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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내는 사랑이 첫사랑이라니, 용순아

영화 <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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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스럽던 소녀 시대, 첫사랑의 비밀노트’란 홍보 포스터를 보았을 때, 싱그럽고 우스꽝스럽고 애틋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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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이원 시 ‘사랑 또는 두 발’ 중에서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에 수록)
 
엄마 없이 자랐고 꿈도 그다지 없는 충청도 여고생 용순은 달리기반에 들어간다. 대학교 전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해볼 만한 일은 별로 없기에. 그저 앞을 보고 두 발로 달리기만 하면 될 듯한 (쉬운) 일인데 인생이 걸렸다.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진’ 사랑이 있었으므로. “용순아 고개 들고 달리자”고 외치는 체육 선생과 사랑에 빠졌다. 여고생 짝사랑이 아니다. 사귀는 것이다. 백일 기념 선물로 강가의 조약돌 백 개에 사랑 고백 그림을 새기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림을 잘 그리는데, 달리기 말고도 재주가 있었네)
 
그런데 이 사랑 쉽지 않다. ‘체육’(친구들은 그냥 과목을 선생님 호칭으로 부른다)에게 ‘영어’가 붙었다. 그들은 결혼도 생각하는 관계다. ‘체육’은 삼각관계에서 주도권도 없고 어찌할 바도 모르는 그냥 ‘순둥이’라고나 할까. (아니 근데 두 여성은 왜 이 우유부단한 남자를 뺏기지 않겠다고 난리인겨.)

용순에게 비련의 여고생을 기대하지 말자. 당차고 거침없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났고 그후 세상을 뜬 엄마에 대한 상처가 깊다. 떠나지 말라고 엄마 옷자락이라도 붙잡을 걸, 이라고 ‘체육’에게 고백하기도 한다. 그 말을 듣는 ‘체육’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듯하다. 학생과 사랑에 빠진 데다 새로운 ‘영어’가 나타난 현실에 갈팡질팡이었으니. 결국 용순이 ‘영어’와 육탄전으로 벌이고 난리법석 통에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리고 있던 ‘체육’의 옷자락을 잡는다. 그러나 금세 놓는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난스럽던 소녀 시대, 첫사랑의 비밀노트’란 홍보 포스터를 보았을 때, 싱그럽고 우스꽝스럽고 애틋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기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사람들이 모여 만든 회사 <아토ATO>의 두 번째 작품이니 창립작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에서 느꼈던 그 감성, 깊이를 기대했다. 역시나 그 감수성은 맞닿아 있었다. 풍경을 담은 방식과 특별한 소품들, 에피소드의 탁월한 배치 등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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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좋았던 것은 캐릭터. 그리고 사랑에 대한 비유였다. 용순에게 첫사랑은 스스로 끝장내기도 한 사랑이다. 위계에 눌려, 사회 통념에 미리 겁내지 않는다. 착한 소녀 콤플렉스가 아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랑이었다. 끝장내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으니 끝을 보자는 그 가열한 마음. 나는 ‘사랑 진상 짓’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충분히 이해된다. 진상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용순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용순을 짝사랑하는 친구 ‘빽큐’는 말 안 되는 연애시를 끊임없이 쓴다. 그것을 신준 감독은 ‘쭈글미’라고 표현하던데, 참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보 만발한 연애시들이었다. 용순의 ‘체육’ 사랑은 끝까지 가는 것이고, 빽큐의 ‘용순’ 사랑은 절대 끝내지 않고 곁에서 맴돌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같은 형태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 장면, 사랑 때문에 난장판을 치고 난 후 홀로 학교 운동장을 찾아가 쉬지 않고 달릴 때 용순 뒤의 햇살은 눈부셨다. 끝장낸 사랑은 그러니까 끝난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용순의 사랑은 끝났다. 온몸이 쓰라려도 용순이 끝낸 것이니. 사랑은 끝나도 햇살은 반짝였다. 용순은 곧 스무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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