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 <씨받이>부터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까지
무뚝뚝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 그분을 보고 있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앞선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묵묵하고 올곧게, 급변하는 한국영화 시장의 중심에서 변화를 게을리 하지 않는 거장.
글ㆍ사진 최재훈
201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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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동시대를 사는 기쁨을 주신 당신 : <달빛 길어올리기>의 임권택 감독

무뚝뚝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 그분을 보고 있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앞선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묵묵하고 올곧게, 급변하는 한국영화 시장의 중심에서 변화를 게을리 하지 않는 거장. 100번째 작품을 지나 101번째 작품을 선보인 임권택 감독을 보고 있자면 존경의 마음을 넘어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1955년 처음 영화계에 입문한 이후, 101편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그의 작품이 다양하게 품고 있는 함의들이 현재에도 전혀 시들거나 낡지 않았다는 점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꼬장만 늘어서 잔소리만 해대는 수많은 꼰대들 사이에서 진정한 ‘원로’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문화계의 거장이 있다는 사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위안이 된다. 그렇게 임권택 감독은 존재만으로도 힘을 주는 존재로 천천히 성숙해 왔다. 그에게선 무거운 맛으로 익어가는 와인의 숙성이라기보다, 뽕뽕 자신이 익어가는 소리를 경쾌하게 울리며 우직해 보이는 항아리에서 익어가는 전통주의 냄새가 난다. 그렇게 임권택 감독은 거장이지만, 어렵다기 보다는 친숙하고 가까운 느낌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가득 채우고, 다시 시작하는 첫 걸음 : <달빛 길어올리기>


문학적이지만, 모던한 느낌은 들지 않는 서정적인 제목을 가진 <달빛 길어올리기>는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고 발전해 있는 ‘스마트폰’ 세대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느림, 기다림, 그리움을 담아낸다.

<서편제>에서 한국의 풍광을 느리고 서정적인 숏으로 보여주었던 그 방식처럼 2년 동안 전주의 아름다운 명소들을 직접 고르고 고심하고 촬영한 흔적은 짧은 예고편을 통해서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임권택 감독, 강수연, 박중훈이라는 중견 배우들의 등장과 ‘한지 만들기’라는 소재 때문에 다소 무겁게 느낄 수도 있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시끌벅적하고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는 우리의 전통 극처럼 들썩거리는 경쾌함도 가지고 있다.


1986년 <씨받이>를 통해 임권택 감독을 처음 만난 강수연은 1987년 동양인 배우로서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얻으며 ‘월드 스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통해 모스코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국내 최고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하였다. 1980년대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세계가 철학적인 성찰로 이어지면서 꽃피던 시기였고, 강수연은 아역 배우를 뛰어넘어 꽃망울을 톡 터뜨린 아름다운 20대였다.

1989년 이후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은 22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대였던 강수연이 지금은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101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딱 세 번을 만난 거장과 중견 배우의 수상한(?) 인연은 오랜 기다림 만큼의 감동으로 자라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시청 공무원(박중훈)과 그의 아픈 아내(예지원),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강수연)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 보관본을 전통 한지로 복원하는 작업에 관여하게 되면서 얽히고 부딪히고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 휴먼 드라마다.

이 영화는 1996년 <축제>이후 15년 만에 완성한 현대물이자, 단 한 번도 디지털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임권택 감독이 현대적 촬영기법을 도입한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오래된 것을 지키기 보다는 동시대와 호흡하려는 거장의 새로운 시도는 큰 기대를 낳는다.

필름대신 디지털 방식을 선택했지만, 촬영의 방법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철저한 고증과 전통 한지의 미학을 재현하고, 디지털 작업이 아닌 살아있는 자연의 풍광을 담아내기 위해 2년의 제작기간을 거치면서 한 겹 한 겹 덧씌운 한지의 고급스러운 느낌처럼, 영화는 깊이 있고 서정적인 풍광을 담아낸다. 게다가 한지의 수명이 천년이 넘는다는 사실은, 임권택 감독이 최근작에서 보여준 전통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불륜’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뚝심,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그 열정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영화는 자칫 무거워보일 수도 있지만, 임권택 감독이 단 한 번도 고루한 설교나 인생에 대한 해답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한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스크린의 크기도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적어져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었던 진정한 대형 화면이 없다는 점은 무척 아쉬운 점의 하나이다.

100, 완전함의 숫자로 각인되다


우리는 다양한 점수제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최고의 점수는 100점일 것이다. 더 이상의 점수가 없는 완벽한 점수, 100.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청춘과 열정을 담아 만들어낸 영화 100편은 그렇게 완벽한 점수이자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었다.

1950년대에 영화계에 입문하여 2011년 현재까지, 나타나고 사라진 수많은 신구 감독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역’인 임권택 감독은 파격 보다는 뚝심으로 험난한 한국현대사를 지켜왔다. 그가 걸어온 길,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 하나의 한국 영화사가 된다고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니다. 임권택 감독과 그를 둘러싼 영화인들의 들고 난 흔적들은 영화사의 일부가 되었고, 한국영화 중흥의 토양과 자양분이 되었다.

<씨받이>

80년대 이후 임권택 감독은 현대물 보다는 시대물에 집중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그의 신념과 궤를 지켜왔다. 게다가 1980년대는 외국인들에게 북한과 남한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한마디로 인지도 낮은 국가 중의 하나였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위해 한국적인 것을 없애고 세계화를 시도하던 어수선한 시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엄중한 검열의 잣대와 어수선한 시국 등 무엇 하나 편한 것이 없었다.

문화예술의 꽃이 갖은 탄압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임권택 감독의 전성기는 1980년대에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강수연의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과 함께였다. 한국이란 사회에 대한 개념이 없던 서양에서 동양의 여배우가 주연상을 탔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로도, 영화사로도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지금에야 박찬욱을 비롯한 젊은 감독들에게 관심이 몰리긴 했지만, 진정한 한국 영화의 축포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베니스 영화제 수상 현장에는 임권택 감독도 강수연도 없었다고 한다. <씨받이>의 본선진출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베니스를 찾은 임권택 감독은 싸구려 호텔에서 묵으면서 일정을 소화하고, 수상 직전 일본의 행사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임권택 감독은 어이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만큼 서툴고 미숙했던 시절의 해프닝 정도로 그 상황을 기억한다 말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때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감독과 주연배우 모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모스코바로 향했고, 언론도 이전과 다르게 큰 호응을 보였으며 결과도 좋았으니, <씨받이> 이후로 영화인과 영화제에 대한 기관의 대접도 단번에 달라진 셈이다. 하지만 모스코바에 참석하기 위해 정부의 반공교육을 받았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55년 정창화 감독의 제작부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이후,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장편영화 감독 데뷔를 하기까지 영화계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최근 영화감독들이 명작 영화의 감동을 가슴에 품고 꿈을 키워나갔던 것과 달리, 당시 임권택 감독은 당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돈을 많이 준다는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연출한 100편의 영화 중 50편은 62년과 73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니, 그가 얼마나 이 시기를 바쁘고 치열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10년 사이 50편이라니…….조금 속되게 표현하자면, 정말 미친 듯이 찍어대지 않으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영화 편수가 아닌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그가 찍은 대부분의 영화는 모두 흥행영화였다고 한다. 임권택 감독은 당시의 자신을 ‘저질 흥행감독’이라며 폄하하기도 했는데, 험난했을 그 세월이 그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분주하게 찍어대는 영화 시스템 속에서 좋은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으리라 생각된다.

1970년대 군사정권에 접어들면서 영화는 새마을 영화와 반공영화가 주가 되었다. TV의 대중적 보급 때문에 영화계는 점점 힘들어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정부가 주도하던 ‘우수영화 추천제’는 ‘우수영화’ 추천을 받은 영화사에 외화수입권을 주었던 제도였다.

외국 영화의 흥행이 가속화 되던 시절이라, 당시의 한국영화는 외국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억지로 제작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당시 정권의 기조를 영화에 잘 녹여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마을 영화와 반공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흥행 압박에서 벗어나 계몽 영화를 만들던 시기에 오히려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철학을 영화에 담아내는 법을 익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그의 작가주의적 감수성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격한 테두리 내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한계는 자명하다. 그 속에 자의식을 녹여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은 거의 도를 닦는 일과 같았을 것이다.

70년대 중반 이장호는 <별들의 고향>으로, 하길종은 <바보들의 행진>으로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당시 임권택은 주류가 아니었다. 청년문화에서 소외된 임권택 감독은 ‘초조하게 이번 영화가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가졌다고 한다.

위로 부터 <만다라>, <길소뜸>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의 작품세계가 꽃피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토속적 삶과 전통적인 정서, 아픔을 딛고 서는 아름다움과 불교적 구도의 세계를 작품 속에 담아내기 시작한 80년대였다.

그의 철학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는 한국에서 보다 외국에서 더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강수연의 여우주연상 수상 이전에도 1981년 <만다라>와 1986년 <길소뜸>이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감독의 한 명이 되었다.

80년대 한국영화는 검열의 엄중한 잣대 속에서 <애마부인> 시리즈와 같은 에로영화가 범람하던 시기였다. 아직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다른 에로영화의 틈에 끼어 2본 상영관을 전전했던 안타까운 기억이 난다.

강수연이 요염한 자세로 앉아있는 포스터에는 온갖 자극적인 문구가 붉은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해외 영화제 수상으로 영화가 재평가 받기 전까지 <씨받이>를 제대로 평가하고 주목했던 한국 언론이 없었다는 것 역시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위로 부터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9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겪으면서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등 작품성 짙으면서도 흥행성도 인정받은 작품을 통해 중견감독으로 우뚝 섰다. 영화계의 주류였던 태흥영화사의 이태원과의 만남은 그의 작품이 보다 대중과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최초 제안 받았던 <장군의 아들>을 선택하기까지 임권택은 오랜 시간 망설였다고 하지만, 이태원의 정확한 ‘감’과 임권택 감독의 연출력이라는 아귀가 맞아떨어지면서, 임권택 감독은 90년대 최고 흥행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고, ‘깡패영화’는 하나의 장르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논란이 되었던 <태백산맥>은 빨갱이 영화로 불리며 그를 압박했다. <파업전야>의 상영 때문에 김명곤이 입건되던 시절, 표현의 자유를 향해 싸우던 시절의 한 복판에 임권택 감독의 작품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임권택 감독은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노는계집-창>을 제작했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시대에 남는 걸작은 아니었다.

21세기를 맞이한 2000년대에는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여,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100번째 연출작이었던 <천년학>을 통해 2007년 베를린 영화제 명예황금곰상을 헌정 받았다. 오랜 뚝심과 장인정신이 관객들의 사랑과 함께 커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존경받을 만한 것이다.

<천년학>

한 감독이 100번째 영화를 연출하고, 그토록 사랑하던 필름촬영 대신 디지털 촬영 방법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뭉클한 느낌을 자아낸다. 노장 감독이 영원한 현역, 시대와 함께 가겠다는 그 선택에 대한 감동이기도 하고, 그의 손을 거쳐 간 수많은 필름 커트들이 아련하게 스쳐지나가 버리는 듯한 아쉬운 느낌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은 90년대 이후 줄곧 한국 근현대사를 훑어왔다. 이는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기도 했지만, 시대의 조류와 함께 타협하기도 했던 자신의 인생을 훑는 일종의 회고록 같은 역할도 한다. 임권택 감독은 당시 체제/반체제, 진보/보수로 재단될 수 없는 틈새의 인간을 들여다보았다. <하류인생>을 통해 임권택은 사람이 하류의 체제 아래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했는지를 유례없이 보여주었다.

거장 감독이 또 한 사람의 남자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아내야 하는 시절은 녹록치 않은 좌절과 패배와 타협의 시기였음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그 자기 반성을 딛고 예술혼을 불태운 <천년학>을 지나서야 그는 소동의 한 복판이 아닌 잔잔해진 인생을 담아내는 법을 터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가 <달빛 길어올리기>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근대에 대한 질문과 자기반성을 벗어나, 다시 현대로 눈을 돌렸다는 그 사실에 있다. 주연배우 강수연은 임권택 감독이 이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영화를 아주 잘 만드는 신인감독 같았다고 한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임권택 감독 역시 101번째 영화를 처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원로가 드문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여전한 현역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뿌듯한 일이라는 걸, 임권택 감독은 증명한다. 우리 시대에도 자랑스러운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서 기쁘다.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임권택 #씨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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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1.11.21

천년학 100번째 그이상의 의미가 있는 영화죠. 감독님의 101번째 영화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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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