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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한 일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름만 호텔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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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나도 한 번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시길. 영화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제목에 호텔이 들어가다 보니, 그간 묵었던 특이한 숙소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항상, 이런 식이잖아요).

간혹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제목의 노래나 소설이 있다. 앨범 재킷이나 책의 표지디자인에는 이러한 경우가 빈번한데, 당연히 그 제목이나 비주얼이 풍기는 이미지만 빌려오는 경우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디에도 ‘부다페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상의 국가가 등장하고, 가상의 전쟁의 벌어지고, 가상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결국, 감독은 제목에 ‘부다페스트’를 차용함으로써, 자신이 구축해놓은 가상공간이 헝가리의 고즈넉한 도시와 비슷하다고 상상해주길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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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제외한 모든 설정이 가상의 설정에 기반을 둔 이 영화는 이렇듯 판타지이면서도, 동시에 특정 공간을 연상시키는 ‘현실적인 판타지’의 매력을 풍긴다. 그 외에도 이 영화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색감이나 대칭구도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언급할 때 가장 흔히 회자되므로, 서사기법과 구성에 관해서만 이야기 해보자.

 

우선, 이 영화는 소설이나 옛날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챕터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당연히 이야기는 종으로 진행되지만, 챕터가 바뀌면 횡으로 팽창하기도 한다. 결론부에 도달해서는, 종으로 진행된 이야기와 횡으로 팽창된 이야기가 만난다. 또한 중요한 대사는 다양한 상황에서 변주되며 반복되어 자신의 매력을 서서히 점층 시킨다. 또한, 영화 초반에 벨 보이가 호텔 매니저에게 “당신도, 벨 보이를 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을 던지는데, 사실상 이 질문은 관객에게 던져진 것과 같다. 우리는 나름대로 각자 그 답을 상상할 테니 말이다. 여하튼, 이 질문에 대한 답과 핵심 사건, 즉 살인 사건에 대한 전말은 영화의 결말에서야 해소된다. 긴장감을 이끌어가는 전통적이고 확실한 서사장치다.

 

동시에 이 이야기의 모든 과정을 다른 화자의 입을 통해 구술되는데, 일찍이 그 매력은 ‘천일야화’가 등장한 이후부터 빛을 발해왔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 빛에 밝기를 자신의 몫만큼 보태었다. 여하튼, 나도 한 번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시길. 영화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제목에 호텔이 들어가다 보니, 그간 묵었던 특이한 숙소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항상, 이런 식이잖아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jpg



나는 예전에 국제구호기구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아프리카나 서남아시아 같은 지역에 종종 출장을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름만 호텔’인 숙소에 묵곤 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여관이나 여인숙 수준일지라도, 항상 ‘호텔’이란 간판이 버젓하게 걸려 있다. 시설이 여관이나 여인숙 수준이니, 서비스 역시 호텔 수준일 리 만무하다. 한 번은 인도의 마이소르란 지역에 출장을 갔다가, 그 이름도 그 도시의 대표성을 획득한 ‘마이소르 호텔’에 묵었다(공교롭게도 이런, 숙박업소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TV가 나오지 않아서 프런트에 전화를 거니, 기술자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두 어 시간 기다린 후에 방에 올라온 이는 다름 아닌 몹시 앳된 얼굴의 소년. 이 ‘숙련된 기술자’는 TV를 오래 노려보더니, 손으로 리모컨을 힘껏 쳤다. 그리고 리모컨을 칠 때마다, 힌두어로 같은 말을 힘주어 반복했다. 힌두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것이 주문인지, ‘아, 이거 곤란한데’와 같은 중얼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한데 TV는 마치 소년의 중얼거림을 들었다는 듯이 ‘아, 쉴 틈을 안 준다니까’라고 반응하는 것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멀쩡히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돌아온 화면에서는 ‘아, 이제 나도 시작해야 하나’ 하는 느낌으로 수염이 발까지 닿는 앙상한 노인이 못이 박힌 침대 위에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 그 생경하고 어리둥절한 분위기 아래, 나는 그 소년에게 “고맙다”고 악수를 건넸다. 소년은 ‘뭐, 이쯤이야’라는 표정으로 내 악수를 받으며 답했다. 
 

“유어 웰 컴, 서(You're Welcome, Sir).” 
 

그러더니 소년은 내게 “당신이 신고 있는 게 무엇이냐?”고 영어로 물었다. 내가 ‘실내용 슬리퍼’라고 답하자, 소년은 어째서 실내에서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거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린 그걸 밖에서 신는다”며 말했다. 그때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년은 맨발이었다. 밖에서도 맨발로 다녔는지, 그 발은 매우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 괜찮다면…”하며 망설이듯 물었는데, 소년은 잽싸게 “물론이죠!"하며 내 슬리퍼를 건네받아 제 자리에서 신었다. 그러더니, 불과 5분 전에 내게 ‘선생님(Sir)’이라 하던 소년은 “이제, 우린 친구다”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나는 ‘인도란, 정말 생동감 있는 나라구나’ 하고 느꼈다. 물론, 그 소년이 인도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후로도 몇 군데 출장을 다녀왔고, 에티오피아에 갈 때쯤엔 당연하다는 듯이 이름만 ‘호텔’인 곳에서 묵었다. 당시 나의 업무는 오지에서의 취재였기에, 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을 마친 후 오랜 시간 차를 타고 가까스로 숙소로 돌아왔다. ‘이야, 드디어 휴식이다!’하며 씻으려 하니 샤워기는 눈물처럼 두 방울을 떨어뜨리더니, 제 몸을 완전히 잠가버렸다. 다음날 아침에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호텔 전체에서 구할 수 있는 물이라고는 오직,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500ml짜리 생수가 전부였다. 그러자 현지 직원이 물을 구해오겠다고 차를 몰고 어딘가로 떠났고, 그는 약 40분 뒤에 빨간 양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 빨간 양동이 안에는 어느 강가에서 떠왔는지 누런 흙탕물이 가득했고, 수면에는 풀잎까지 떠 있었다. 나는 어느덧 익숙해진 대사, 즉 “고맙다”를 인도에서처럼 전달했고, 고양이 세수를 마친 후 그날의 취재를 나서다,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뻔뻔하게도 ‘호텔’이란 간판이 변함없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이 친구들 역시 호방하군’ 하고 생각했다.

 

사실, 이름만 호텔일지라도, 그런 건 상관없다. 이름뿐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도 호텔에 투숙해본 경험도 쌓고, 무엇보다도 시간의 강이 한 참 흐른 뒤에 보면, 결국은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생경한 일탈을 한 셈이니 말이다(그래도, 다시 가고 싶진 않다. 정말이다).


 

[관련 기사]

-나쁜 남자의 생존 성장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살아간다는 것 <노예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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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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