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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의 옛 담 너머] 오늘은 아픈 날

현호정 칼럼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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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아픈 몸.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다가 아프지 않아지는 몸. 아프지 않다가 아파지는 몸. 그것이 실상은 몸의 변화가 아니라 아픔 자체의 비굴함에서 오는 현상임을 아는 이들이 600년을 건너 지금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2024.03.26)


현호정 소설가가 신화, 설화, 전설, 역사 등 다양한 옛이야기를 색다른 관점에서 읽으며, 현대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을 전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세종대왕이 감기 핑계를 대고 중국 사신을 안 만나는 게 어떨지 회의한 이야기를 가끔 찾아 읽는다. 세종실록 53권에 기록된 1431년 8월 12일의 일이다.

“임금이 안숭선에게 이르기를, ‘사신의 행차에 열병이 그치지 않으니 서로 접촉하면 전염될까 깊이 염려되는데, 점장이가 일찍이 액(厄)이 있겠다고 일컫는 말은 내가 믿지 아니하나, 열병은 서로 접촉할 수 없으니, 내가 의정부·육조와 더불어 의논하고자 한다.’ 하니, 숭선이 대답하기를, ‘비록 다시 의논하지 아니할지라도 전일에 대신들의 의논이 이미 정하였사오니, 그 의논대로 따르시어 병을 칭탁하고 피하시는 것이 가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망령되게 병을 칭탁함은 마음에 미안스러운 바이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전하의 일신은 종사의 안위가 달렸사온데 만일 전염되면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3일 문소전별제 뒤에 풍한감기에 걸렸다 하고 회피함이 어떨까.’ 하매, 숭선이 아뢰기를, ‘오늘부터 병이 있다고 칭탁하시면 사신이 반드시 대제에도 오히려 친히 행하지 못하셨으니 반드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것이옵니다.’ 하매, 임금이 그렇다고 말하고, 드디어 문소전과 헌릉의 별제를 정지하였다.”1

그러나 하루 뒤인 13일에 세종은 부축을 받는 연기까지 하게 될 경우를 가정하며 신하들에게 다시 이야기한다. “거짓 붙들고 호위하여 예를 행하면 어떻게 뜰에 가득한 신하들을 보”겠느냐, 병이 났다고 꾸며 말하는 것도 올바른 일은 아니지만 “망령되어 부축하여 호위하는 것은 한 연극을 꾸미는 모양과 같아 더욱 불가하다”2는 것이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맞이하고자 했는데 너희가 의논해 병을 칭탁하자고 아뢰어 이렇게 되었다며 꾸짖기까지 했다.

세종 전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삼색도(三色桃)』를 쓰며 주요 인물인 세자빈 봉씨가 궁에 있던 시기의 조선왕조실록을 전부 읽었지만, 저 8월의 며칠은 세자빈과 특별히 관련이 없음에도 내게 좀 각별히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는 세종이 늘 아픈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저 기사들의 앞뒤에 놓인 8월 12일과 16일의 다른 기사에는 임금이 정말로 아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었다.

12일 갑진 1번째 기사 “임금이 몸이 좀 불편하였다.”3

16일 무신 1번째 기사 “임금의 몸이 편치 못하여 본궁에 이어하였다.”4

늘 아픈 몸.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다가 아프지 않아지는 몸. 아프지 않다가 아파지는 몸. 그것이 실상은 몸의 변화가 아니라 아픔 자체의 비굴함에서 오는 현상임을 아는 이들이 600년을 건너 지금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아픔은 참으로 구차한 고초. 내세울 이유가 되어야 할 때는 삽시간에 시들해지며 멀쩡한 몸을 부끄럽게 만들고, 차분히 독대할 때면 어쩌다 흘린 눈물 반 방울을 가지고도 대단하게 자라나 몸을 휘감아 오니, 기실 무엇이 꾀병이고 무엇이 유난이고 무엇은 엄살이고 무엇이 정말 보살핌받아 마땅한 아픔인지를 늘 아픈 이들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므로 아프다는 말을 언제 꺼낼 것인가의 문제는 늘 아픈 사람에게 부과된 무거운 숙제다. 무슨 날을 아픈 날로 부를 것인가? 나는 언제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죄책감 없이, 수치심 없이…… 평생에 걸쳐 반복해 풀어도 나는 정답을 모르고 아픔은 칭찬을 모른다.

처음에 나는 『삼색도』가 아주 쉬운 소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자빈 봉씨는 착하고 예쁜 사람, 그녀를 괴롭게 하는 주변 인물은 그냥 나쁜 사람으로 그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뜬금없이 지참해 온 아픔은 방울노리개처럼 인물 개개의 유행으로 번졌고, 이 변수는 소설 속에서 매 음절 흔들거리며 고요하던 장면들을 분분하게 했다. 『삼색도』의 모든 아름다움은 거기서 왔다. 실록에 남겨지지 않은 세자빈 봉씨의 이름을 큰 사랑이라는 뜻의 ‘태애’라 지어 붙이며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불러 보았을 세종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세종도 아픈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복숭아 같은 열여섯 살짜리 며느리 이름을 외는 행위가 “너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5는 행위와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소설을 쓸수록 마음이 쓰였다. 그는 세자와 세자빈 모두의 인생을 진흙탕 속에 처박았지만 진실로 그들을 귀애하였다.

다시 1431년 8월로 돌아가서. 결국 세종은 자리에 누워 앓고 사신이 가져온 명 황제의 칙서는 세자가 대신 맞이하니 그와 태애의 나이 열아홉 살 때 일이다.6 그리고 둘은 5년 뒤 세종에 의해 헤어져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다.


1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8월 12일 갑진 3번째 기사. 이하 번역 인용은 모두 실록 웹사이트 참조.

sillok.history.go.kr/id/kda_11308012_003

2  8월 13일 을사 4번째 기사. “사신 윤봉의 처소에 대해 논의하다”

sillok.history.go.kr/id/kda_11308013_004

3  sillok.history.go.kr/id/kda_11308012_001

4  sillok.history.go.kr/id/kda_11308016_001

5  박준 「너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6  8월 17일 기유 2번째 기사 “칙서를 세자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고 음악은 고선궁을 쓰게 하다”

sillok.history.go.kr/id/kda_11308017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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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호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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