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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모두는 ‘쿠퍼’- <인터스텔라>

상대적으로 흘러가는 인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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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어떤 지점을 통과하는 지에 따라 시간은 더디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한다. 동시에, 어떤 곳에서 지내는지에 따라 온전히 가기도 하고, 정신없이, 또는 지겹게 가기도 하는 것이다.

살면서 점점 억울해 지는 게 하나 있다. 갈수록 하루가 짧아진다. 물론, 하루는 언제나 24 시간이다. 이 동등한 24시간이 어릴 때는 길게 느껴졌고, 삼십대의 끝자락에 이른 지금에는 반나절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오늘은 뭐가 마감이었더라’하고 일정을 살펴본 뒤, 그 원고를 쓰고 나면 하루가 끝나버린다. 게다가 나는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암울한 독일 땅에 와 있다. 이유인 즉, 겨울인지라 이곳의 해는 짧다. 고로, 하루의 대부분이 어두워, 낮의 절반을 도둑 맞은 느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날을 계속 반복하다보니, 인생의 일부가 사라진 기분이다. ‘신이시여! 만인은 자연 앞에 평등한데, 독일에 있든 남미에 있든 동등하게 해를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항변해봤자, 소용없다. 
 
이처럼 시간은 시계 속에만 절대적이고, 삶 속에선 상대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1년이란 시간은 고3 수험생에게 십년(혹은 영겁의 세월)처럼 길고, 대학 새내기에겐 한 달(혹은 한 주)처럼 짧을 수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이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말한다. 블랙홀을 통과해서 도달하는 ‘밀러 행성’에서의 1 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과 같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라고 항변하고 싶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나 상대성 이론을 구축한 아인슈타인에게 따지시길(간단히 말해, 내 탓 아님). 
 

인터스텔라.jpg


<인터스텔라>는 결국 이 모든 상대성 앞에서도 절대적인 건 사랑 밖에 없다, 는 실로 자명한 메시지를 태연하게 전한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니까’ 하고 넘겨 버리면 그만이다. 언제 그들이 겸양의 미덕을 알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보다, 암흑 세계인 독일에서의 하루가 짧고, 변화에 둔감해져가며 늙어가는 성년 이후의 시간들이 짧게 느껴지는 건, 달리 말해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밀러 행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이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지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듯이, 사실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등지고 새 둥지를 찾아 떠나야 하는 게 바로 현대인의 삶이다(영화에서도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인터스텔라>는 다분히 할리우드 적인 할리우드 영화이기에 미국이 살만한 곳이 못 되면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가정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59억 인구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만약 내 고향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면, 혹은 내가 태어난 나라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면, 혹은 내가 태어나서 살아왔던 곳의 사람들 생각과 행동 양식이 점점 양심과 상식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영화에서는 손에 잡히는 흙먼지로 인해 척박한 환경이 되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척박한 환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관점으로 <인터스텔라>를 보았다. 
 
이러한 나의 가정을 영화의 중반부 이후에도 적용시켜보면, 결국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쿠퍼(Cooper; 그의 이름은 노골적이게도 ‘협조적인’을 뜻하는 ‘Cooperative'에서 온 듯하다. 영화에서 마이클 케인이 쿠퍼를 첫대면했을 때, “이봐. 협조적으로 굴라구”라고 대사를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쿠퍼)는 미국인으로 대표되는 전인류가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다. 이를 지구에 한정하여 적용해보자면, 이민자(혹은 고향을 떠난 모든 유목민)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보낸 한 시간은 고향 땅에서의 7년에 버금간다. 그만큼 고향을 떠난 자의 시간은 빨리 (혹은 더디게) 간다. 낯선 곳에 대한 적응과 이해,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은 절대적인 개념의 시간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우여 곡절 끝에 나름의 ‘해답’을 찾고, 고향에 돌아 왔을 때 그곳에서는 많은 시간이 흘렀(거나, 나만 많이 변해 있)을 수 있다. 때론, 많은 것들이 변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늙어 있고, 혹은 누군가가 죽어 있기도 하다. (반대로,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변해 외로워지기도 한다.) 
 
생의 어떤 지점을 통과하는 지에 따라 시간은 더디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한다. 동시에, 어떤 곳에서 지내는지에 따라 온전히 가기도 하고, 정신없이, 또는 지겹게 가기도 하는 것이다. 굳이 블랙홀을 통과하지 않더라도, 우리 생의 블랙홀은 도처에 있어서 그곳을 통과하는 순간, 시간이 물리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그 블랙홀은 우리가 겪어왔던 이별이기도, 누군가의 죽음이기도, 연애의 순간이기도, 때론 출산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속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플랜 A와 플랜 B가 실은 그다지 정교하지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삶을 진지하게 살아본 이라면 인생에서의 계획 역시 그다지 유효하지도, 실현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겪어봤을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렇다해서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블랙홀 같은 기쁨과 슬픔의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다. 슬프지만, 그것이 우리 앞에 높인 삶이라는 우주니까. 그리고 더 명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존재는 바로 다름아닌 ‘시간’이니까. 그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가니까.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것이 바로 지구라는 이 자연 조건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의 과제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어쩌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인터스텔라>의 ‘쿠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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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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