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시
왜 어른들은 어김없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걸까.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내내 여행지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던 이순재 배우도 아이스크림 앞에서는 표정이 풀어졌다. 우리 엄마도 아이스크림이라면 하드 바든 소프트 콘이든 퍼먹는 통이든 종류 상관없이 좋아하는데. 이순재 배우나 엄마의 어린 시절을 보지는 못했으니 어른이 되어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릴 적부터 쭉 좋아했는지 알 순 없지만, 어른들이 대체로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명제는 만 25년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아직까지는 참이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취향은 부라보콘이나 누가바, 투게더처럼 전통(?)을 자랑하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다. 내게 가장 강력한 수능 금지 CM송은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인데, 엄마 대학 시절에 부라보콘을 먹으며 자신도 열두 시에 누군가를 만날 거라며 설레했다는 이야기를, 부라보콘의 껍질을 뜯을 때마다 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아이스크림이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인가 보다.
하지만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사람 좀 몰린다는 장소에는 순(純) 우유 아이스크림이 아닌 바닐라 향이 첨가된 듯한 다소 인공적인 색과 맛의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가 있었다. 맛은 주로 세 가지였다. 바닐라, 초코, 그리고 바닐라와 초코가 반반씩 나오는 맛. 요즘처럼 컵이나 콘을 선택할 수 없고 무조건 콘으로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 먹지 않으면 녹아내려서 금방 손이 찐득찐득해지곤 했다.
엄마는 나와 둘이 외출하는 날에는 자주 그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특히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처럼 평소에는 자주 가지 못하는 곳에 갔을 때나 치과 치료를 마친 날에는 어김없이 사주어서, 그런 아침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이스크림 생각에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도 백화점에 간 날이었다. 나는 조금 설레 있었고, 엄마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의 상태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데,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멈춰 섰다. “정연아, 엄마 안 되겠어. 몸이 안 좋아.” 엄마는 사람이 많은 닫힌 공간에 가면 자주 힘들어했다. 우리는 다시 백화점에서 나왔다. 엄마는 바깥 공기를 좀 쐬더니 다시 들어갈 수 있겠다고 말했다. 다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왔다. 몇 번 반복하면서 나는 조금 성질을 냈고, 엄마는 몇 번 더 시도했고, 우리는 결국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아니었지만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는 공황장애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것 같다.
며칠 전, 오랜만에 엄마와 백화점에 갔다.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해보라고 하자 엄마는 됐다면서도 파운데이션 쿠션과 눈썹 그리는 펜슬 같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머쓱했는지 내게 필요한 것 없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답했고, 실제로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 무언가를 사주고 싶어했다. “네가 힘들게 일해서 버는 돈인데, 엄마가 이렇게 써서 어떡해. 너 오늘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냐?” 나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며 엄마에게 팔짱을 꼈다. 꼭 아이스크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한 것이 먹고 싶기도 했다. 우리는 백화점 지하로 내려가서 아이스크림 매장을 찾아 헤매다가, 최근에 리뉴얼하면서 아이스크림 매장이 빠졌다는 직원의 안내를 듣고 나서야 백화점을 나섰다. 요즘엔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안 사 먹나 봐 따위의 대화를 하며 역으로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바닐라와 내가 좋아하는 녹차, 두 가지 맛을 골랐다. 다 먹고 남은 빈 통에 스푼 두 개를 담으니 왠지 충만한 기분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엄마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