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사람을 쉽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타입의 인간이 있다.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보통은 아쉬운 쪽이 예, 하고 찾아가게 된다. 그것을 알기에 ‘그래 너는 얼마나 아쉽니’ 하며 사람을 떠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은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보다 전화 통화를 선호한다. 자세한 설명과 첨부파일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오세요, 한번 오세요”라고 자신의 근무처로 불러놓은 후 “아, 어떤 분인지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로 끝인 경우가 꽤 있다. 심지어, 이렇게 안면을 텄으니 앞으로 너 하는 거 봐서 일을 줄 수도 있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권력을 이용한 갑질이다. 어디서 아주 그냥 못된 것만 쏙쏙 골라서 배운 모양이다. 홈그라운드 편한 거 누가 모르냐, 나도 내 집이 편하다. 네가 와라, X새끼야. 속으로만 욕한다. 내 시간은 네 시간과 똑같이 소중하다. 속으로만 외친다.
제대로 된 첫 미팅은 충분한 자기(업체)소개와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일정을 의논할 땐 상대방의 근무처 위치를 묻는다. 거리가 많이 멀다 싶으면 중간 어딘가에서 만날 것을 제의하기도 한다. 평일에 시간을 내어야 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그 정도의 제스처만 해줘도 기꺼이 찾아간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라면 더욱 그런데, 어떤 회사이며 어떤 공간인지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앞으로의 일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오라 가라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당연한 소리지만, 어떤 일인지 설명을 요청해야 한다. 이때 대답이 뭔가 애매하다 싶으면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삐요삐요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뭔가 촉이 느껴진다고, 쎄하다고 표현하면 샤머니즘이야 뭐야 싶겠지만, 결국은 경험에 의한 통찰이다.
초장부터 아니다 싶은 사람은 끝까지 아니다. 보통 그렇다. 한참 일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말을 바꾸고, 마감 날짜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미리 내놓으라며 사람을 쫀다. 일을 마무리한 후엔 결제까지 하세월이다. 감정 소모. 피곤하다. 자기가 돈주머니를 쥐고 있으니 내 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돈 주는 입장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발언권이 무한정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묻지 않은 것에 대해 굳이 설명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내가 더 잘 알지 싶은 내 전문분야를 가르치려 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방청객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방청객으로 소모된다(그럼 일당을 내놓아라!). 그들은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히 권력의 문제다. 세상 모두에게 통하진 않는 권력, 그래서 사람을 봐가면서 휘두르는 권력. 그 순간 내가 자신보다 만만하다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갑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을질을 당하기 싫은 것만큼 누구에게도 갑질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서로 약속한 일을,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진행하고, 약속한 만큼 돈을 받는 것이다. 그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기분 좋게 바이바이 할 것이고, 만약 꽤 만족스럽다면 다음번 일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이든, 소규모 사업장 대 개인이든, 대규모 사업장 대 개인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회사)과 내가 소통을 통해 협업하고, 좋은 결과를 위해 각 과정을 정성스레 밟는다.
뭐 좋다. 언제나 이렇게 되어준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겠지만 우리 집 빈 화분에 우담바라가 피어날 때나 가능하겠다. 세상에는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동시통역사인 내 언니에겐 “영어 잘하시잖아요, 요 문장만 영작해주시면 안 돼요?”라는 부탁이 끊이지 않는다. 미대 나온 여자답게 나는 “그림 하나만 그려줘. 너 이런 거 후딱 하잖아” 소리를 잊을 만하면 듣는다. 어차피 맨날 컴퓨터 앞에서 일하면서, 잠깐 짬 내서 이거 하나 못 그려주냐며 섭섭해한다. 대부분 그전까진 생전 서로 연락하지 않던 사람들이다. 위아래 입술에 오바로크를 곱게 쳐주고 싶어진다. 친한 사이, 좋은 관계의 사람들은 그런 요청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서로 선을 지키기 때문에 친하고 좋은 것이다.
더구나 일로 만난 사이, 예를 들어 업체 담당자가 이런 소리를 공식적으로 할 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스럽다. 일은 해주되 돈은 바라지 말라니, 1차론 힘이 빠지고 2차론 불쾌하다. 내가 쉽게 쉽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쑴풍쑴풍 잘도 알을 낳는 것 같다면 그 속의 복잡하고 소모적인, 길고 긴 과정을 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명태냐, 명란젓을 줄줄 낳게.
싫다는 소리를 하는 건 어렵다. 많이 어렵다. 친구 사이가 불편해질까 봐 궁시렁대면서도 해주고, 일 관계가 어그러질까 봐 호호 웃으며 어쩔 수 없이 해준다. 프리랜서 창작자가 가장 자주 듣는 말의 리스트를 쭉 뽑아보면 분명 “이번엔 예산이 부족하니 한 번만 싸게 해주세요. 다음번엔 진짜 잘해드릴게요” 소리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높은 확률로 거짓말이다. 말로만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지금 공짜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에도 공짜를 원한다. 예산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창작물에 대가를 지급하는 걸 우선순위의 한참 아래에 두었다는 것이 맞다.
때로 나는 나이를 먹어서 기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부턴가 이런 어이없는 경우를 당하는 횟수가 꽤 줄었는데, 이건 분명 내 나이 덕분이라고 믿는다.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대꾸하지 않는 능력, 웃기지 않은 소리에 웃지 않는 능력,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능력. 능력이라고 썼지만, 그보다는 굳은살에 가깝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렵게 얻은 굳은살. 이것은 프리랜서로 혼자 일해온 20대, 그리고 30대에 부당한 일을 일상적으로 겪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제가 뭐랬다고 그렇게 화를 내세요”라며 예민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모는 경우도 있다. 여보세요, 나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게 바로 네놈입니다. 화를 내는 건 전혀 즐겁지 않다. 심장은 벌렁거리고, 잔뜩 겁이 난다. 하지만 조용조용,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게 무조건 답은 아니다. 오히려, 아름답게 살기 위해선 열심히 싸워야 한다. 아주, 매우, 열심히.
나 같은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이여, 한잔합시다.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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