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5월 우수상 - 나카무라 커피숍
이 시기가 끝나고 무거운 캐리어와 꽉 채운 배낭 없이 가벼이 그곳에 갈 수 있다면, 나무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스무 살의 누군가를 만나 함께 손을 잡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
글ㆍ사진 임재원(나도, 에세이스트)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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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요즘 들어 자주 꿈을 꾼다. 꿈속에 나는 어김없이 그곳에서 그 나라 언어를 쓰며 생활한다. 정신없이 뒤엉킨 교차로를 건너고, 사람들로 붐비는 출퇴근 지하철에 몸을 맡기며 ‘결국 나는 다시 이곳에 돌아왔구나. 어쩐지 소중한 무언가 하날 놓고 온 듯했는데 결국 다시 왔어.’ 혼잣말을 되풀이한다. 혼곤한 꿈에서 깨어나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낮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면, 그제야 꿈이었단 생각에 작은 안도와 묘한 허무를 느낀다.

한 시절 나를 품어줬던 곳.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 처음 갔을 땐 똑같이 사람 사는 곳에 왔을 뿐인데, 그것도 아득바득 말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뿌리치고 스스로 원해서 왔음에도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다. 바깥은 벚꽃이 완연히 피고 진 봄이었지만, 겨울을 나는 것처럼 몸을 한껏 웅크리고 다녀야 마음이 편했다. 사람들이 화분증으로 가려워서 눈 비빌 때, 향수병을 겪던 나는 눈물을 훔치려 자주 눈 비볐다. 차마 돌아가고 싶다고 말은 하지 못했지만, 밤마다 외로움에 끙끙 앓던 나를 치료해 준 건 시간이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몸도 조금씩 어깨를 펴고 다니기 시작했다. 달아오르는 세상의 열기에 모두가 스스럼없이 제 속을 드러내는 여름이 시작되고부터였다. 

낯선 풍경이 익숙해지고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자 한 가게에 마음을 뺏겼다. 할머니 댁을 연상케 하는 파란 양철 지붕, 나고 자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갈색 벽돌로 마감된 외관. 그 조합이 단조로워 보이지 않도록 최소한의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놓인 게 분명한 네모난 화분에 담긴 형형색색 꽃들까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가게였다. 가게 앞에 멀뚱히 서서 갈색 벽에 붙은 하얀 글씨를 소리 내 읽었다. ‘나.카.무.라 코우히이테엔. 아! 커피숍이구나!’

‘카페’가 아닌 ‘커피숍’이란 올드한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비단, ‘코우히이텐’을 ‘커피점’이라는 말로 머리가 직역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8, 90년대에 머물러있는 그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를 마시러 들어갈 법한 ‘다방’의 이미지, 일본의 레트로 커피 전문점을 지칭하는 ‘킷사텐’을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하루에 커피 서너 잔을 기본으로 마시는 지금이라면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겠지만, 당시 나는 커피를 전혀 마실 줄 몰랐다. 게다가 지금보다 겁도 훨씬 많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끔 보던 대로, 멜빵바지를 입은 할아버지가 콧잔등에 안경을 걸치고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문 채 무심한 표정으로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 손은 물 주전자를 천천히 돌리며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켜켜이 새겨놓은 상대의 포스를 아무렇지 않은 척 이겨내며 카운터에 앉아 마시지도 못할 커피를 주문할 배짱이 없었다. 

다가갈 용기는 없지만 멀리서 바라보며 혼자 좋아하고 혼자 상처받는 짝사랑처럼,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짝사랑 가게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카운터에 앉아 홀로 커피를 홀짝이며 상념에 잠기는 내 모습에서 시작된 상상은 이윽고 무뚝뚝한 주인장의 마음에 든 단골로 변했고, 어느새 나카무라 커피숍의 나카무라상과 나는 인생을 논하며 나이를 초월해 진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상상 속에서 말이다. 

작은 나무문이 그땐 왜 그렇게 굳게 잠긴 철문처럼 크게 보였는지 늘 문 앞에서 주저하던 나는 몇 개의 계절을 아무 소득 없이 흘려보냈다. 더 이상 진전될 리 없는 짝사랑 가게와의 상상도 시들해지고,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며 어느 틈엔가 그곳을 잊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먼 훗날 일 줄 알았던 귀국 날짜가 다가오고 나서야 불현듯 짝사랑 가게에 마음을 전하러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에 사는 내내 가게를 좋아했다고, 오늘 한국에 돌아가는데 커피 맛이 궁금해서 마지막으로 맛보러 왔다’고 주인장이 묻지도 않을 질문의 대답을 연습하며 23kg에 맞춰 꽉꽉 눌러 담은 캐리어와 터질듯한 배낭을 메고 낑낑대며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게에 도착하니 야속한 팻말 하나가 수문장처럼 나를 막아섰다. ‘테이큐우비.’ 정기휴일을 알리는 팻말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토록 오랜 시간 이 앞을 지나다녔건만 언제 정기 휴일인지도 모르고 지냈다니… 실로 아무것도 모르고 수박 겉핥기식 사랑을 하는 짝사랑 가게다운 라스트 신이었다. 고백도 못 하고 차인 기분이었지만, 그날의 아쉬움과 허탈함은 시간이란 약이 또다시 금세 잊게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커피 맛도 어렴풋이 아는데… 무심한 할아버지가 있을지, 다정한 아주머니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분 좋게 커피 한 잔 마시고 ‘잘 먹었습니다’라고 눈 마주치며 인사할 수 있는데… 나카무라 커피숍은 잘 있을까? 외로웠던 어린 날, 홀로 마음을 줬던 그 가게가 안녕한지 요즘 들어 꿈에 그곳이 보일 때마다 궁금하다. 

이 시기가 끝나고 무거운 캐리어와 꽉 채운 배낭 없이 가벼이 그곳에 갈 수 있다면, 나무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스무 살의 누군가를 만나 함께 손을 잡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싱긋 웃는 나는 지난 10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니가이케도 얏빠리 오이시이네-’


임재원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을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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