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문화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서울은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이름이다. 문화재 보존처리 전문가로 일하던 시절 SNS에 짤막한 설명과 함께 한 장씩 올린 유물 사진이 화제가 되어 해당 콘텐츠를 책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그렇게 출간된 『유물즈』 가 전문가와 작가, 일반 독자들에게 두루 사랑받으며 독립출판물로는 이례적으로 품절 사태를 거듭하다 현재는 두 배의 가격을 내걸어도 구하기 힘든 ‘희귀템’이 되었으니 말이다.
김서울의 새로운 상상력과 관점이 이번에는 궁궐로 옮겨가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이 탄생했다. “고려(시대 유물)는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라면 조선(시대 유물)은 어쩔 수 없이 친오빠를 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던 작가가 조선시대 대표 유적인 서울의 5대 궁궐을 거닐며 느낀 감상을 특유의 위트와 유머를 버무려 산뜻하게 담아냈다. 어딜 가나 정신없는 서울 한가운데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기다리는 조선의 고궁을 ‘돌과 나무로 만든 숲’이자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휴식처로 바라보며 마치 내 친구의 집과 정원을 구경하듯 구석구석 애정을 담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독립출판물 『유물즈』 , 『뮤지엄 서울』 이후 세 번째 책을 출간하셨는데요, 주로 실내 유물을 중점적으로 다뤘던 이전의 저서들과는 다른 책인 것 같아요. 어떤 책인지 간단히 소개해주시겠어요?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은 서울에 있는 조선의 다섯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저의 시선과 취향으로 편집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궁궐을 주제로 한 기존의 책들과는 조금 다르게 역사 위주의 서술이 아닌 저 김서울의 개인적인 궁궐 감상법을 녹여냈고 더불어 돌, 나무 등 궁궐을 이루고 있는 여러 요소를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전의 책에서는 실내에 주로 전시되는 한국의 문화재와 유물을 살폈다면 이번에는 처음으로 실외 공간과 유물을 다루었다는 차이도 있습니다.
유물과 박물관 등 한국의 오래된 것에 대해 꾸준히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오셨는데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지금의 나를 만든 기원이 무엇인지, 어떤 문화적 배경이나 과정, 변화가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언젠가부터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좀 다르게 말하자면 ‘나는 왜 지금과 같은 문화적 배경에서 사는 한국인이 되었나’에 대한 호기심이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니 현대 한국이라는 국가와 문화를 만든 과거의 물건으로 관심사가 자연스레 옮겨갔어요. 유물의 배경에 깔린 흐름이나 결을 추측하고, 주변의 풍경에 그걸 대입해보기도 하면서 나름의 답을 찾고 있고요. 더불어 이런 흐름이라면 미래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작가님의 관점이나 시선이 젊은 독자들에게 특히 좋은 반응을 얻는 이유가 뭘까요? 독특한 시선이나 상상력의 원천이 있다면요?
박물관, 유물 하면 지루하고 경직된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 거리감을 느끼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현대적인 시선과 언어로 쉽게 풀어 설명해주어 좋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저 역시 역사책이나 박물관 설명의 카드를 보면서 비슷한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최대한 쉽게 풀어 쓰려고 했고, 유물을 보면서 예전에 그걸 사용했을 사람들과 풍경을 그려보고 그 풍경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풍경과 비교하다 보니 제 상상이 글에 많이 녹아든 점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재미있게 생각해주시는 듯해요.
그동안은 주로 박물관 등 실내 보관된 유물을 대상으로 글을 쓰다 이번에는 그 시선이 실외 유적인 궁궐로 옮겨갔는데요, 실내 유물을 감상할 때와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요?
박물관의 유물은 사시사철 같은 환경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관람 환경이 유물을 현실과 동떨어진 물건으로 보이게 할 때도 있죠. 분명 당시에는 일상적인 사물이었을 텐데 지금은 유리관 속 은은한 조명 아래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실외 유적인 궁궐은 날씨와 계절, 심지어는 그날의 궁궐 관람객 수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크게 달라져요. 박물관 속 유물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시대’라는 배경 때문에 현재의 서울과 분리되는 느낌이라 흥미로웠습니다.
같은 계절에 방문하더라도 각각의 궁궐이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산책 동선에 따라, 또 관람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매번 분위기가 달라져요. 이런 부분이 실내 유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멜멜 사진작가와 협업은 어떠셨나요?
평소에 워낙 팬이었기 때문에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 언젠가 꼭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그 원을 풀었어요. 다섯 개 궁궐을 함께 돌면서 어느 궁이 가장 좋은지, 좋아하는 고궁의 풍경이나 요소가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시선을 공유할 수 있어서 더 좋았고요. 좋아하는 공간을 다른 이의 눈과 손을 빌려 다시 들여다보면서 저도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답고 귀여운 구석을 발견하는 특별한 경험도 했습니다. 작업 과정 전반이 무척 즐거웠어요.
궁궐 답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이른 봄에 혼자 창덕궁에 갔는데 살짝 흐리던 날씨가 우산을 쓰기에도 애매한 안개비로 바뀌었어요. 날씨 탓인지 관람객도 거의 없었고요. 저 역시 우산을 챙겨 가지 않아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조용한 창덕궁을 거닐다 길을 잃었는데 나중에 보니 원래도 관람객이 드문 궐내각사 부근이었더라고요. 길을 찾지 못해 한참 그 주변을 빙빙 돌다가 작은 문을 지나니 제 인기척 때문인지 땅에서 혼자 놀던 까치가 푸드덕 날아가고 비를 피해 지붕 아래 숨어 있던 고양이도 담장 너머로 훌쩍 사라져버렸어요. 그 소리에 덩달아 놀라서 순간 멈춰 섰는데 제 주변으로는 궐내각사 전각에 고요한 공기만 가득한 거예요. 그 사실이 문득 낯설게 다가왔고, 그 순간만큼은 정말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날씨가 무척 좋아서 궁궐 전체가 반짝거리던 날도 있었고 궁궐의 석수들을 슬며시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던 기억도 있지만 고궁이라는 공간에 몸을 푹 담갔던 것만 같은 비 오던 날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네요.
아직 궁궐이 낯설고 어려운 궁궐 산책 초보자에게 권하고 싶은 궁궐 혹은 궁궐 감상법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먼저 초록빛 풍경을 보러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보세요. 꼭 무엇을 알아야 한다거나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편안하게, 눈을 쉬게 해준다는 느낌으로 고궁을 산책하다 보면 분명 마음에 들어오는 장면이나 요소가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요. 그리고 다음번에는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고궁을 거닐어보는 거죠. 기억 속 그 장면이 이번에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마음에 들어오는 또 다른 풍경이 있는지 하나씩 기억과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차츰 고궁이라는 공간에 익숙해지고 알게 되는 것도 점차 많아질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이와 그 풍경을 나누고 싶어지고요. 그렇게 동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궁에 대한 추억을 다채롭게 쌓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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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초록
202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