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언어가 될 때』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책이다.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연대와 공존이라는 가치를 실천해나가기 위해 애쓰는 분투의 기록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페미니즘과 마르크시즘이라는 두 가지 주요 가치를 토대로 나로부터 세상으로 시선을 확장해가며 계급, 여성, 자본, 시간, 소비 등의 주제를 하나씩 교차시키며 사유해나간다. 저자는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면, 그런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면 질문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치열하게 묻고 치열하게 답하고자 노력해온 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우선 작가님이 어떤 분인지 소개해주세요.
저는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노동을 연구하는 이소진입니다. 석사 논문을 고쳐 쓴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이라는 단행본을 낸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에세이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지만, 최근에는 지난 2년간 연구해왔던 청년 여성의 자살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험이 언어가 될 때』라는 제목이 인상 깊어요. 책 제목은 어떻게 정하게 되셨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 경험을 바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어떤 경험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행해진 성폭력에 대해서 피해자들이 바로 자신의 경험을 폭력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것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맺어온 관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험이 바로 언어가 되는 순간을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경험이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경험을 해석하기 위한 사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로부터 시작해 타자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 경험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 언어로, 우리는 타인을 설득할 수 있죠. 그래서 경험이 바로 자신의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님을,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며 되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나부터 바뀌는 페미니즘을 말씀하고 계신데,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나를 분노케 하는 수많은 상황과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하게 돼요.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또 상대를 어떻게 설득해나갈 수 있을까요?
저도 분노합니다. 하지만 저는 분노할 때, 이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조언을 구하면서 내가 단순히 나의 감정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당연히 분노할 수 있는 것인지, 그냥 한번쯤은 이해하고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인지 되돌아봅니다. 만약, 정당한 분노라고 여겨질 때는 한 템포 쉬고,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감내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합리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만약 내가 문제 제기를 하기로 결심했다면 주위의 도움을 얻어 다양한 상황에서의 전략을 세웁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바로 표출될 수 없는 분노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특히, 직장과 같은 경우에는 상사나 회사를 향한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거든요. 지금 당장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상대방과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나보다 위계가 낮은 사람, 혹은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당한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겠죠. 저는 이 또한 분노를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한 운동 또한 함께 진행되어야 하겠지만요.
그리고 설득이 꼭 적을 대상으로 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제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설득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제 생각에 누군가를 소외하거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무심코 할 때,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충분히 상대방의 말을 듣고, 저의 의견을 밝히면서 토론을 통해 조정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 이 사회에서 홀로 고고하게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연구자로서 사람들을 글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도 언급했듯, 쉽지만 어렵게 어렵지만 쉽게 쓰는 것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소한 일들에서 소재를 찾아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아요. 원래 관찰력이 뛰어나셨나요? 최근에 가장 눈길을 끌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좀 예민한 경향이 있어서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관찰력이 좋아진 걸까요? 저는 사실 제가 관찰력이 좋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예민한 순간을 그저 지나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들은 관찰력이 좋아질 수 있어요.
최근에는 차를 몰게 되면서 많은 것들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강아지, 부모님과 함께 포천에서 캠핑을 했었는데, 제가 차를 몰고 가는 그 길에 7마리의 고양이 사체를 보았습니다. 정말 그날은 너무나 충격이 심해서 운전하는 것이 정말 싫었어요. 운전을 한다는 것이 폭력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가 운전자가 되어 차에 치여 생을 마감한 고양이들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더라고요. 그날 다시 한번 인간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죽이고 있는지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이 공포로 다가옵니다. 차도에 버려진 검정색 쓰레기봉투만 봐도 가슴이 휘청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운전을 하지 않을 수는 없거든요. 하지만 또 그저 지나치기에는 너무 죄책감이 들어서 그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날 이후로 길을 지나가다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볼 때는 동물 단체에 1마리당 1만원의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날은 7만원의 기부를 했어요. 사실 봉사 활동을 하는 일이 제일 좋은 일이지만, 봉사활동에 시간을 쓰기는 어려워서 돈으로 대신했지만 나중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되면 기부와 더불어 자원 봉사를 통해 죄책감을 씻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작인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에서 노동 시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셨고, 이 책 『경험이 언어가 될 때』에서도 자본주의와 시간에 대한 분석이 예리합니다, 그런 만큼 최근 한국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흐름을 보고 생각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지금 현 정부의 노동 시간 정책은 노동 시간 계좌제가 핵심으로 자리하는데요. 사실 독일의 정책을 그대로 한국으로 가져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노동 시간이 짧은 국가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국가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독일과 한국의 노동 시간의 길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또한, 독일의 경우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정책적 차이가 상당한데, 이는 정부의 노동 시간 정책 자체가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호하기보다는 경제계의 요구에 기반해 있기 때문입니다.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노동 시간의 규제를 풀어 노동 시간을 회사 마음대로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 체제 자체를 우선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정부가 그렇게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저출산 문제도 해결될 수 있겠죠.
아빠와 엄마의 삶을 비교하여 성별과 계급의 문제를 분석한 부분이 매우 인상 깊었어요. 책을 보신 부모님 반응도 궁금합니다.
아마도 아빠는 읽지 않으신 것 같고요. 엄마는 읽으셨는데, 자신에 대한 해명이 나와 있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지난 책은 중년 여성의 시간에 관한 책이어서, 가족 배경에 대한 설명보다는 엄마의 노동 생애를 서술했다 보니 아무래도 주변에서 엄마를 '어렵고 힘들게 산 사람'으로 타자화를 했었거든요. 이번 책에서는 남성의 계급과 여성의 계급을 교차 서술한 것이 만족스러우셨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나이가 든다면 『랭스로 되돌아가다』 같은 책을 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경험이 언어가 될 때』에서 가장 주요하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저는 페미니스트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페미니스트가 된 것이죠. 페미니즘을 알기 전,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반페미적 행동을 했을 거예요. 저는 사실 페미니스트가 되고 나서도, 그런 일들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내가 언젠가 그랬듯, 그 사람들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가 불편함을 설명했을 때 그들이 그 불편함을 이해하는지 받아들이는지 한번쯤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불편한 점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우리가 내 안에 갇혀 나의 시각에서만 상대를 바라본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미안한 것은 미안하다, 고마운 것은 고맙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외롭지 않게 우리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저는 우리가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내부에서 사회 변혁을 찾을 때, 에세이에서도 이미 설명했듯, 우리는 또 다른 여성을 또 다른 이유로 소외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번 책에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두 가지를 교차하면서, 저의 경험을 해석해보고 싶었습니다. 요즘은 소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저 또한 완전히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때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긴 하지만, 그럼에도 소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여러 가치들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들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다독이면서 우리의 길을 외롭지 않게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소진 블루칼라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학과 공부보다는 중앙동아리 '맑스철학연구회'와 학생운동모임 '달려라진보'에서 학생운동에 전념하다 간신히 졸업했다. 졸업 직전 학과 내 성폭력 사건 해결에 나선 것을 계기로 여성의 삶, 그리고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을 이해하는 언어로서 여성학을 연구하게 됐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마트 캐셔직을 비롯한 블루칼라 여성 노동과 중년 여성 노동자, 청년 여성 등 기존 노동 연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며 노동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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