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거대한 작업물이나 완벽한 글이 아니라 새해 목표를 위한 한 문장을 지어낼 때도 잠잠히 생각을 가다듬는 혼자의 시간은 꼭 필요한 법이다. 각종 OTT 서비스나 SNS로 방 안에서도 좀처럼 혼자로 지내기 힘든 시절, 다른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또 어떤 식으로 그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인터뷰집 『혼자를 짓는 시간』은 그렇게 우리가 쉽게 엿볼 수 없는 무언가를 오롯이 지어내는 과정의 순간에 관하여 창작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를 이끈 두 사람, 각각 '그래픽 노블'과 '사진'이라는 시각 예술로 창작 활동을 하면서 '헨과 예조이의 요리연구회'라는 활동명으로 비정기적 팝업 식당을 열어, 요리와 창작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김헤니, 황예지 작가를 만나보았다.
『혼자를 짓는 시간』은 두 분의 인터뷰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책이잖아요. 먼저, 어떤 계기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리고 인터뷰 예상 질문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헤니 : 이 책은 저희 둘이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다가 서로의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새로운 말을 꺼내놓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나에 관해서 진지하게 질문해주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거든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듣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우면서 배워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 프로젝트의 예상 질문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건, 어떤 사람이 이미 만들어낸 결과물에 관한 질문들이 아닌 그 과정으로 시선을 옮겨보자는 것이었고요.
모두 여섯 분의 여성 창작자분들이 인터뷰에 참여해주셨는데요. 어떤 기준을 두고 인터뷰를 제안하신 건가요? 인터뷰를 통해 그분들에게서 발견한 공통된 태도나 성품 같은 것도 있나요?
황예지 : 결과보다는 과정을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에게 수정할 부분을 발견하고 선뜻 수정하는 사람들, 이 이야기를 타인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들, 이런것들이 저희의 기준이었던 것 같아요. 창작물이나 삶에 대해서 완성형의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일치감을 주고 싶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각자의 터전 혹은 투쟁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살아가는 마음은 레시피처럼 공유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또렷해졌어요. 그들의 공통된 태도는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강건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짓고 지키는 태도들이 아닐까 싶어요.
각 인터뷰 말미에 수록된 레시피도 특별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창작과 요리 모두 '짓다'라는 동사와 참 잘 어울리는 행위라는 생각도 했고요. 두 분의 공통분모가 창작 이외에 요리이기도 하잖아요. 창작하는 마음과 요리하는 마음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김헤니 : 재료와 기존에 존재하는 레시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요.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오면서 '창작'이라는 말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쓰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문법이나 형식 자체가 다른 작업물을 더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저도 조금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고요. 하나의 레시피로 같은 요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만들면 매번 미묘한 맛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고, 완전히 똑같이 만드는 일이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요리도 창작물도 날씨나 분위기 같은 주변의 환경적인 요소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되기도 하구요. 저와 예지 씨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데 모아 만든 것이 '혼자를 짓는 시간'이 된 것 같아요.
평소 '혼자의 시간'에 무얼 하세요? 그것이 창작하는 작업과 결국 어떻게 연결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김헤니 : 올해는 주로 읽거나 공부하거나 쓰면서 보냈어요. 좋아하는 작품을 읽고 나면 작가가 새롭게 연결해놓은 한 단어가 저를 툭 건드리고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데, 보통 그런 한 단어에서 출발해서 저의 글짓기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서로 다른 영역, 다른 언어의 책들을 동시에 읽어나가는 걸 즐기는데, 그러면 조금 더 폭 넓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다른 사람의 의도나 욕망이 제게 깊이 간섭하게 되는데, 책을 읽을 때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혼자일 수 있어서, 그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취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마주하는 시간이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 시간들이 모여 자신만의 고유성을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느끼고요.
황예지 : 저는 일할 때나 타인과 교류할 때 제 몸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긴장을 하는 편이라 혼자 있는 시간에는 이완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몸에 힘을 풀어두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재차 물어봐요. 잠자기, 집안일, 영화나 드라마 보기, 잡념을 이어가기... 뭐 이런 것들을 주로 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혼자 기반을 다지고 나면 모든 부분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어요. 작업을 할 때도 적당히 긴장이 풀 수 있고 제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돼요.
인터뷰에 참여한 창작자들에게 어둠을 밝혀주는 '랜턴'같은 존재가 있는지 물어보셨잖아요. 두 분은 이번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것을 책으로 쓰면서 '랜턴'과도 같이 의지하고 싶은 문장을 만났나요?
김헤니 : 랜턴은 자신을 밝히면서 주변도 함께 밝힌다는 말을 발견하고 와 닿아서 그 이미지를 인터뷰 안으로 끌어들이게 되었어요. 가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참여해주신 분들이 모두 진심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말들을 전해주셔서, 매번 머릿속 한구석이 밝아지는 기분이었어요. 기존의 질문들이 해결되고 나니 새로운 질문들이 고개를 들긴 했지만요.(웃음)
황예지 : 저는 문장에 의지하는 것보다 분위기나 표정에 의지하는 것이 강한 사람이에요. 랜턴 같은 문장보다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을 밝히고 다른 이들까지 밝히는 눈빛을 많이 보았어요. 그 총명한 눈빛들이 꽤 긴 시간 생각났고, 다른 이들도 책을 읽으면서 그 눈빛 안에 있다는 느낌을 느끼길 바라서 사진 찍을 때 신경 썼던 기억이 나요.
인터뷰를 진행하고 다른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고민이 정리되었다거나 생각이 명료해진 경우가 있었다면 들려주세요.
황예지 : 작업을 하면서 '경청'이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았어요. 재빠르게 변모하고 경쟁적인 구도를 빚는 사회적인 분위기 안에서 타인, 어떤 가치를 오래 응시하고 듣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그걸 훈련해야 내가 바라는 연결이나 연대가 가능하다고 느껴지더라고요. 대화를 하며 관계를 맺을 때, 경청하고 다름을 발견하고 배우는 일을 놓치지 않는다면, 다양한 감정을 공유하는 연습을 한다면, 고립을 느끼는 순간이 확연히 줄어들겠다고 느꼈어요.
마지막으로 『혼자를 짓는 시간』을 특히 누가 읽어봐줬으면 하는지, 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김헤니 : 자신이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나 20, 30대 여성분들이 많이 읽어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꼭 창작물이 아니어도 자기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여성 창작자들을 인터뷰하게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젊은 남성분들도 이 책을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자기 자신을 지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가진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여성들에게는 '혼자'라는 키워드가, 남성들에게는 '함께'라는 키워드가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황예지 : 저는 불특정 다수에게 닿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뾰족하다가도 평평한 책이어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느껴요. 한 사람의 삶을 깊게 열람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요. 책상 맡에서 읽을 때, 비행기 안에서 읽을 때 그 기분이 다 다르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깊게 듣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경청이 가진 놀라운 재주를 독자와 함께 알고 싶어요.
*김헤니 프랑스 앙굴렘 유럽고등이미지학교(EESI)에서 만화 창작 과정을 수료했다. 단편 만화 「헤니의 시도」, 에세이 요리 만화 「이리저리 헤맨 사람의 레시피」를 쓰고 그렸다. 현재 단편 만화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네가 보는 세상』 『노인들은 늙은 아이들이란다』 등이 있다. * 황예지 사진가. 19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집과 기록을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그들의 습관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시작했다. 개인의 역사에 큰 울림을 느끼며, 가족 사진과 초상 사진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사진집 『mixer bowl』, 『절기season』를 출간하고 개인전 〈마고Mago〉를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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