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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못한 계기

인생의 진로를 바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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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열망이나 소명의식 하나 없이 건강하지 못한 몸이 불러온 ‘차선책’ 혹은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자격미달이거나 뿌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글에게 황송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게 또 나인 걸 어떡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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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 때부터 갑상선암 환자다. 지금까지 5번의 외과수술을 받고 가장 마지막으로 수술을받은 것이 일년 전이다. 그 후로 반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간다. 반년 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암세포가 남아있다고 해서 핵의학과에서 방사능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어제 또 반년 만에 정기검진 결과를 들으러 대학병원에 다녀왔다. ‘수치는 예전에 비해 떨어졌는데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다’라고 주치의는 말했다. 해석하자면 현재 영상의학적으로는 갑상선암의 모습이 안 잡히지만 혈액검사결과 몸 어딘가에 아직도 갑상선암의 ‘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언제라도 다시 커져서 또 외과적 적출수술을 받아야 할 가능성을 준다. 여태까지 한국에서 갑상선암 외과수술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7번이라고 한다. 이제 5번을 기록한 내게 주치의가 “임경선님도 만만치 않게 수술하셨죠.” 라며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과를 듣고 온 어제는 분노와 우울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그래도 어김없이 다음날 아침이면 작업하는 카페에 나와 노트북 컴퓨터를 열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주어진 인생.  

 

돌이켜보면 이 지병으로 내 인생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 암수술을 연이어 받게 되어 심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당시 다니던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에서의 학업을 도중에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전까지 취업은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고 그저 계속 공부해서 학자와 교수가 될 거라고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뜻밖의 복병으로 인생의 진로는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반년 간의 요양기간을 거쳐 취직을 해서 회사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후, 결혼을 하고 나서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던 신혼시절, 세 번째 갑상선암 재발수술을 받게 되었다. 외과적 적출을 한 후에는 반드시 방사능치료와 병행을 해야 해서 한동안 임신을 할 수가 없었다. 29살 때 결혼을 했는데 첫 아이는 몸이 잠시 청정상태였던 한참 후인 36살에야 가질 수 있었다. 

 

네 번째 갑상선암 수술은 인생의 진로를 또 한 번 크게 바꾸었다. 당시 나는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12년째 직장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수술로 체력이 쇠할 대로 쇠해서 도저히 바쁜 회사생활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일하는 시간과 체력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대안의 일을 찾아보니 그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거라고는 ‘글쓰기’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글을 쓰는 일이 차츰 직업이 되어갔다. ‘작가가 된 계기’에는 흔하게 작가들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는 문학소녀의 꿈도, 숱하게 시도했던 등단을 위한 습작도,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난 섬광 같은 계시도 없었다. 그저 몸이 너무 약해 출근을 못하게 된 한 인간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 해서 시작한 것뿐이다. 다시 말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지긋지긋한 네 번의 암 재발수술을 받을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분명히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갑상선암이라는 끈질긴 친구 덕분이다. 인생은 그토록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뜻밖의 직업을 경험하게 해준 것에 대해 나는 이 지병에게 감사해야 하는 걸까? 결과적으로 글 쓰는 일이 회사를 다니는 일보다 더 적성에 맞았던 것일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수웅 문학전문기자의 에세이 『탐독』에서 여러 작가들의 ‘작가가 된 계기’들을 읽으면서 불쑥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특히 소설가 정유정의 경우는 간호사 경력과는 무관하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고 ‘언젠가는 반드시 소설을 쓰겠어’라는 비장함을 계속 품어왔다고 한다. 김중혁 작가도 김영하 작가도 학창시절부터 장차 소설을 쓰리라는 어떤 특별하고 명징한 계기와 맥락들이 있었다. 그런 배경이야기를 접할 때면 스스로가 왜소해지는 기분이 든다. 비장한 열망이나 소명의식 하나 없이 건강하지 못한 몸이 불러온 ‘차선책’ 혹은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자격미달이거나 뿌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글에게 황송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게 또 나인 걸 어떡하리. 그냥 이대로 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만큼 걸어가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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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어수웅 저 | 민음사
책을 바라보는 열 개의 시선 김영하, 은희경, 정유정, 움베르토 에코, 안은미… 모두가 책의 위기를 말하는 지금,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들려주는, 책을 매개로 한 마법과도 같은 순간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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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경선 (소설가)

『태도에 관하여』,『나의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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