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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마지막회] 어떤 남자도 한때는 소년이고 아직도 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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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얼토당토않게도, 소년이라면 그래도 내가 좀 안다고 내심 자부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엘에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를 보았다. 장거리 비행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가 열한 시간의 비행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이 영화 덕분이다. 앞의 세 시간은 영화를 보았고, 나머지 시간들은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소년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우습게도 나는 그동안, 얼토당토않게도, 소년이라면 그래도 내가 좀 안다고 내심 자부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칼럼의 첫 회도 <어바웃 어 보이>에 대해 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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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이에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살고 있었다. 대기업 해외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외국 여기저기에서 사는 그녀를 이제 자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소녀일 때에 처음 만났다. 그녀에게는 십대의 두 아이들이 있다. 캘리포니아 출장 중에 하루를 친구네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일 년 만에 만나는 그 애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초등학생인 여자아이의 선물은 쉽게 결정했다. 대형서점의 팬시 코너에 가서 내 눈에 예쁘고 귀여운 디자인의 노트와 일기장 같은 걸 잔뜩 골랐던 것. 문제는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부터 자주 보아왔는데, 친조카가 없는 내게 조카 같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 해준 소년인데, 십대 중반이 된 그가 좋아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나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 애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너무도 쿨하게 ‘나도 몰라. 그냥 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에게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더니 한참 후 ‘풍선껌이래’라는 답이 왔다.


풍선껌? 혀끝을 내밀어 바람을 부풀렸다 꺼트렸다 다시 부풀리곤 하는, 그것?


풍선껌 열 개를 비닐봉지에 둘둘 싸서 트렁크에 넣었다. 소년을 위한 풍선껌을 싣고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보이후드>를 보게 된 건 어떤 이름의 우연일까.

 

<보이후드>는 당연히, 소년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은 메이슨이라는 이름의 소년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그는 여섯 살 쯤의 유치원생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는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며칠씩 촬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어린 소년에 대해 이야기 위해서는 또 다른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23세의 대학생이던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어느 날 여자는 임신을 했다. 둘은 결혼을 했고 많은 계획이 어그러졌다. 똑똑하고 지적인, 미래에 대한 반짝이는 꿈이 있었을 여자는 그것들을 포기했다. 남자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꿈을 접었을 테지만 여자가 보기엔 마뜩치 않았다. 곧 아이가 태어났다. 소년의 누나였다. 두 살 차이로 곧 남자아이가 하나 더 태어난다. 남자와 여자는 두 번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건 아마도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쪽으로 가 버렸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이었을 거다.


메이슨의 젊은 부모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임신으로 학업을 중단한 여자는 어떻게든 가정을 유지해보려 하지만 때때로 지쳐가는 모습을 보이고, 남자는 아직 드넓은 바깥세상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는 떠나고, 소년의 유년기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지나간다. 아이의 환상 속에서 아버지는 북극곰을 만나는 용감한 모험의 존재이지만, 현실에서 다시 나타난 그는 방황을 멈추지 못하는 백수 건달에 가깝다. 현실 안에서 두 아이를 먹여 살리는 건 어머니다. 소년의 시간은 서서히 흐른다. 어머니에게 지워진 짐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미안해하는 동시에 아버지를 동경하고 연민하면서. 소년은 남자의 아들이기도 여자의 아들이기도 한 것이다. 12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어린 소년은 천천히 나이 든 소년이 되어 간다.


메이슨의 열아홉 살 이후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 나이가 지나가면 소년이 더 이상 소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어떤 남자도 한때는 소년이고 아직도 소년이라는 것. 소녀였던 여자로서 나는 그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곤 한다. 내가 소년에 대해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고백하는 건 결국 남자에 대해 잘 모른다는 고백과도 같다. <남자남자남자>라는 제목으로 쓰는 어떤 글도 영원히 미완성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엘에이의 마지막 날, 친구 가족을 만났다. 여자아이는 내가 골라간 귀여운 일러스트의 학용품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소년은 풍선껌을 받아들고는 씩 짧게 웃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뺨에 여드름 몇 개가 송송 돋아 있었다. 제 아빠와 키가 똑같아진, 제 엄마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소년과 마주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소년이 갓난아기였던 때가 자꾸 떠올라 나는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헤어지면서 아이들에게 한 번만 안아보자고 말했다. 소녀는 다감하게 내 등을 꼭 안아주었다. 소년의 포옹은 뻣뻣하고 조금은 쑥스러웠다. 소년의 엄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딱 이 소년의 나이였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나도 모르게 “엄마 잘 부탁해”라고 말했다. 어떤 시대가 이런 방식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새로 오고 있음을 알았다. 소년이 풍선껌을 훅 불었다 터뜨리는 그 순간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지금까지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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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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