹으면서도 여름에 먹은 냉면의 맛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몇 번의 사랑을 반복하다가, 날씨와 사람과 기분에 따라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적절하게 고를 수 있는 냉면의 고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을, 다른 냉면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했던 것처럼, 사랑도 별들의 시간이 아닌 풀벌레의 시간을 살아야 하니까. 사랑의 시간은 늘 ‘오늘’이어야 한다.

“겨울보다 여름이 더 좋습니까?”

한국어를 배우는 반려인이 연인들의 대화를 듣다가 내게 물었다. 낮에만 해도 여름이 그렇게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던 나는 뻔뻔하게 말을 바꾼다.

“겨울보다 여름이 더 좋습니다.”

“왜?”

“지금은 여름이니까. 겨울이 되면 겨울을 더 좋아할 거야.”

풀벌레의 시간 속에서 나는 오직 여름만을 산다. 그리고 그 여름은 이렇게 반쪽짜리 하트와 해를 구하려는 소년의 마음과, 모기로부터 구하지 못한 어떤 이의 어깨 그리고 연인들의 손뼉으로 기록되어 누군가의 여름과 만나기를 희망한다. 나의 여름과 당신의 여름이 만난다면 어떨까? 내게 더 좋은 것들과 당신에게 더 좋은 것들이 포개진다면, 여름 동안 우리의 사랑의 총합이 조금 더 커지지 않을까? 그러니 대답해 주기를! 지금 당신은 어떤 풀벌레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 물냉면을 좋아하는가, 비빔냉면을 좋아하는가?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신유진(작가, 번역가)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