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나무 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일요일에도 학교에 뛰어가던 소녀는 자라서 식물 그림을 그리는 식물학자가 됐다. 그의 일러스트는 식물의 정보와 특징, 형태, 생애를 세부적으로 보여주는 학술적 그림이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는 식물 자체를 본다. “그림이 아니라 원래 그 식물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신혜우 작가는 식물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식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식물학자의 노트』를 썼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식물
그림을 그리는 식물학자이고,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이기도 해요. 자기소개를 할 때 보통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요즘은 ‘과학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소개해요. 혹은 식물 도해도를 그리는 사람이요. 제가 그리는 건 보테니컬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주로 연구 목적으로 사용되는 학술적인 식물 그림이에요.
대학에서 식물학을 공부하며 식물 도해도를 그리기 시작하셨죠.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식물 실험실에서도 종종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교수님께서 식물을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죠. 식물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그림이 꼭 필요하다고요. 그때부터 식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보테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이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야라 배울 수 있는 책도 없고,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교수님이 동경대에서 박사과정을 하신 분이었는데, 일본에서 가지고 온 책을 몇 권 보여주신 게 다였죠(웃음).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던 찰나에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분야이지만 열심히 해서 이 길이 맞으면 국내 식물 연구에 좋은 보탬이 되는 일이고, 그게 아니라 해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거다. 3년만 열심히 해봐라. 그게 모이면 뭐든지 된다”고요. 그 말에 감명을 받아서 밤 늦게까지 남아 그림을 그렸어요. 무작정 교정에 있는 식물부터 그리기 시작했죠. 초반에 했던 스케치를 보면 백목련, 개나리, 살구나무 같은 것들이 많아요.
식물 그림이 무척 고된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그림이라는 걸 책을 읽고 알았어요. 현미경으로 일일이 식물의 형태를 관찰하고, 정확한 표본을 구하기 위해 여러 해를 기다리기도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은 ‘예술’보다 ‘연구’에 가까워요. 저 스스로는 여전히 그림이 아닌 식물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식물학 연구도 어떤 것은 글로, 어떤 것은 그래프로, 어떤 것은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제가 하는 건 그중 그림인 거죠.
특히 오래 걸린 그림이 무엇인가요?
‘시서스 에렉타(Cissus erecta)’라는 포도과 식물을 완성하기까지 5년 넘게 걸렸어요. 저에게 그림을 의뢰한 박사님이 미얀마에 연구 프로젝트를 하러 갔다가 발견한 식물이었는데요. 채집을 떠났다가 길을 잃었고, 비가 쏟아지는 길을 걷던 와중에 낯선 식물을 보고 가져왔는데 도감을 찾아보니 없는 거예요. 세계에 보고된 적 없는 신종이었던 거죠. 당시 저에게 그림을 의뢰하며 보여주신 건 열매였어요. 그래서 꽃도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멸종위기종이고 길을 잃어서 발견한 식물이라 찾기가 어려웠어요. 사실 새로운 종을 보고하는 논문은 내용이 많지 않아요. 보통 4장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꽃을 찾아다니는 데만 5년의 시간이 걸린 거죠.
그림에 그릴 식물은 어떤 기준으로 정하나요?
개인적으로는 형태학적이나 생태학적으로 연구가 덜 된 식물을 그려요. 의뢰를 받을 땐 연구와 관련된 일이 우선이고 상업적인 그림은 후순위로 두죠.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될 그림이라고 해도 식물을 정확하게 그려야 한다는 원칙은 꼭 지켜요. 제일 아름다운 식물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식물이 들어간’ 그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관념적으로 꾸미지 않고, 식물이 있는 그대로 진정성 있게 그려져야 보는 사람도 아름답다고 느껴요. 그림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식물이 아름다운 거죠.
식물학자, 첫 번째 꿈이었다
6살 때 처음 식물도감을 보고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다고요.
어릴 때부터 식물을 좋아했어요. 매일 꽃잎을 분해해보고 그러니까 오빠가 저를 “식물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죠(웃음). 그러던 어느 날 김태정 선생님의 『어린이 식물도감』이라는 책을 보고 식물학자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죠. “네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했던 대답이 “식물학자”였어요.
식물이 왜 그렇게 좋았나요.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라면서 계속 바뀌는 모습이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초등학교 1~2학년때쯤에는 학교에 있는 동백나무의 씨앗을 양쪽 주머니 가득 주워 와서 집에 심기도 했어요. 시골집이라 마당이 넓었는데 몇 개는 ‘그늘 지고 습기가 많은 곳’에 심고, 몇 개는 ‘햇빛이 많은 곳’에 심은 다음 어디에서 싹이 나는지 관찰했었죠(웃음). 그 동백나무가 지금은 제 키만큼 컸어요.
와, 그 나무가 여전히 살아있군요.
네, 지난 겨울에 집에 내려가서 사진을 찍어왔는데 제 키보다 조금 크더라고요. ‘내가 태어난 해 이 나무를 심었다면, 우리가 동갑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쉽더라고요. 아기가 태어난 기념으로 나무를 심기도 하잖아요. 참 의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식물학 박사이면서 식물 그림을 그리는 이력이 독특해요. 학부 때는 어떤 학생이었어요?
특이한 학생이었어요. 1학년 때부터 패션디자인을 복수전공해서 제가 패션디자인과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았어요. 교수님들이 의류 전공자들은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 해서, 희한한 옷을 입고 자연대 건물을 들락날락 거렸던 기억이 나요(웃음).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이시죠.
흥미가 생기면 고민없이 도전해보고 질릴 때까지 해야 그만두는 타입이에요. 덕분에 식물 연구를 하면서 그림도 놓지 않을 수 있었죠. 흔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왜 하나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커서 찾아봤더니, 현대사회에 대학과 전공이 생긴 게 약 2~300년 밖에 안 되더라고요. 이전 사람들은 원래 다양한 일을 했어요. 루소도 교육학자인 동시에 식물학자였거든요. 저는 식물학과 그림도 질리면 언제든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라지는 것,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
책을 읽으며 ‘식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큰 고민 없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나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삶이요. 식물을 공부하며 깨닫는 게 많을 것 같아요.
인간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걸 많이 느껴요.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보면 ‘지구에서 인간만 사라지면 되겠다’는 파괴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하고요(웃음). 자본주의의 여러 산물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죠. 일상적으로는 물건이 많이 쌓인 걸 볼 때 그래요. ‘한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한가?’ 생각하면 아찔해요. 특히 저는 천천히, 오랫동안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점점 더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애착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식물에게 위로를 받을 때도 있나요?
위로를 받기 보다는 응원을 하게 돼요. ‘제발 잘 살아남아라. 내가 한라산에 다시 올 때까지 살아있어라. 더 이상 개체수가 줄지 말아라’ 같은 기도를 하죠. 안타까운 경험이 많거든요. 한번은 제주도 어느 계곡에 멸종위기종인 식물을 보러 찾아간 적이 있어요. 먼저 도착한 다른 식물학자들이 어제 그 꽃이 핀 걸 분명히 봤다고 했는데, GPS 주소를 받아서 똑같은 장소에 갔더니 하루 사이에 구덩이가 파여 있더라고요. 이미 밀수꾼들이 와서 가져간 거죠. 난초 종류는 밀수가 정말 많아요. 멸종위기종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죠. 식물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춘란’ ‘보춘화’ 같은 종은 줄무늬나 반점이 있는 등 약간의 변이만 있어도 비싼 값에 잘 팔리거든요.
식물을 잘 안 키우신다고 들었어요. 식물학자가 식물을 안 키운다는 게 의외였는데, 이해가 가네요.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도리어 소유하지 못하는 거죠.
어제도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화분을 사가지고 와서 한바탕 뭐라고 했어요(웃음). 인테리어용으로 인기가 높은 식물들은 대부분 외래종이거든요. 우리나라 식물이 아닌데 여기까지 떠나와 있는 걸 보는 것도 슬프고, 좁은 화분에 갇혀 있는 걸 보는 것도 슬프고, 제가 그 식물을 소유함으로 인해 거기에 얽매이는 것도 슬퍼요. 여러모로 좋은 방향이 아닌 것 같아서 웬만하면 안 키우려고 하죠.
“독초들만 모아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159쪽)”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요. 책을 읽으며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어요.
사실 제가 좀 우울한 성향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인생을 어떻게 마칠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요. 추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삶을 정리하는 건 너무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 고민 끝에 나온 생각이었어요. 독초를 잘 키운 다음, 그걸로 만든 독약을 먹고 생을 마감해야겠다고요(웃음).
소설 같은 결말이네요.
나는 식물학자니까 그에 걸맞는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식물 채집을 하느라 오지를 많이 다니다 보니까 인생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어떻게 하면 식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여기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고민 끝에 깨달은 건 ‘잘 사라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거였어요. 우리도 자연이니까,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자연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침대 곁에 두고 잠들기 전에 한 꼭지씩 읽고 주무셨으면 해요. 그래서 숲에 가는 꿈을 꾸신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스미소니언 환경연구센터의 연구원을 거쳐 현재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식물형태학적 분류 및 계통 진화와 같은 전통적인 연구부터 식물 DNA바코딩과 식물 게놈 연구와 같은 최신 연구들을 수행 중이며, 식물생태학 분야로 연구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는 신진연구자다. 영국왕립원예협회의 식물세밀화 국제전시회에서 2013, 2014, 2018년 참여하여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고전시상 트로피와 심사위원스페셜 트로피를 받았다. 영국왕립원예협회 역사상 참여하여 연속 모두 3번의 금메달과 트로피를 수상한 유일한 작가다. 영국왕립원예협회,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등에 다수의 그림이 컬렉션으로 선정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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