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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서 그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모든 괴롭힘이 ‘호감의 표현’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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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며 거절에도 아랑곳 않는 것은 용기나 순정으로 둔갑한다. 사람은 나무가 아니고, 사랑은 도끼로 탕탕 찍어 넘겨 함락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스무 살 때 살던 집의 맞은편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툭하면 애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술을 마시고 찾아와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들겼고, 여자는 버티다가 문을 열었다. 닫히는 순간 우는 소리가 들린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경비실에 인터폰을 넣어서 여자가 위험한 것 같으니 좀 가보라고 했다. 경비 아저씨는 그 집의 벨을 누른 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아 ***호에서 민원이 들어왔어요! 너무 시끄럽다고!” 그날 밤 나는, 분노한 그 남자가 우리 집에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것이 내가 목격한 최초의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비 아저씨가 그것을 ‘층간 소음에 대한 민원’으로 받아들인 이유 역시, 가정이나 연애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사적인 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최근 조선대 의대생의 데이트 폭력 사건 등이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으며 비로소 이를 폭력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PD수첩>은 1067회 <데이트 폭력-괴물이 된 남자들>에서 살해, 성폭력, 폭력, 염산 테러 등이 자행되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 사례를 다루었다. 한편 경남 김해에서는 40대 남성에게 6개월간 스토킹에 시달린 20대 여성이 해당 남성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하여 “살해당하기 전에 살해한 것”이라는 반응이 많은 것은 그만큼 ‘치정 싸움’이라는 모호한 말 속에 은폐되어온 이런 식의 폭력이 그만큼 빈번한 까닭이다.


그러나 살인사건의 피해자조차 ‘트렁크녀’, ‘가방녀’ 등의 ‘~녀’로 범주화하는 언론에서 이 남성에게 붙인 이름은 ‘구애남’이었다. 구애. 우연히 한 번 본 것을 계기로 20살이나 차이가 나는 여성에게 6개월간 스토킹을 일삼은 남성의 행위에 붙이기에 너무나 낭만적이고 부적절하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사회가 로맨스에 부여해온 면죄부 중 하나이다. 사랑은 딸기우유의 농축 과즙 같다. 단 몇 퍼센트만으로 함유되어도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모든 것을 핑크빛과 딸기우유 향으로 뒤덮어버린다. 나는 꾸준히 데이트 폭력 문제에 천착해왔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데이트 폭력’에 끼워주지 않지만, 명백한 피해나 불쾌를 생산하는 좀 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주제이다. ‘구애’ 혹은 호감 표시. 한동안 ‘그린 라이트’라고도 불렸던, 그러나 너무나 쉽게 사소한 폭력으로 번지는 감정 표현 방식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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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이빈, <안녕? 자두야!>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유치원 무렵부터 그런 일을 당한다.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물건을 망가뜨리는 장난, 치마를 들어 올리는 ‘아이스께끼’, 좀 더 자라서 브래지어를 착용하게 되면 끈을 잡아당기고 달아난다. 그것은 명백히 괴롭힘이나 성희롱, 성추행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틀에 찍어낸 듯 똑같다. “걔가 널 좋아해서 그래.” 괴롭힘을 막아주는 대신 ‘그것은 괴롭힘이 아니라 호감의 표현’이라고 주입한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괴롭힘을 견디도록 훈육 된다.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전개이다. 좋아하면 관심을 끌려고 괴롭힐 수 있지만, 모든 괴롭힘이 ‘호감의 표현’일 수는 없다. 또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동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폭력이거나 성희롱이라면 그것은 문제이며, 왜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후배 아나운서에게 호감이 있어 선배의 지위를 이용하여 혼이 쏙 빠질 만큼 야단을 쳤다는 무용담이 대단한 연애의 기술인양 전파를 타는 세상, 이렇게 괴롭힘의 탈을 쓴 구애, 혹은 구애의 탈을 쓴 괴롭힘은 초등학교 시절에 끝나지 않는다. 각종 로맨스 스토리에서, 여자 주인공에게 9번 막말하고 1번 잘해주는 남자 주인공은 ‘츤데레’라는 이름으로 혹은 ‘까칠한 매력’으로 포장되어 왔다.  


‘후려치기’라는 말이 있다. 욕망하는 대상을 폄하하고, 끌어내려 값을 낮춘 뒤 취하려는 전략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외로 자주 구애의 전략으로 쓰인다. “너 같이 성질 더러운 애를 누가 만나느냐”, “넌 네가 예쁜 줄 아느냐, 진짜 별로다”, “그래도 좀 꾸미면 봐줄 만하다.” 개인의 자존감이나 자신감을 눈 뜨고 못 보는 우리 사회에서, 특히 여성이 자신의 외모나 조건에 만족하면 끝없이 더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에서 웬만한 ‘강철 멘탈’이 아니면 이러한 후려치기는 견디기 힘들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폭력에 해당하지만, 그다음 단계는 ‘그런 너를 사랑해줄 유일한 나’로 자신의 역할을 정한 사람의 구애이다. <서동요> 역시 이러한 경우다.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자와 놀아나는 ‘문란한’ 여자라는 소문을 퍼뜨려 공주라는 공적인 위치와 사회적 평판을 박탈하고, 의지할 곳 없어진 여자의 보호자를 자처하여 마음을 사는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서동의 ‘꾀’를 보여주는 일화로 소비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서동의 복제인간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자신이 그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퍼뜨려(당사자가 겪을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이) 먼저 ‘찜’했다고 여긴다. 당한 사람은 분통이 터지지만, 이것은 법의 성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데다 대부분 ‘염문’ 정도로 여겨진다.


로빈 월쇼의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는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을 주제로 한 책이다. 강간은 어둑한 골목에서, 문란한 옷차림의 여성이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압도적 이미지지만 실제로는 아는 사이에서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일어난다. 특히 로빈 월쇼의 지적처럼 연애 관계나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조차 자신이 당한 것이 성폭력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범죄는 자주 구애의 탈을 쓰고 발생하며, 심지어 범죄를 심판하는 법원에서조차 이것을 구애 행위로 이해하여 감형하거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결혼을 권유한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에서 주목할 점은, 대부분의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호감의 표시’, 혹은 약간 거친 형식의 구애로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강간 이후 피해자의 옷을 입혀주거나, ‘밤길은 위험하다’며 차로 데려다주거나, ‘연락하겠다’며 키스하거나, 사건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오는 행위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굳이 책의 사례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런 일은 일상적이다. 아 갑자기 주마등처럼 막 지나가네. 멋대로 손을 포개놓고 뿌리쳤더니 ‘네가 그렇게 잘났냐’고 따지던 사람이나, 벽 쪽에 앉은 내가 나갈 수 없게 몰아붙여 놓고 고백하던 사람이나.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그리는 기습 키스나, 거절하는 여주인공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우는 남주인공의 모습 등은, 현실이라면 공포 그 자체다.


구애의 무서운 점은, 받는 대상의 의지나 감정은 사라지고, 구애하는 주체만 부각된다는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며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용기나 순정으로 둔갑한다. 사람은 나무가 아니고, 사랑은 도끼로 탕탕 찍어 넘겨 함락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제 3번 거절했는데도 구애하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수 있다지만, 스토킹 범죄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처벌이 가벼운 상황에서 별 의미는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예쁜 여자가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갖고 편하게 살 거로 생각하지만, 구애의 방식이 비뚤어져 있는 현실에서 인기는 오히려 자신이 자루를 잡을 수 없는 칼이다. 인기 많은 여자의 대부분은 원치 않는 이로부터 구애인 듯 구애 아닌 구애 같은 곤란한 일을 겪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거절한’ 냉혈한으로 비난받은 경험이 있었다.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를 만들면서 ‘연애’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모두가 좋은 거라고 들이미는 연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의 상식에서, 연애는 서로 좋아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행동을 호감의 표시랍시고 하거나 도저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거로 생각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이 연애의 장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제대로 대우하고, 내 눈에 예쁜 사람을 정성껏 예뻐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올바른 호감 표현이나 연애 대상이 아닌 이성에게도 갖추어야 할 예의, 적절한 방식의 구애는 한참 부족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까칠’한 남자를 콘텐츠로 소비하거나 선호하지 않는다. 까칠한 것은 성격일 수 있지만 호감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면서 제 기분 내키는 대로 대하는 것은 구애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신이 호감을 갖고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용납되며 상대가 그 마음을 헤아려줘야 한다는 사고는 데이트 폭력의 씨앗이다. 상대가 내 뜻을 거스르는 순간 언제든 씨-발아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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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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