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서 작가의 첫 소설 『요산요수』는 서사와 상징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생의 어느 지점에 의도치 않게 산에 꽉 붙잡혀 그곳을 떠나지도, 또 맹렬하게 오르지도 못하는 한 가족.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결국 하산, 파탄이었다. 가족 구성원들의 일탈과 파멸을 다루면서도 이야기 내내 위트를 잃지 않는 이 소설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심상치 않은 작가'라는 감상을 쏟게 한다. 국내에 이토록 적나라하고 구미가 당기는 가정 소설이 있었는가? 하지만 『요산요수』는 놀랍게도 김지서 작가의 첫 작품이다.
『요산요수』가 첫 작품이라는 게 정말 인상 깊어요. 이 소설을 집필한 시기 혹은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학교 2학년 때 전공으로 시나리오 창작 강의를 들었는데 그 과목은 시험을 안 보는 대신 학기 말에 단편 시나리오나 단편 소설을 한 편 제출해야 했어요. 마감은 점점 목을 죄어오고, 시나리오로 쓸 만한 글감을 찾다가 우연히 신문 기사에서 본 산악회 불륜을 단편으로 다루면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구상하게 되었죠. 하지만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 막상 노트북 앞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쓰려고 하니 그 주제를 제대로 다룰 만한 깜냥이 안 돼서 처음엔 포기했었어요.
'요산요수'라는 제목과 '산악회 불륜'이라는 큰 틀만 갖고 그렇게 몇 년을 묵혀두다가 4학년 2학기였던 작년 봄에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어느 날 갑자기 심심풀이로 쓰기 시작했어요. 3월에서 4월 사이에 전체 분량의 90%를 썼는데, 마지막 하산 부분에 이르자 돌연 재미가 없어져버려서 쓰는 걸 딱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도 써놓은 게 아까워서 개인 블로그에 올렸는데, 당연히 반응이 없었고 반응이 없으니까 나중엔 블로그에 올려둔 것도 잊어버리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취직이 돼서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회사 일이 엄청 힘들었던 주의 주말에 충동적으로 『요산요수』의 미완성본을 출판사 수십 곳에 투고했어요. 스물한 살에 구상해서 스물다섯 살에 쓰기 시작했는데 스물여섯 살이 돼서야 겨우 완결을 낼 수 있었네요. 출판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끝맺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소설 속 인물들이 마치 실존 인물을 그대로 옮겨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구체적이에요. 우리 주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현대 청년들이 대면하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껴안고 있는 인물, 큰딸 정희였어요. 등장인물을 설정하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남의 망한 인생 이야기, 남의 망한 사랑 이야기는 돈 주고 사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박완서 작가님도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삼아야 자기 행복과 안위가 더 고소하고 맛나다고 하셨잖아요. 일단, 그 남의 망한 인생 이야기에 독자들을 몰입시키려면 그들의 불행이나 파탄이 특별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했어요. 독자들이 인물들에게 공감대를 가질 수 있도록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가능한 한 그 세대, 그 성별, 그 나이의 전형성을 대변할 수 있도록 설정했죠.
가령,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인서울 4년제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사회에 나왔으나 자리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계약직으로 소모되는 정희는 제가 생각하는 이삼십 대 사회 초년생들의 전형이에요. 정희가 겪는 불행이 특이할진 몰라도 특별하진 않은 거죠. 반면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그때그때 감정에 휘둘려 후회할 짓을 매번 반복하는 준희는 제가 생각하는 이십 대 초반의 전형이었어요.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어린 남자애의 표본 같은 이미지죠.
그러나 동시에 이 전형적인 인물들의 관계에 묘한 아이러니가 있으면 더 웃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연영과에 다니는 얼굴이 좀 반반한 남동생은 식구들 몰래 밤마다 호스트바에 출근하는데 그 누나는 연애 경험, 성 경험이 전무하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정희는 성 경험이 없어요) 근데 가족들 몰래 휴가 기간에 자궁 적출 수술을 받고...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그들의 부모는 절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모르는 걸 독자들은 알고 있다면, 그 정보의 간극 때문에라도 맨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들이 소설을 읽게끔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을 아우르는 가장 큰 주제는 산입니다. 일반적으로 산이란 체력을 보충하고 새로움을 환기하는 생명의 공간이란 인식이 있는 데 반해 소설 속 산은 발을 헛디뎌 추락할 수도 있고, 길을 잘못 들면 헤어나오지 못할 심연으로 빠질 수도 있는 공간으로 묘사되어요. 작가님에게 산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어렸을 때 가족들끼리 노래방에 가면 외할머니, 어머니가 술을 드시고 꼭 부르던 노래가 있었어요. 양희은 '한계령'. 뜻은 잘 몰랐지만 '저 산이 내게' 하면서 시작하는 그 노래가 어린 마음에도 굉장히 슬펐던 기억이 나요. 한국의 아름다운 산 영상을 배경으로 어두운 노래방 안에서 미러볼 조명을 받으며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깨 위에 돌 짐을 잔뜩 짊어 메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는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나의 할머니나 엄마가 아니라 그냥 한 인간, 그것도 당장이라도 산안개 뒤로 훌쩍 사라져버릴 인간 같아서 슬프고 때때로 낯설기까지 했어요.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할 때만 해도 주말마다 산을 찾는 욕구 불만의 중년 남녀를 희화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어요. 끝없이 헛발질하며 걸음걸음마다 스텝이 엉키는 미련한 인생들. 근데 계속해서 한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그가 왜 그 순간에 그렇게 행동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나름의 이해가 생겨요. 계속해서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그를 연민하게 되고 연민하게 되면 더는 그를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거죠. 작고 어두운 노래방 모니터 화면 속에 16분할로 나오던 그 산이 최초로 제 안에 연민의 씨앗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뱀이 나오면 지그재그로'라는 문장이 강렬해요. 인생을 살면서 장애물이나 구덩이를 맞닥뜨리게 되면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단 요령껏 구불구불하게 지나가면 된다는 삶의 지론이 느껴지는 문장입니다. 이는 작가님이 추구하는 삶의 태도가 반영된 것인가요?
한때 시중에 나와 있는 소설 작법서, 시나리오 작법서를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작법서에 꼭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인물에게 강한 목표(동기 혹은 욕망)를 부여하라'는 일종의 정언 명령이었어요. 그땐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까 로버트 맥기 씨가 한 그 말이 순 헛소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면 내가 보기엔 일단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쳐도 실제로 원하던 A를 손에 쥔 후에는 막상 내가 욕망하던 A와 실제 A 사이에 영 거리가 있다는 사실에 자주 뜨악해지는 게 인생 같았으니까요.
사람들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그날그날 하루하루를 수습하며 최악의 사태를 대충 피해 가는 식으로 삶을 운용하는데 그마저도 생각처럼 잘되진 않는다.
이게 스물다섯 살의 제가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어요. '욕망-행동-장애물-성취 혹은 실패'의 서사가 아니라 헛발질, 비틀거림, 우연, 함정으로 이루어진 제가 생각하는 인생의 한 꼴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고 얼렁뚱땅 흘러가는 그런 인생에서는 뱀이 나오면 지그재그로 갈 수밖엔 없을 테니까요.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미 가족이라는 의미는 해체되었고, 그럼에도 어영부영 붙어살 것인가 미련 없이 돌아설 것인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박씨 가족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들이 각자 이 사건을 어떻게 갈무리할지 궁금해집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한 사람을 오랫동안 같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철이 들기도 전부터 꽤 오랫동안 저에겐 그게 가족이었어요. 그리고 겉으로 티를 안 낼 뿐 다들 속은 비슷할 거라고 봐요. 박씨네 가족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시끄럽던 집구석이 강 밑바닥처럼 고요해졌으니, 각자 자기 방 안에서 나름의 생각에 잠기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된 거죠. 제가 쓰긴 했지만 사실 소설 마지막 문장 그다음에 펼쳐질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순간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어찌 됐든 인간은 배우가 아니고 여기는 무대가 아니니 장엄한 비극 같은 건 기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강 덮어놓고 살지 않을까요? 그게 가족이니까. 살면서 겪는 여러 일들 가운데 명확한 끝이나 결말, 갈무리가 있는 게 오히려 드물잖아요. 대부분은 그냥 잊히고, 우리들에게 죽음 말고 주어진 다른 끝은 없으니 저도 박씨네 가족도, 산이 좋아 산악회 회원들도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냥 그렇게, 계속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왜 영화감독들이 곤란한 질문이 들어오면 관객들의 상상과 해석에 맡기겠다고 인터뷰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저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들에게 아웃소싱을 주고 싶어요.
다른 독자들보다 조금 더 빨리 『요산요수』의 마지막 장을 덮어본 사람으로서, 마지막이 결코 마지막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작가님의 세계가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을 거란 감상에는 개인적인 아쉬움도 섞여 있는 듯합니다. 작가님의 차기작에 대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다음에 써보고 싶은 주제나 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회사야 때려치우면 되고 애인이야 헤어지면 되고 친구는 절교하면 그만이지만, 이놈의 가족은 꼴도 보기 싫은데 안 보면 또 걱정되고, 사람을 아주 피 말리는 끔찍한 인간관계잖아요. 게다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라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고 좁아터진 집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꼭 사방이 거울로 된 거울의 방에 갇힌 것 같아 사람을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기도 하고요. 누구 하나 기운 빠져서 관짝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갈등이 봉합될 리가 없는 게 가족이라는 거죠.
『요산요수』가 물에 뜬 기름 같은 어색한 가족 이야기였으니 다음에 쓰는 가족 소설은 서로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징그러운 한국의 모던 패밀리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친구 같은 딸, 어린 애인 같은 아들, 큰아들 같은 남편, 엄마 같은 와이프, 애같은 노인, 세상 다산 애늙은이' 등의 단어로 대표되는 한국의 일그러진 K-모던 패밀리 이야기를 그 집에서 키우는 멍멍이의 시점에서 한 편 써보고 싶고 그걸 다 쓰면 그다음엔 클로짓 게이와 결혼한 자기 언니 이야기를 몰래 홈비디오로 찍어서 영화제에 출품하려는 정신 나간 여동생 이야기도 한 편 쓰고 싶어요. 후자는 세 모녀 이야기가 될 텐데 세 명의 여성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정신머리가 뒤틀려 있고 그 뒤틀림에서 오묘한 유전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 좀 기대되기도 해요.
『요산요수』를 읽은 독자들은 어떤 감상을 하게 될까요?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겨주세요.
솔직히 말하면 소설을 쓸 때 메시지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아요. 처음 소설을 써본 열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늘 똑같은 방식으로 소설을 써왔어요. 어느 날 문득 웃긴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나면 그 아이디어를 가장 잘 압축할 수 있는 제목을 지어서 제목만 따로 메모해두는 식으로요. 열네 살 때부터 이런 제목이 늘 백 개도 넘게 쌓여 있었는데 당연히 그중 9할은 흐지부지 사라졌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제목이 계속 뇌리에 맴돌면, 이제까지는 단순히 불린 콩에 불과했던 아이디어를 그제야 맷돌에 넣고 서걱서걱 갈기 시작해요.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정하고 세부 플롯까지 구상한 뒤 겨우겨우 쓰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을 거치면서 불린 콩은 차차 두부 비스무레한 꼴을 갖추게 됩니다. 소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 같은 건 사실 없어요. 교훈이나 주제 의식보다는 그냥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사무친 어떤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가장 효과적으로 재미있게 잘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클 뿐이에요.
*김지서 1997년 1월 출생.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낸 책으로 장편소설 『요산요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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