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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의 글 쓰는 식탁] 고독을 위한 의자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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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의자에 앉아 말을 건넨다. 올해 여름에는 모든 일이 너무 커다랗게 다가와 나를 흔들어댔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삶이라는 궤적의 점일 뿐이고, 내가 그릴 궤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점을 찍는 마음은 돌볼 수 있을 것 같다고. (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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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해인 수녀님의 책에서  「고독을 위한 의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고독을 첫 자리에 두고, 고독을 위해 비워 놓은 의자에 그를 자주 초대해서 깊이 사귈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외로움이 바깥을 향하고 고독이 내면을 향하는 것이라면 내게도 그 고독을 위한 의자가 하나 있다. 그리고 지난 한 달, 그 의자는 주인을 잃었다.

신간이 나오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행사도, 보내야 할 원고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다. 말을 많이 하며 내가 얻은 것은 허기짐, 실수에 대한 불안, 그리고 내게서 달아나는 고독이다. 고독만큼 말 많은 나를 싫어하는 것이 또 있을까? 침묵과 단짝인 그것은 수다쟁이가 된 나에게 질렸는지 한동안 내게 곁을 주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고독을 달래주려고 이른 새벽부터 일어났다. 모두가 잠든 시간, 가을을 알리는 비만 추적추적 내렸다. 차를 내렸다. 찻물을 붓는 소리는 고독을 부르는 노크다. 사방이 캄캄했고, 차의 향기가 좋았고, 창문을 열자 가을 문턱에서 부는 새벽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고독의 마음이 풀어지는 시간을 틈타 의자에 앉았다. 혼자다. 드디어 그와 내가 만났다.

내가 처음 그를 마주한 곳은 파리의 아파트였다. 불행은 늘 다른 불행과 손잡고 함께 온다고 했던가.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또 왜 그렇게 악몽을 자주 꿨는지... 나는 매일 밤 무섭고 불길한 꿈을 꿨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잠을 잘 수 없었다. 바람에 창문이 들썩이던 겨울밤이었다. 내 집은 5층이었고, 나는 밤마다 그곳에서 뛰어내려 나로부터 탈출하는 상상을 했다. 그날도 창문을 열고 다이빙을 연습하는 사람이 수심을 가늠하듯 어둠의 깊이를 가늠해 봤다. 매서운 바람이 달려들었는데 이상하게 속이 후련했다. 순간 그 위태로운 공간이 생을 닫기 위한 곳이 아니라 어둠을 향해 나를 열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하나씩 꺼낼 수 있었다. 사는 일의 버거움과 두려움, 비루함 같은 것들. 내가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침묵 속에서 나의 말이 대답처럼 돌아왔고,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찌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내게 침을 뱉고 가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모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고독이 내게 가르친 것은 '나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설사 나일지라도 내게 모욕의 언어를 던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그 후로도 고독과 나는 오랜 시간 많은 것을 나눴다. 삶은 당연히 하루아침에 나아지지 않았지만, 나아지지 않은 삶으로도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고독에게 배웠던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읽고 쓰는 동안 울음이 노래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내게 상처도 음표와 쉼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내 안에 보기 싫게 그려진 검은 줄도 오선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독의 의자에 앉아 말을 건넨다. 올해 여름에는 모든 일이 너무 커다랗게 다가와 나를 흔들어댔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삶이라는 궤적의 점일 뿐이고, 내가 그릴 궤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점을 찍는 마음은 돌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니 말 없는 이여, 이제는 부디 우리가 기쁜 점을 찍기를 바라노라고. 물론 고독이 대답할 리 만무하다. 그것은 다만 침묵으로 나의 말을 내게 되돌려 줄 뿐이니까. 그러니 어쩌면 내가 그에게 "우리 이제 기쁜 이야기를 나눠 볼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가 아닌 나를 향한 말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좋습니다. 기쁜 고독이여!"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신의 집에 세 개의 의자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우정을, 세 번째는 사교를 위한 것. 나는 사교를 위한 의자를 떠나 고독의 자리에 앉아 그와의 대화를 마쳤고, 이제 책상 앞에 앉아 우정을 위해 이 글을 당신에게 의자처럼 건네 본다. 당신은 그곳에 앉아 고독과 어떤 대화를 나눌까? 무척 궁금하지만 당신과 고독, 둘만의 시간을 위해 가만히 문을 닫는 마음으로 이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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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유진(작가, 번역가)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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