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의 선택
키슬 저 | 좋은생각
부제는 '어떤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의 자기혐오 해방 일지'라고 적혀 있네요. 이런 종류의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 책을 제가 좀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제까지 <책읽아웃>에 나와서 소개한 적도 있고.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한다면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이 있을 것이고, 이후에 한국에서도 여성이 저자인 알코올 중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박미소 저자의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던 걸로 기억을 하고요. 제가 생각했을 때 올해 말에는 키슬 저자의 『어리고 멀쩡한 중독자들』이 그 계보를 잇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자가 알코올 중독이 되었고 중독의 늪에서 빠져 나와서 상처를 회복했는가, 그 노력을 십여 년 간의 엄청난 노력을 담은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고요. 흔히 여성이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이 되면 많은 경우에 식이 장애랑 같이 나오게 되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여성들한테 '너는 해야 할 일을 맞춰서 해야 되고, 동시에 너의 신체적인 요건도 날씬하고 마르고 예뻐야 한다'라는 방식을 끊임없이 주입시키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남성의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자는 15년 동안의 알코올 중독과 10년여 정도의 식이 장애를 자력으로 극복했다고 본인 소개에 썼고요. 고통 속에서 자신이 왜 아파야 되는지 연구하다가 모든 고통은 멘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라고 저자 소개에 써져 있습니다. 책이 꽤 두껍습니다. 300페이지 조금 넘고요. 에세이치고는 약간 두께가 있는 편인데, 그만큼 저자가 어떻게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지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요. 저자가 스무 살 이후부터 계속해서 술을 마셨대요. 저자는 '동경하거나 좋아하는 대상 그리고 중독 물질, 동경이 치명적인 중독으로 연결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라고 회고를 하게 되고요. 섭식 장애뿐만 아니라 우울증 진단도 같이 받게 돼요. 저자가 스무 살에 자취를 시작하면서, 식이 장애가 시작되고 그것 때문에 상담을 갔더니 우울증이라고 진단을 받게 되고요. 그러면서도 약간 자만심 같은 게 들었대요. 나는 이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 나갈 수 있어, 라고 생각하고 치료나 상담을 몇 번 가다가 그만두게 됩니다. 그것이 아주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고요.
의사가 이야기를 해요. 술부터 끊어야 될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술을 줄이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알코올 의존증이다, 너는 알코올 중독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저자는 이 사실을 분노의 5단계로 받아들여요.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단계'를 통해서 내가 알코올 의존증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의 어떤 기점이 생기는데요. 저자가 아침에 해장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메시지가 떠올라요. '내 영혼은 이제 죽었다'라고 메시지가 뜨는 거예요. 그래서 엄청난 절망감에 휩싸이면서 계속 마십니다. 다음 날 또 마시는데 다시 그 메시지가 뜹니다.
'너의 영혼은 이제 완전히 죽었다.'
저자는 그때 선택합니다. 마시던 보드카를 들고 싱크대로 가서 다 붓습니다. 모든 술을 다 꺼내서 싱크대로 흘려 보냅니다. 이후로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의 일도 꽤 길게 나옵니다. 단주 후에 또 새로운 고난이 저자한테 닥치게 되고요. 제 생각에는 자기가 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 자기가 너무 힘들고 어딘가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자의 경우에는 알코올과 담배 같은 중독 물질을 향한 중독이었지만, 우리가 가진 중독이 그것 뿐만은 아니잖아요.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결과가 어떻게 보면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한자(황정은)의 선택
발레리 페랭 저 / 장소미 역 | 엘리
먼저 비올레트가 어떤 인물인지를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이름은 비올레트 투생. 결혼 전의 이름은 '비올레트 트레네'였고, 프랑스하고 벨기에 국경이 맞닿는 지역에서 부모를 모르는 채로 태어난 인물입니다. 비올레트는 어렸을 때부터 위탁 가정과 사회 복지사 가정을 떠돌며 자랐는데요. 항상 순종적인 건 아닌데, 남의 눈치를 보고 그의 요구에 맞춰서 사는 그런 태도가 익숙한 인물이고요. 열여덟 살 정도의 읽기 능력이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일 정도로 오랫동안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임신하면서 혼자서 읽기 학습을 하는데요. 미국 소설가 존 어빙이 쓴 소설을 교재 삼아서, 삶이 나에게 준 것과는 좀 다른 것들을 딸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자기가 글을 공부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딸에게 읽기를 가르치기도 하는데요. 비올레트가 현재 묘지지기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이 현재 시점에 딸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없습니다. 이 사정은 조금 뒤에 말하기로 하고요.
묘지를 열고 닫고 청소하고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일들이 묘지지기가 하는 일인데, 비올레트는 아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 일을 합니다. 묘지에 망자가 도착해서 장례식이 진행되면 비올레트는 그날의 상황을 노트에 반드시 기록을 하는데요. 날씨는 어땠는지 어떤 관계의 사람들이 참석을 했는지 그리고 고인을 기리는 추도사의 내용까지 노트에 기록을 합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소설 중반 이후에 밝혀져요.
비올레트가 시에 고용되어서 이 묘지로 들어온 것이 1997년입니다. 소설의 현재 시점이 얼추 2017년이니까 20여 년 전에 이 묘지로 들어왔고, 당시는 비올레트에게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뒤이기도 하거든요. 남편인 필리프 투생과 함께 묘지지기로 일을 하려고 왔는데 이듬해에 남편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19년째 행방이 불명한 상태예요. 그리고 딸인 레오니는 1993년에 화재로 죽어서, 이 부부가 묘지지기로 들어왔을 당시에는 이미 사망하고 없는 상태입니다.
이 소설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하거든요. 그런데 누구도 부족하지 않고 꽉 찬 입체감으로 나름 저마다의 생을 살고 있어요. 삶이 대단히 복잡하다는 점을 생생한 인물들을 통해서 대단히 잘 그려낸 소설이에요. 제목 그대로 비올레트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지만 이 책에는 비올레트의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에요.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면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고도 생생하게 소개가 되고요.
소설 속에 (필리프 투생 외에) 남성이 등장하는데, 상황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묘지지기의 집 문을 두들기는데요.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 묘지에 묻힌 어떤 남자의 묘에 같이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유언을 가지고 비올레트를 방문한 사람의 이름은 '쥘리앵 쇨'입니다. 직업이 경찰입니다. 이 사람의 등장이 비올레트의 남은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되기도 하는데요. 쥘리앵은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유언 때문에 묘지를 방문했다가 독특한 묘지 관리자 비올레트를 더 알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마을을 드나들면서 묘지를 계속 찾아오고, 그러면서 비올레트의 남편이 실종 중이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는 거죠. 쥘리앵은 비올레트의 남편인 필리프 투생의 행적을 추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비올레트를 찾아와서 필리프 투생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장르를 잘 짐작할 수가 없죠. 로맨스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추리도 있고 온갖 것이 다 담겨 있고요. 이 책의 대단한 장점이기도 한데, 진부한 면이 없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이 소설이 좋았어요. 뒤표지에 박연준 시인의 추천사도 실려 있거든요. '어떤 이야기는 길어서 행복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이 되는데, 저도 그랬어요. 이 이야기가 길어서 너무나 좋았고, 이 소설이 어떤 순간으로 끝이 나는데 그렇게 끝나서 좋았고요. 그렇지만 이 소설이 끝나서 싫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삶을 어떻게든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또 사랑하고야 많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써낸 소설 중에 어떤 좋은 소설은 그걸 나눠 받을 수가 있거든요.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저도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눠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결말로 갈수록 대단히 분명해지는데, 삶에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클리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메시지인데, 이 소설은 한 톨의 진부함이 없이 삶에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메시지에 다다릅니다. 연말이기도 하고, 요즘 마음이 어렵고 힘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그냥의 선택
김사과, 김엄지, 김이설, 박민정, 박솔뫼 저 외 18명 | 작가정신
출판사 작가정신이 창립 35주년을 맞아서 23명의 소설가들에게 '소설에 대한 에세이'를 받아서 엮은 책입니다. 서로 다른 작가의 스타일대로 소재도 문체도 분위기도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어요. 소설을 쓸 때 잘 써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 소설의 주제나 작법, 소설이 안 써지는 시간에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김이설 작가님이 하루에 6시간 동안 글을 쓰신대요. 이 루틴을 갖기까지 15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소설을 쓰면서 살림을 하시다 보니까,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이 루틴이 생길 수 있었던 거예요. 고정적으로 일을 하면서 생겨난 변화 중 하나가 마감을 정말 잘 지키게 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김이설 작가님은 꼬박꼬박 무언가를 하는 것에는 분명히 힘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이 책의 제목은 오한기 소설가의 글에서 따온 건데요. 실려 있는 동명의 에세이를 보면, 오한기 소설가는 육아를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쓰기를 병행하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글을 암살자처럼 쓴다고 이야기해요. 틈을 보다가 찰나의 순간에 과감하게 칼날을 휘두르는 암살자처럼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짬이 나면 빠르게 쓰는 거죠. 그렇게 지내다가 한 선배로부터 "내가 스마트 스토어를 운영하면서 월 3억 원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돼요. 매출이 3억 원 정도 되고 순이익이 20%라서 월 6천만 원 정도를 버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오한기 작가가 나도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스마트 스토어를 해야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마트 스토어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과정이 조금 의미 없게 느껴진 거예요. 그래서 그만둡니다. 그러고 나서 스마트 스토어에서 자신을 판매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요. 스마트 스토어를 준비할 때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지만, 소설을 쓸 때는 손가락이 춤을 추는 것처럼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나는 3억 대신 소설을 택한 셈이다. 그런데 내가 소설을 썼을 때 이익은 얼마일까? 순수하게 나에게 남는 건 뭘까? 과연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최진영 작가님은 '인정과 단념'에 대해 말하는데요. 내가 쓴 문장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미완성인 걸 알면서도, 인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단념해야 된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걸 계속 고칠 수 없고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죠. 어떤 때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썼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는 다소 허무한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럴 때도 인정하고 단념하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과정이 어떤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최진영 작가님은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쓰는 동안 나를 유심히 들여다봤고, 타인의 삶을 상상해봤고, 어떤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봤기 때문에, 나는 이전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작가님은 "소설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소설은 나를 삶의 방향으로 끌어당깁니다. 소설은 나를 형편없음의 늪에서 건져냅니다. 소설을 쓰고 읽으면서 나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습니다. 계속하여, 꿈을 꿀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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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