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슬포슬한 눈밭 위에서 친구를 찾던 두더지가 새로운 계절을 만났다. 김상근 작가의 두더지 시리즈(『두더지의 고민』, 『두더지의 소원』) 세 번째 이야기는 『두더지의 여름』이다. 모두 휴가를 떠난 한여름, 혼자 땅파기 연습을 하는 건 싫은 두더지는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새 친구 거북이를 만난다. 마음씨 고운 두더지는 거북이의 집을 찾아주기 위해 함께 바다로 떠나는데, 땅파기에 서툴어 매번 좌충우돌이다. 과연 둘은 무사히 바다에 도착할 수 있을까?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두더지와 내내 묵묵한 거북이, 서로 다른 두 친구의 우정은 여행을 하며 점점 깊어진다.
땅을 못 파는 두더지도 있으니까
두더지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눈 내린 마을에 살던 두더지에게 여름이 찾아왔어요.
늘 다른 계절에 사는 두더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두 권의 전작 모두 겨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렇다고 계절을 여름으로 상정했던 건 아닌데요. 어느 날 심심해서 두더지가 땅파는 장면을 그리다가 '이 끝이 바다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다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 신나게 노는 두더지를 상상하다가 이야기가 점점 발전했죠.
이번 책 작업은 특히 고생스러웠다고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나요?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닌데 마음이 힘들었어요. 책을 만드는 동안 변화가 많았거든요. 회사 생활을 하다가 그림책 작업을 병행하는 게 어려워서 퇴사를 했고요. 결혼도 했어요. 작업 공간도 바뀌었죠. 여러 변화 속에서 빨리 책을 완성하려다 보니 조급해졌던 것 같아요. 두더지 시리즈가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부담감도 컸고요. 전작과 어깨를 견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 걱정이 많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마감을 좀 더 미루고 싶었는데요. 편집자님이 "두더지가 제일 빛나는 시기에 책이 나와서 세상에 이 이야기를 빨리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여름 안에 꼭 책을 완성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예상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여름이 다 지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전작들과 그림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작업한 건가요?
디지털 작업의 비중이 커졌어요. 『두더지의 고민』, 『두더지의 소원』은 겨울이 배경이라 손으로 그리는 작업이 많았거든요. 포슬포슬하고 몽실몽실한 겨울의 질감은 수작업이 더 어울리니까요. 반면, 여름은 깔끔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기를 바랐어요. 자연스레 디지털 작업을 많이 하게 되었죠.
처음으로 땅을 파는 두더지의 습성이 드러난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주인공 두더지는 땅파기 연습을 싫어합니다.(웃음)
두더지가 땅을 못 판다는 설정이 귀엽게 느껴졌어요(웃음). 현실에서도 그렇죠. 회사원이라고 다 일을 잘하고, 학생이라고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 지점이 『두더지의 여름』을 관통하는 큰 메시지이기도 해요. 땅파기에 서툰 두더지의 모습이 재미를 더해요. 바다를 찾아 나섰는데 땅파기로 도착한 곳은 욕실, 수영장, 결혼식장 분수 등 엉뚱한 곳이었죠. 두더지는 땅파기를 싫어하는데, 물이 없으면 거북이가 위험할까봐 땅을 파다 보니 계속 실수를 할 수밖에 없어요.
땅파기에 서툰 두더지가 친구를 위해 좌충우돌하면서 둘 사이가 더 깊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함께 목표를 이뤘을 때 오는 성취감도 훨씬 클테고요. 어려운 일을 함께 겪으면 정말 친해지잖아요.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하던 두더지와 거북이는 뒤로 갈수록 점점 가까워져요. 거북이가 두더지 등에 누워서 잠을 자고, 함께 웃으며 수박을 나눠먹기도 하죠. 위트있으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모두 가진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게 정말 어려웠던 것 같아요.
서로의 존재 덕분에 성장하는 이야기
수많은 동물 중 거북이를 친구로 택한 이유가 있나요?
예전부터 두더지에게 단짝을 만든다면, 거북이가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거북이는 행동이 느리고 때로는 멍하지만 그래서 생각이 깊어보이기도 하잖아요. 거북이의 느리고 조용한 특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죠. 말 많은 두더지와 말없는 거북이가 친구가 된다는 설정도 재미있었고요. 서로 다른 둘이 만났지만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둘은 끈끈한 사이가 됐어요. 이제 두더지에게 땅파기 실력까지 생겼으니 둘은 어디든 함께 다닐 수 있을 거예요.
사실 거북이의 집은 바다가 아니었는데, 두더지의 오해로 바다에 가게 돼요. 거북이는 왜 말없이 두더지를 따라갔을까요?
어쩌면 거북이도 바다에 가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두더지는 갑자기 거북이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거북이의 보금자리였어요. 그림을 잘 살펴보면 거북이의 엄마 아빠가 나무 틈 사이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죠. 느닷없이 낯선 친구가 나타나서 바다에 가자고 했는데 순순히 따라간 걸 보면 거북이도 바다가 궁금했던 것 같아요. 호기심이 생기지만, 혼자서는 시도하지 못했던 일인데 친구가 함께 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죠.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거북이가 나지막하게 "오늘 정말 재밌었어. 고마워. 두더지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뭉클하더라고요.
말없는 친구가 건네는 말에는 큰 무게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장면은 거북이도 한 단계 성장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두더지와 함께 바다를 찾아가면서 새로운 풍경들을 보고, 낯선 경험을 하며 마음이 조금 더 커진 거죠. 이전에는 표현을 하기 어려워하는 친구였지만 여행의 즐거움 덕분에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자랐어요. 두더지는 거북이 덕분에 땅을 열심히 파면서 마지막에는 스스로 "나 이제 땅파기 선수야!"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죠. 두 친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두더지와 거북이가 이별을 앞두고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잖아요. 슬프고 애틋한 순간을 따뜻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이 그림을 그리려고 제주 바다에 노을을 보러 갔거든요. 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데 파도 소리가 굉장히 커서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 않더라고요. 이 장면에서도 아무런 대사가 없죠. 아마 두더지와 거북이도 말없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가 지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봤을 것 같아요.
독자들이 알아봐줬으면 하는 디테일이 있을까요?
첫 장면에서 "오늘도 땅파기 연습 가니?"라는 할머니의 질문에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요. 내일요."라고 대답하는 두더지 위로 여러 동물들이 휴가를 떠나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 등장인물들이 두더지와 거북이가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다시 등장합니다(웃음). 이를테면 두더지가 땅을 잘못 파서 도착한 욕실은 곰 가족이 호캉스를 떠난 호텔의 객실이에요. 다른 친구들도 수영장, 결혼식장 등 곳곳에 숨어 있죠.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이 어디로 여행을 떠났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또, 바다에서 등장하는 바다거북이와 두더지의 친구가 된 육지거북이의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요. 바다거북이는 지느러미가 길고, 등이 넙적하죠. 반면, 육지거북이는 등이 둥글어서 위험을 감지하면 등껍질 안으로 쏙 들어가 숨을 수 있어요. 두 거북이의 차이를 한 장면에 넣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림책을 다 읽은 뒤에 아이들과 서식지가 다른 거북이에 대해 알아봐도 즐거운 생태 공부가 될 거예요.
누구나 자기만의 때가 있다
두더지는 친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지금까지의 두더지 시리즈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우정'이죠. 작가님이 생각하는 친구란 무엇인가요?
사람은 누구나 허물없이 내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둘이든, 셋이든 그 관계 안에서 공유할 수 있는 스토리가 쌓이면 거기서 긍정적인 화학 작용이 발생하죠.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끼리는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관계가 친구 아닐까요. 저에게는 아내가 그런 친구예요.
작가의 말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너에게'라고 쓰셨어요. 아내를 향한 메시지인가요?
맞아요. 저는 두더지처럼 골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요. 작업에 대해 한참 골몰하다 보면 그 안에 갇혀서 다른 걸 볼 여유가 없죠. 아내는 그런 저에게 바깥 세상을 보여줘요. "이제 여름이 왔어. 바깥 풍경이 너무 멋져"라며 창문을 열어주는 사람이거든요. 두더지와 거북이가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을 잘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분이에요. 상상으로 그리는 풍경과 직접 노을을 보고 그린 풍경은 분명히 다를 거라면서 당장 비행기 표를 예약하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두더지 시리즈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존재는 '할머니'예요. 두더지에게 따뜻한 위로이자, 고민의 해답이 되어주는 존재죠.
조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애틋하고 짠한 감정이 들어요. 잊을 수 없는 풍경도 몇 가지 있죠. 시골집에 놀러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할머니가 마당에 앉아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던 모습 같은 거요. 한번은 할아버지께서 다리를 수술하셔서 제가 할아버지를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돈 적이 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나 시골에 가면 자랑해야겠다. 손자 등에 업혀서 산책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라며 무척 좋아하셨어요. 이런 장면들을 떠올릴 때마다 뭉클해져요. 작가는 필연적으로 작품을 닮아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의 책에서도 이런 경험과 감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종종 강연을 가면 학부모님께서 아이의 진로를 걱정하시는 모습을 자주 봐요. 특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자녀가 있다면 더 그렇죠. 아이의 꿈이 화가인데, 어떻게 해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물어보는 분이 많거든요. 제가 그림책을 만든다고 했을 때 저희 부모님도 걱정이 많으셨어요. 하지만 그냥 별말 없이 지켜봐주셨죠. 그 묵묵한 응원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다 자기만의 때가 있어요. 할머니가 두더지를 흐뭇하게 바라봐주는 것처럼, 묵묵히 응원을 해준다면 아이들은 적절한 때에, 자기만의 땅파기로 멋지고 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성인 독자 분들께도 드리고 싶은 이야기죠. 지금은 어렵고, 안 풀리는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분명히 원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두더지가 땅파기 선수가 된 것처럼요.
앞으로도 두더지 시리즈는 계속되겠죠?
얼마 전에 북토크를 했는데 한 독자 분께서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했으니까 두더지의 사계절이 다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처음 그림책 작업을 시작할 때는 『두더지의 고민』 하나만 바라보고 출발했어요. 그게 『두더지의 소원』이 되고, 어느덧 『두더지의 여름』까지 만들게 되었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두더지의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상근 (글·그림)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아이들 안에는 어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가득하다. 아이와 어른, 우리 모두의 호기심이 오래도록 반짝이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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