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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1

조선시대에도 여전했던 강렬한 아름다움의 추구, 여인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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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가 짧아지고 몸에 밀착되면 될수록 옷맵시를 내기 위해 가슴을 더 졸라매는 ‘졸잇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코르셋을 허리가 아닌 가슴에 사용해서 누르고 압박하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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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미인도. 출처_간송미술관

 

조선시대를 살아가든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든 옷에 대한 여성의 관심과 애정은 남성의 그것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될 정도로 강렬하다. 왜 그런 걸까?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고만 보고 넘기기에는 남성들의 미적 수준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성향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이 될 듯싶어 좀 더 곰곰이 되짚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여성은 육체적인 근력의 사용에 있어 대체로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뒤쳐져 있었다. 이러한 여성에게 육체의 근력이 가장 중요한 먹고사는 수단이던 시절이 과거 역사 속에는 길고도 길게 존재한다. 근력이 월등한 남성 노동력을 이용해서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지어야만 더 잘 먹고살 수 있었고, 여성의 섬세함이 빛을 발할 만한 서비스 업종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여성 스스로 경제적인 자립을 도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했던 시간 속에서 어쩌면 생계를 유지하는 안정적 수단으로서의 남성과의 관계 형성은 여성들에게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더 나은 생계유지 방편을 제공해줄 남성과 가족을 꾸리고 유지하기 위해 여성은 자신을 돋보이게 꾸며서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과업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나를 꾸미는 일과 도구들, 즉 각종 장신구과 옷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성보다 크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찾고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픈 욕심은 솟구치지만 이 자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조각으로 모아 조명해보고 지혜를 얻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인류발달사나 여성학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나의 추측은 ‘의견과 덜 익은 가능성’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도록 놓아두고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여성의 속옷부터 화려한 궁중 의상까지 차례차례 들여다보는 작업에 시동을 걸어야겠다!

 

 

가슴을 졸라매는 ‘졸잇말’과 속적삼, 안저고리, 겉저고리까지 ‘삼작저고리’ 

 

여성의 속옷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여성의 속옷은 남성에 비해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입는 순서도 복잡했다. 본래 속옷을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내의[內衣]ㆍ내복[內服]ㆍ단의[單衣]ㆍ설복[褻服]ㆍ친의 등의 말은 모두 속옷을 일컫는 말이었고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여름에는 땀의 흡수를 도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속옷을 입었다. 더불어 여성들에게 속옷은 때때로 옷의 모양새를 다잡아주고 우아함을 극대화시켜 맵시 있는 자태를 만들어주는 비밀병기이기도 했다. 흡수성이 좋고 세탁에 용이하며 저렴한 무명으로 만든 속옷이 일반적이었지만, 예복용 속옷을 만들거나 신분이 높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속옷일 경우엔 화려한 무늬를 넣거나 명주비단처럼 비싼 천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늘 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더 많은 것이 허용되고 조선시대에도 있는 사람들은 비단으로 만든 실크팬티도 입었구나 싶어서 인간사가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이 사실에 주목하며 위안을 받아보자. 신분이 높고 돈으로 산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루에 열 끼 먹지 않듯이 속옷의 종류는 신분이나 경제력과 무관하게 거의 동일하였다. 물론 어디까지 챙겨서 정갈하게 입을 수 있느냐하는 것은 또다시 돈과 여유 있는 생활의 문제와 직결되지만, 그래도 어차피 겉옷을 입으면 안보이기는 매한가지인 속옷이다.

 

여성이 상의로 입는 속옷은 홑겹인 속적삼이 대표적인데 흔히 속저고리라고 부르는 것으로 땀 흡수를 위한 용도로 입었다. 아무리 무더운 한여름이라도 속적삼 없이 겉저고리를 입지는 않았다. 겨울이 되면 속적삼 위에 안저고리라 하여 속옷을 한 겹 추가하여 입었는데 여기에 겉저고리까지 입는 것을 일컬어 ‘삼작저고리’라 불렀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저고리 길이가 눈에 띄게 짧아지며 겨드랑이와 가슴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기 전, 맨살 위에 두르는 가리개용 허리띠가 등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볼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우리의 가슴용 속옷과 달리 조선의 가리개용 허리띠는 가슴을 납작하게 졸라매는 용도였다. 후에 저고리가 짧아지고 몸에 밀착되면 될수록 옷맵시를 내기 위해 가슴을 더 졸라매는 ‘졸잇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코르셋을 허리가 아닌 가슴에 사용해서 누르고 압박하는 것과 같았다. 스키니한 몸매를 향한 염원이 이때부터였던가? 한편으론 쓴 웃음이 나는 대목이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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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잇말.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치마 안에 입는 하의는 종류가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안쪽에서부터 점차 바깥쪽 방향으로 입는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게 좋겠다.

 

 

다리속곳에 속속곳, 고쟁이에 단속곳까지

 

가장 먼저 다리속곳을 입는다. 다리속곳은 주로 무명을 사용하여 여러 겹으로 길게 접어 허리띠에 달아서 입었는데 오늘날 T팬티를 넓혀놓은 모양처럼 보인다. 그 위에 밑이 막혀 있고 길이가 짧아서 오늘날 남성의 커다란 트렁크 팬티처럼 보이는 속속곳을 입고, 거기에 다시 흔히 속바지라고 불리는 고쟁이를 입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시 그 위에 양 가랑이가 넓고 길이가 치마보다 조금 짧을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단속곳을 입었는데, 안쪽에 입는 속옷일수록 세탁하기 쉽고 저렴한 무명을 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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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다리속곳. 우 단속곳.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사실, 단속곳은 속속곳과 크기가 다를 뿐, 모양이 매우 유사했으며 속치마 대용으로 입을 수 있을 만큼 길이가 길고 바지통이 컸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긴 시간 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서민 여성들은 이 복잡한 과정을 대폭 생략하고 다리속곳 위에 바로 고쟁이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다리속곳 위에 고쟁이만 입는 경우, 고쟁이의 밑이 터져 있어서 용변을 보기에 편리했고 더운 여름에는 이렇게 입는 편이 몹시 시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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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쟁이.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반면에 신분이 높은 양반가나 궁 안에서 생활하는 여인들은 속옷을 생략하여 입기는커녕, 단속곳 위에 그보다 바지통이 더 넓고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든 너른바지를 겹쳐 입고, 모시 12폭을 이어 만든 대슘치마를 입었다. 때로는 극단적인 우아함과 화려함을 위하여 마치 서양의 페티고트와 유사한 역할을 해주는 층층의 무지기까지 덧입곤 하였다. 대슘치마와 무지기는 겉치마를 넓고 고르게 펼쳐서 유지시켜 주었으므로 여성이 아름답고 고고한 맵시를 뽐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상류층 여인들뿐만 아니라 고운 자태에 목숨을 걸던 기녀들도 애용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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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대슘치마, 우 무지기치마.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저고리와 치마가 기본, 평상복과 혼례복으로도 쓰인 대례복

 

조선의 여인들이 이토록 겹겹이 겹쳐 입은 속옷 위에 어떠한 의복을 입었던 걸까? 여성도 신분에 따른 의복의 차이가 매우 컸다. 여성의복이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함의 꽃인 궁중의 의복부터 자세히 살펴보자면 크게 평상복과 의식용 대례복으로 구분된다.

 

왕실 여성도 평상복의 기본이 저고리와 치마인 것은 당연한데, 저고리는 깃, 끝동, 겨드랑이 등에 다른 빛깔을 덧대어 화려함을 더한 회장저고리를 입거나 당의를 입었다. 당의는 예의를 갖추며 간단하게 차려입는 궁중 소례복으로 초록색 바탕에 자주 고름을 단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나 다양한 색깔로 만들어졌고 왕비의 경우는 송화색 저고리를 주로 입곤 했다. 당의는 좁은 소매 끝부분에는 웃어른에게 손을 보이지 않는 것을 예로 여겼기 때문에 흰 천을 덧댄 거들지를 달고 저고리 앞뒤로는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오게 만들어 옆을 트고, 두 앞자락이 서로 겹쳐지도록 만들어 입었다.  치마는 ‘수보로[繡甫老]’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궁중이나 양반가의 여인들은 예를 갖추어 장식한 금박이나 금직의 ‘스란’이라 불리는 단을 치마 아래에 덧댄 스란치마를 입었다. 궁중 평상복 치마는 남색치마가 가장 일반적이었고 왕비는 용무늬, 세자빈은 봉황 무늬를 넣었으며 공주ㆍ옹주는 양반가의 여인들처럼 꽃과 글자 무늬를 넣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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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치마.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대례복은 궁중에서 행사가 있을 때 입던 옷으로, 왕비의 대례복은 ‘적의’라 부르는데 둥근 앞깃에 옆이 터져 있는 원삼[圓衫]의 일종이다. 적의는 가장 겉에 붉은색의 대삼[大衫]을 입고 그 위에 꿩 무늬를 화려하게 수놓은 청색배자를 덧입는 것으로 여기에 맞추어 머리에는 적관[翟冠]을 썼다. 원삼 외에도 공주나 옹주의 예복으로 쓰인 활옷[闊衣](활의)도 특별한 날 입었던 옷이었다. 활옷은 상류층의 혼례복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일반적인 원삼에 비해서 옷과 소매가 길고 붉은색 바탕에 장수와 복을 비는 문양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앞서 말한 당의도 궁중에선 평상복으로 입었던 것을 양반이나 일반 백성들은 예복으로 입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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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옷. 출처-세종대학교박물관

 

 

외출용 얼굴 가림막, 장옷과 쓰개치마와 너울

 

그렇다면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인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우선 치마저고리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알아둘 것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 여성은 얼굴을 드러내고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옷이나 쓰개치마, 너울 등으로 얼굴을 가리곤 하였다. 시대에 따라 양반가의 여인과 서민 여인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주로 사용한 것이 다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갔다고는 하지만, 신분을 막론하고 장시간 외출을 하는 경우엔 많은 여성들이 형편에 맞는 것을 택하여 얼굴을 가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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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쓰개치마는 옥색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으며 계절에 따라 겹으로 만들거나 솜을 넣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일반치마 모양에 끈이 달려 있어서 주름을 촘촘하게 겹쳐 잡은 치마가 달린 치마허리를 얼굴 둘레에 감싼 후 속에서 손으로 앞을 여며 잡아 사용하였다. 장옷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로 옷감은 계절에 따라 바뀌었고 겉은 초록색 옷감을, 안감, 옷깃, 옷고름은 자주색 옷감을 사용해서 만들고 소매부리에는 흰색 거들지를 넓게 달았다. 제주도에서는 장옷을 여성의 혼례복에 쓰거나 장례 때 수의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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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월하정인>. 출처-간송미술관

 

너울은 나들이 갈 때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얇은 검정색 천을 이용해 만드는데 가장 완벽하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가림막인데 현대에 양봉을 하는 분들이 벌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밀짚모자 위에 쓰는 얼굴가리기용 망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가는 모양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여성들의 치마와 저고리를 살펴보자. 조선시대에는 여인의 신분을 알고 싶으면 가장 먼저 입고 있는 치마를 보았다. 상층 신분으로 갈수록 치마는 넓고 길었으며 하층 신분으로 갈수록 폭이 좁고 짧아졌다. 현실적으로 노동을 하느냐의 유무와 천을 얼마나 쓸 수 있느냐의 문제도 영향을 주었을 텐데 폭이 넓고 길어서 주름을 많이 잡고 호화롭게 펼쳐지는 치마일수록 입고 일을 한다는 기능성은 현저히 떨어지고 비싼 만큼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 연출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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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회장저고리. 출처-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이라는 같은 시대구분 명칭을 쓰더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500여 년의 세월이 녹아 있으니 여성들의 옷 모양에 변화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살던 시기의 정세와 현실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며 영향을 받아 시시각각으로 조금씩 모양새가 변하고 유행을 타는 것이 여성의 의복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없는 진리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성들이 어떤 옷을 입었냐고 물으면 끝동ㆍ깃ㆍ고름ㆍ곁마기를 자줏빛이나 남빛의 헝겊으로 꾸민 삼회장저고리를 짧게 입고 아래로 풍성한 치마를 조화시켜 몸 전체에 풍만한 곡선의 흐름을 통해 고상한 옷태를 내고자 했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세분화하여 들여다보면 저고리만 해도 고려 말, 몽고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던 것이 조선전기를 거쳐 16세기까지도 이어진 탓에 당시에는 여성들의 허리를 덮을 정도로 길고 품도 넉넉했다. 하지만 이것이 조금씩 짧아지더니 19세기에는 그야말로 한 뼘도 안 되게 짧아져서 저고리로 가슴은 물론 겨드랑이조차 가릴 수 없을 정도까지 변했다. 여성의 속옷을 살펴볼 때 등장한 가리개용 허리띠는 바로 이러한 저고리의 짧아짐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신속옷에 해당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을 어떤 옷을 입었을까?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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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반주원

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했다. 외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사 및 통합사회 강사로 메가스터디, 비타에듀, 비상에듀 등의 유명 대형 학원과 EBS 등에서 두루 강의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전국 최고 사탐 강사 5인(입시타임즈 선정)에 뽑히는 등 수능 영역에서는 10년 이상 최고의 사회과 스타 강사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공무원 한국사 영역으로 강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현재는 TV 프로그램 ‘황금알’에 한국사 전문가로 출연 중이다. 『반주원 한국사』 시리즈, 『반주원의 국사 교과서 새로보기』, 『유물유적 한국사 1』 외 다수의 저서를 편찬·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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