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엄마를 이야기하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에는 엄마가 등장한다. 자식들이 무슨 사고를 치고 기어들어와도 매 끼니 밥을 짓고 삼겹살을 굽는 엄마다. 이 소설은 그 엄마 때문에 몹시도 아름답다. 엄마는 그냥 밥만 해주는데, 이 엉망진창 가족들은 그 밥만 먹고도 삶을 유지하고 지탱해 나간다.

twi001t1608703.jpg

 

오래 전 엄마와 영화를 보러 간 적 있었다. 제목이 <애자>였다. 최강희가 인생 안 풀리는 노처녀 작가 역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병든 엄마를 지키며 병원 밖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거지깽깽이 같은 차림으로 다니는 꼬락서니가 우리 엄마는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쯤,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와 딸이 단둘이 떠난 여행길에서 두 사람이 마구 언성을 높이는 장면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엄마도 엄마를 위해서 좀 살아봐!” 대강 이런 분위기였다. 나는 막 쿨쩍쿨쩍 눈물이 났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최강희가 막 악을 쓰는 장면에서 우리 엄마, 나지막하지만 단단하게 주인공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시집이나 가라, 이년아.”

 

엄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너무 컸고 순식간에 관객들은 우리 엄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여기저기서 키득대는가 싶더니 급기야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관객들이 모두 따라 박수를 쳤다. 그날 엄마는 뜻밖의 박수세례를 한참이나 받고 돌아왔다. 창피해서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일산시청 소속 장대높이뛰기 선수와 결혼하는 꿈을 꾸어서, 일산시청에 정말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있는지 알아보려 했는데, 고양시청도 아니고 일산시청이라는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엄마에게 매일 욕이나 먹으며 살 운명이려니 했다. 그럼에도 나는 2년 전 어찌어찌하다 보니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는 생각보다 복잡했고 결혼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머릿속은 다 부푼 풍선처럼 멍하고 어지러웠다. 엄마의 전화가 그때 걸려왔다.

 

“야, 포항에서 가는 손님들은 얼마 없어. 나는 니가 뭐 시집을 가겠나 싶어서 다른 집 결혼도 딱 둘째까지만 갔어. 셋째 결혼식들은 하나도 안 갔어. 그러니 니가 간다고 해도 나는 사람들한테 와달란 소리도 못해. 벌써 두 번씩이나 사람들을 불렀는데 또 어째 부르나. 세 번짼데. 야마리 까졌다고 사람들이 욕해. 해봐야 서른 명이나 가나. 예식 시간이 늦어가지고야 사람들 밥을 어째야 하나 내가 고민이 말이 아이다. 니는 뭔 예식 시간을 그래 늦게 잡나. 열두 시나 한 시가 딱 좋지. 별 수 있나. 밥하고 떡하고 고기랑 실어가지고 가야지. 술도 좀 받고. 경수 엄마가 내한테 그러잖나. ‘아이고, 형님. 국은 내가 끓여갖고 버스에 실을게요.’ 내가 그래갖고 막 뭐라 했어. ‘야, 니 신랑이 아파서 병원에 누운 지 몇 년인데, 니가 뭔 정신이 있다고 국을 끓이고 말고 하나. 고마 씰데없는 소리 마라.’ 그랬는데도 자꾸 국을 끓여온다 그러잖나. 경수 동생 희영이 알제? 희영이가 결혼을 해서 직장을 댕겨. 근데 희영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거라. 버스에서 사람들 수발 들고 할라면 젊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내가 미쳤냐고 욕을 막 했어. 직장 다니는 아를 뭘 심부름을 시킨다고 주말에 서울에 델고 가나. 돌았나. 직장 댕기면서 새끼 키우느라 진이 쪽쪽 빠진 아를 니 결혼이 뭐라고 거길 가자 해. 그랬더니 상혁이 엄마가 국을 또 자기가 끓인다고 안 하나. 니 상혁이 엄마 알제? 환호동 사는 엄마. 그 집도 손주들 둘 봐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들 둘이 하나씩 아를지 엄마한테 맡겼잖나. 그래서 내가 그랬어. ‘형님, 우리가 인제 다들 늙어서 그런 짓 못한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가주기만 해도 내가 너무너무 고맙소.’ 우리가 젊었을 때는 어디 갈 때마다 국도 끓이고 중간에 버스 세워놓고 밥도 먹고 그랬어. 아무데서나 자리 깔고. 근데 야, 우리도 인제 다 늙어서 여기저기 아픈 엄마들도 많아. 서울 가자 하기가 안 쉬워. 많이 못 가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미쳤나. 버스 대절하는 돈을 니가 왜 주나. 고마 시끄라. 그 정도 돈은 나도 있어. 시끄라. 욕은 안 먹을만치 떡이랑 음식이랑 해서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니들 둘 다 한복 안 하면 난 결혼식 안 가. 아니, 한복도 없이 어째 어른이 되나. 말이 되나. 이번 주에 가서 내가 둘 다 한복 해 입힐 기야. 그런 줄 알아. 고마 시끄라.”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에는 엄마가 등장한다. 자식들이 무슨 사고를 치고 기어들어와도 매 끼니 밥을 짓고 삼겹살을 굽는 엄마다. 이 소설은 그 엄마 때문에 몹시도 아름답다. 엄마는 그냥 밥만 해주는데, 이 엉망진창 가족들은 그 밥만 먹고도 삶을 유지하고 지탱해 나간다. 엄마엄마, 징징대는 소설이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 책장을 살펴 『고령화 가족』을 뽑아낸다. 희한하게도 이 책에서는 삼겹살 냄새가 난다. 농담처럼 말이다.

 


 

 

고령화 가족천명관 저 | 문학동네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고래』의 작가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소설. 한 가족 안에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벌이는 온갖 사건사고와 그들간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유쾌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고령화 가족

<천명관> 저10,800원(10% + 5%)

'희대의 이야기꾼' 천명관이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고래』의 작가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소설. 한 가족 안에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벌이는 온갖 사건사고와 그들간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유쾌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령화 가족'에는 다양한 인..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애자 : 2Disc

25,580원(7% + 1%)

고등학교 시절 '부산의 톨스토이'로 이름을 날렸던 박애자. 소설가의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고리짝적 지방신문 당선 경력과 바람둥이 남자친구, 산더미 같은 빚만 남은 스물 아홉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갑갑한 상황에서도 깡다구 하나는 죽지 않은 그녀의 유일무이한 적수는 바로 엄마 영희!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