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영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 존 버거의 책들
1980년대 중반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1926∼ )의 책은 10종에 이르지만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그리 뜨거운 편은 아니어서 한글판 가운데 절반은 절판 상태에 있다. 내가 존 버거를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로 『녹색평론』 2003년 4~5월호에 실린 「이 시대를 산다는 것의 고통」이라는 글을 통해서다.(『녹색평론』은 그의 이름을 존 버저로 표기했다.) 프랑스 시사잡지 『르몽드 티플로마티크』 2003년 4월호에 실렸던 이 글은 존 버거의 문명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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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1926∼ )의 책은 10종에 이르지만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그리 뜨거운 편은 아니어서 한글판 가운데 절반은 절판 상태에 있다. 내가 존 버거를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로 『녹색평론』 2003년 4~5월호에 실린 「이 시대를 산다는 것의 고통」이라는 글을 통해서다.(『녹색평론』은 그의 이름을 존 버저로 표기했다.) 프랑스 시사잡지 『르몽드 티플로마티크』 2003년 4월호에 실렸던 이 글은 존 버거의 문명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물건을 살 수 없고 하루하루 그저 연명해가는 약 8억에 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다른 비전과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시대에서 온 퇴행적 유물이거나, 평화롭게 또는 무기를 들고 저항이라도 한다면 이들은 영락없이 테러리스트들이다. 이들은 죽음의 사신이거나 질병과 폭동을 전염시키는 자들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들이 ‘다운사이즈’됐을 때―다운사이즈, 이 시대의 핵심어―압제자들은 순진하게도 이 세상이 통일될 거라고 믿고 있다. 압제자들은 해피 엔딩의 환상이 필요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 환상은 깨질 것이다.” 



존 버거의 진가를 뒤늦게 알게 된 것이 2년 가까이 해외사상가의 번역서를 훑어보는 ‘기획리뷰’를 전담하고 있는 나로서는 약간 머쓱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소설가이면서 번역가인 이윤기 선생도 1999년 출간된 존 버거의 장편소설 『결혼을 향하여』(해냄)의 역자 후기에서 “번역에 착수할 당시 역자에게는 작가 존 버거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억을 되살려 보니 나는 존 버거의 책을 진작에 읽은 바가 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대학 3학년 때 헌책방에서 존 버거가 쓴 『사회주의 리얼리즘』(열화당, 1988년)을 사서 읽었다. 무슨 생각으로 헌책방에 있던 여러 권의 ‘20세기 미술운동 총서’ 가운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골랐는지도, 읽기는 했지만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지금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책을 구입할 적이나 읽을 때에도 저자인 존 버거에 대해서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원제가 ‘Way of Seeing’인 『어떻게 볼 것인가』(현대미학사, 1995년)는 존 버거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세 권의 번역 텍스트가 존재한다.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말고도 ‘영상 커뮤니케이션과 사회’ (나남출판, 1987년), ‘이미지-시각과 미디어’(동문선, 1990년)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존 버거의 단독저서가 아니다. 이 책은 BBC방송을 통해 방영된 4부작 텔레비전 시리즈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원제와 같은 제목의 TV프로그램에는 존 버거를 포함해 다섯 명의 비평가가 참여했다. 하지만 존 버거를 책의 대표 저자로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이 책은 미술학도나 미디어 관계자를 위한 ‘보는 것’에 대한 최적의 입문서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본다는 행위는 말에 선행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보고 인지한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제1장은 ‘시각(視覺)’에 관한 통찰이 돋보인다.

“본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주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운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언어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매일 저녁 우리는 해가 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과 설명이 우리가 본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은 보는 이의 기존 지식과 신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지옥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사람들이 가졌던 불의 의미와 현대인들이 가지는 불의 의미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지옥에 대해 그들이 가졌던 개념은 데면 뜨겁다는 신체적 경험뿐만 아니라, 불에 타면 재가 남는다는 시각적인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존 버거는 제1장 내용의 많은 부분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시사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렇다고 그의 보는 것에 대한 통찰력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본다는 것의 의미』(동문선, 2000년)에서 존 버거는 ‘시각’의 특질을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한다. 특히 관찰자로서 사람의 역할에 주목하는데, 그것은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형태로 제시된다.

“동물원을 찾는 가족들에게 있어 그것은 박람회나 축구 경기를 구경하러 가는 것보다는 흔히 더 감상적인 경우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동물원에 데려가는 것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제품’ 원물(原物)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또한 자신들이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는 그러한 복제된 동물들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천진함을 재발견해 보려는 희망에서인 것이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미술비평서의 기색이 농후하다.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제3부 ‘체험된 순간들’은 밀레에서부터 20세기에 국제적인 영향력을 지닌 유일한 영국 화가로 여겨졌던 프랜시스 베이컨에 이르는 주요한 화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18편의 글을 싣고 있다. 

『랑데부』(동문선, 2002년)는 일종의 다성(多聲) 매체다. 그림과 사진을 바탕으로 ‘보는 것’과 이미지에 관한 진득한 탐색이 있는가 하면, 똥무더기를 대상으로 한 그윽한 성찰이 있고, 날카로운 사회비평적 시각도 담겨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격조 높은 에세이집이다. 또한, 탁월한 예술론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 날카롭게 드러나는 첫번째 글 「광부들」에 담긴 존 버거의 분노는 읽는이를 압도한다. 이 책에는 격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글귀도 곳곳에 있다.

“진정한 사랑만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피하는 법” “원래 회의주의자는 인생에 관한 어떤 총체적인 설명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가시적인 것은 훼손되지 않은 언어로 자신을 번역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랑데부』에서 존 버거는 예술 장르로서 영화의 특질을 이렇게 갈파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등장 인물과 동일시한다. 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언어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시네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시네마의 연금술은 그와 같아서 등장 인물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동일시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 바로 영화다.”

1972년 출간된 『어떻게 볼 것인가』를 필두로 거의 10년 간격으로 속간된 『본다는 것의 의미』(1980년)와 『랑데부』(1991년)는 존 버거의 사상의 흐름을 좇는 데 유용한 재료가 된다. 

존 버거는 사진가 장 모르와 여러 차례 공동 작업을 했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눈빛, 1993년)과 『제7의 인간』(눈빛, 1992년)은 그것의 일부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에서 존 버거는 두 사람이 공동작업을 하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장 모르의 ‘제자’를 자청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카메라의 조작법과 사진 찍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나는 장 모르를 찾아갔다. 알렝 타네가 주소를 알려 주었다. 장은 참을성있게 나를 가르쳤다. 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나는 2년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유럽의 이민 노동자를 주제로 삼은 사진에세이집인 『제7의 인간』은 외국인 이주 노동자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미진사, 1984년)는 피카소를 재평가한 비평서로, 번역자인 김윤수 교수에 따르면, “저자는 피카소의 성공은 19세기의 천재개념, 천재의 상품화에 있으나 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로부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에 비극이 있었고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다.”

존 버거는 영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소설가로도 알려져 있으나 우리 독자들에게 그의 소설 문법은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존 버거의 소설은 『아코디언 주자』(민음사, 1991년), 3부작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민음사, 1994년), 『결혼을 향하여』 등이 번역되었지만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진 못하고 있다.

#존 버거 #영국 #지성 #버거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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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낭만푸우

2014.06.17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책들을 틈나는 대로 찾아 읽는데, 그것이 존 버거의 책이어서 더 인상적이었어요. 결혼을 향하여, 의 마지막 장면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듯 합니다. 미술평론가로서의 존 버거만 알았거든요. 소설가로서의 존 버거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썼을 최성일 씨의 글을 만나는 것도. 이렇게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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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18

발터 벤야민에 영향을 받았어도 존버거만의 독특한 글쓰기 영역을 개척했지요. 공동작업도 하고 소설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농사도 지으며 살아가는 참된 지식인 예술가로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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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