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무언가를 선사한다”
성공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뮤지션 애리는 ‘실패 일기’를 썼다. 원래 ‘1집 앨범 제작기’가 되어야 했던 일기는 매일의 실패로 채워졌지만, 그 끝에는 무언가가 남았다. 사랑하는 친구와 외로운 밤 곁을 지켜준 책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안아주는 따뜻함”이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일기책 『그리고 일기가 남았다』는 원래 ‘1집 앨범 제작기’가 되어야 했다고요.
어느 순간 올해 안에 앨범을 못 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실패 일기로 흘러갈 때쯤 뮤지션 이랑 님을 만났어요. 이랑 님이 본인의 경험담을 나눠 주시면서, 창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니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거기에 용기를 얻어서 일기책을 내게 됐어요.
과연 일기를 책으로 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 고민도 많이 하셨죠.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웃음) 그럴 때마다 편집자님이 ‘세상 사람들은 이걸 읽어야 한다’고 용기를 많이 주셨죠. 사실 누구나 실패를 겪으면서 살잖아요. 제 일기가 지금 힘들거나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나 공감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 역시도 우울한 작품을 보면서, 나만 힘들거나 우울한 게 아니구나 위안을 얻을 때가 많았거든요.
책을 낸 지금은 어떤 기분이 들어요?
당시에는 하루 하루가 흘러가버리는 느낌이었는데, 책으로 묶고 보니 무언가 이어져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에도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보살펴 온 것이니까요.
꿈에서 일어난 일을 쓴 것도 재밌었어요. 어린 시절, 아침마다 가족에게 꿈 이야기를 할 정도로 꿈을 오래 좋아해왔다고요. 애리님에게 꿈은 무엇인가요?
제게 꿈은 그냥 재밌는 거예요.(웃음) 안전한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나쁜 꿈을 꾸더라도 깨어나면 괜찮아지잖아요. 내가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생각하는 게 너무 재밌고요.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책도 꿈과 환상이 등장하는 것을 좋아하나요?
특히 환상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과 만날 때, 너무 좋아서 전율이 밀려와요.(웃음) 어린시절에는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을 좋아했고요. 미국에 교환학생 갔을 때,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 푹 빠졌어요. 처음에는 이야기가 무거울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토니 모리슨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누군가는 내 작품을 문학적이지 않다고 한다. 내가 아프리칸계 미국인이자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이 이야기를 멀리한 건 아니었을까 반성하기도 했어요.
직접 읽어보니 어땠어요?
너무 무섭고 슬퍼서 밤을 새가며 읽었어요. 토니 모리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구조적인 차별을 고발하는데요. 개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숭고하거나 추악한 감정을 정말 세밀하게 묘사해요. 거기에다 환상적인 분위기까지 있죠. 『빌러비드』와 『가장 푸른 눈』을 특히 좋아해요.
뮤지션 패티 스미스가 쓴 『저스트 키즈』를 재밌게 읽었다고요. 70년대 뉴욕에서 예술가들의 우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지는데요. 애리님의 일기에서도 친구들의 존재가 중요하죠.
음악을 시작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 지금은 친구들이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특히 같이 음악을 하는 여성창작자들이 큰 힘이 돼요. 『저스트 키즈』는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인데요.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우정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지만, 제게는 굉장히 성숙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보였어요.
김초엽 작가의 소설도 좋아한다고 했죠.
정말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요. 지금 여기서 읽어봐도 될까요?(웃음)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중략)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감정의 물성」,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216-217쪽)
감정의 이름을 가진 물건을 만지면, 그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인데요. 우울증에 시달리는 보현은 ‘우울’이라는 물질을 갖고 싶어하는데, 연인인 정하는 그런 보현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위 문장을 읽는 순간, 놀랐어요. 보현은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자기 손에 쥐고 돌보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죠. 사람들이 우울한 예술작품을 찾는 이유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아직 나오지 않은 1집 앨범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는데요.
동료 뮤지션 키라라가 데모를 듣더니 ‘화개장터’라고 표현했어요.(웃음) 제 색채가 녹아 있지만 장르가 굉장히 다양해졌거든요. 첫 EP앨범 때는 강해 보이고 싶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오랫동안 자우림 밴드를 좋아해서 친구들끼리는 ‘자우림 키드’라고 하는데요.(웃음) 자우림도 워낙 다채로운 음악을 해왔잖아요.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서, 저도 다양한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애리님의 일기는 계속 이어질까요?
편집자님이 『프란츠 카프카-꿈』을 선물로 주시면서, 다음 책은 ‘꿈 일기’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감사했어요. 죽기 전에 한번쯤 ‘꿈 일기’를 쓰면 재밌지 않을까요?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일기가 책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 문보영의 에세이 『일기시대』는 큰 힘이 됐다. 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책. 그렇게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꿈을 꾸며, 음악을 만들어왔다.
*애리 뮤지션. 2018년 EP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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