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연산군 등 역사 인물부터 문재인, 박근혜, 안철수, 이재명 등 최근 정계 인물까지 고유의 심리분석으로 화제를 모은 심리학자 김태형이 이번엔 ‘풍요에 중독된 한국인의 심리’를 분석했다.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정신건강을 전문적으로 연계해 분석해온 대표적 사회심리학자인 저자는 오늘날 한국인의 삶을 “학대를 피해 미친 듯이 위계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풍요중독사회』는 끝이 없는 위계 속에서 불안을 방어하고,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다 풍요중독자가 된 사람과 사회에 대한 사회비평서이다. 이 책은 우리가 각종 불화와 혐오심리에 시달리는 병리적 풍요-불화사회에 살고 있다고 진단하고, 여기서 벗어나 물질과 정신건강이 대등하게 보장된 풍요-화목사회 시민이 되기 위한 방법들을 총 7장에 걸쳐 이야기한다.
지금의 한국인의 삶을 “학대를 피해 미친 듯이 위계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보셨어요.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올라가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로 만든 것일까요?
한국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단순한 불화 사회(상대적인 의미에서의 가난-불화 사회)에서 다층적 위계 사회(풍요-불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사회가 3~4층짜리 위계 피라미드 사회였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100층짜리 위계 피라미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조선 시대에는 크게 보면 양반-평민-천민이라는 위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평민들은 양반에게는 존중을 받지 못하고 학대당하고 무시당하지만 압도적 다수인 평민들끼리는 사이좋게 지내기에 존중 불안은 심하지 않았지요.
반면에 소득 수준 등에 의해 만들어진 무수한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 즉 평민들 사이에도 촘촘한 위계가 있는 지금의 다층적 위계 사회에서는 평민들이 사이좋게 지내지 못합니다. 위계 간 학대와 위계 내 학대가 일반화되어 존중 불안이 극심해지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조선 시대 사람들은 위계 상승 욕망이 거의 없었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학대를 피하기 위해(존중 불안 방어를 위해) 위계 상승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죠.
코로나-19사태가 이렇게 극심한 위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코로나-19 사태는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더 악화시킬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는 한국 사회를 비롯한 오늘날의 세계를 향해 인류가 근본적인 변화를 꾀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기보다는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미봉책으로 이번 위기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이죠.
만일 한국 사회가 미봉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설사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더라도 그것이 남긴 후유증과 상처가 한국 사회의 위기를 더 심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생존 불안, 존중 불안 그리고 불화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할 수 있죠. 대선을 둘러싼 미국 사회의 극단적인 분열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우리가 코로나-19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두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코로나-19는 우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각자도생의 삶에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각자도생의 길로 질주해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 있다, 즉 이웃과 사회가 건강해야만 나도 건강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일깨워주었습니다. 또한 코로나-19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평등의 중요성을 새삼 자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의료 서비스의 수준이나 국가의 의료비 지출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대단히 불평등하죠. 한국인들은 코로나-19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미국을 목격하면서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돈과 물질에 중독적으로 의존하기보다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그동안 한국 사회에 있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돈과 물질 중독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추구하려는 경향, 작은 공동체를 통해 건강한 관계를 추구하려는 경향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거대한 급류 속에서 상류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효과가 제한적이고 사회에 일반화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시도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국민들의 집단적 노력일 것입니다. 최근의 촛불항쟁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촛불항쟁으로 국민을 억압하던 정권은 몰아냈지만, 사회는 거의 바뀌지 않았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 상당한 부작용을 낳고 있지요.
2000년대생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추구할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모습일 거라고 예측하시나요?
젊은이들이 현재와 똑같은 사회에서 계속 살아가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심리상태가 지속된다면 능력에 따른 차별적인 경제적 보상을 공정과 정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경제적 차별과 그로 인한 다층적 위계를 당연시하고 그런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젊은이들이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이 거의 없는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심리상태가 좋은 쪽으로 변화한다면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게 되겠지요.
평가 불안, 존중 불안, 추방 불안 등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불안의 종류를 새롭게 세분화하셨어요. 이 중에서 세대별로 특별히 더 시달리는 불안은 무엇일까요?
20대에게 가장 심각한 불안은 뭐니뭐니해도 생존 불안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요즈음 아이들의 꿈이 정규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생존 불안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지요. 물론 젊은이들은 존중 불안도 심합니다. 이것은 젊은 층일수록 평가 불안이나 사회 불안이 더 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중장년층에게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불안은 존중 불안입니다. 중장년층은 다층적 위계사회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학대나 무시를 많이 경험합니다.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절대다수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돈을 꽤 벌어서 생존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온 인생을 바치는 거지요.
이 책을 단 한 명에게 읽게 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권하고 싶으신가요?
이름을 특정하기는 어렵겠지만, 한국 사회를 바꾸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깨끗한 정치인이나 사회개혁가가 읽었으면 합니다. 이 책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했다. 주류 심리학에 대한 회의로 학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존 심리학의 긍정적인 점을 계승하는 한편 오류와 한계를 과감히 비판하고 ‘올바른 심리학’을 정립하기 위해 매진하면서 사람과 사회를 분석하는 작업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무의식의 두 얼굴』, 『자살공화국』(2017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도서), 『실컷 논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2016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도서), 『싸우는 심리학』,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 『트라우마 한국 사회』, 『거장에게 묻는 심리학』, 『불안 증폭 사회』(2011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도서), 『사이코패스와 나르시시스트』, 『새로 쓴 심리학』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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