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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떨어진 마음의 말

안미옥,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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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후의 인간은, 분명히 다른 말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2018. 05. 03)

출처_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언어는 마음의 목덜미를 낚아채려고 한다. 마음은 언어의 손아귀를 미끄러진다. 언어는 마음을 붙잡아서 그 위에 널빤지를 덮고 못질을 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은 흐르고 퍼지며 풍기고 넘친다. 마음은 번번이 언어를 빠져나간다. 언어는 번번이 마음을 놓친다. 우리의 입술이 침묵에 잠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말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어떤 말로도 다 붙잡을 수 없는 마음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언제나 마음이 있다는 거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때는 물론이고,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밥을 먹고 깊숙한 혓바닥을 닦을 때에도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 더욱 곤란한 것은 나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마음이 너에게도 있다는 사실이다. 너에게 언제나 마음이 있다. 네가 마음이 쓸쓸하다고 말할 때는 물론이고, 너에게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내 마음을 뾰족하게 세울 때에도 너에게 마음이 있었다. 각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후의 인간은, 분명히 다른 말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침묵의 내부에 좁은 골목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작은 화분에 담긴 커다란 식물처럼 혀가 묶이기 시작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마음이라는 급소를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무방비하게 내버려둔다는 거. 마음이라는 자신의 급소를 보여주기 위해 온갖 말들을 끌어와 노력한다는 거. 나는 말을 해야만 할 때 자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니었다. '네'라고 하기엔 석연찮고, '아니오'라고 하기엔 용기가 모자랐다. '조금 그런 것도 같고 조금 아닌 것도 같다'고 말하자니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생각이 많은데. 생각이 많아서 문젠데. 마음을 꽉 붙잡을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쭈뼛거렸다. 어물거렸다. 조용하고 말았다. 나는 침묵이 아니었으나 그만 침묵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 마음에 네 마음이 와서 부딪혔다. 어느 쪽의 마음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내 마음인지 네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연약한 마음이 부서져 있었다. 너의 파편과 나의 파편이 섞인 것도 같았다. 뒤섞인 파편 속에서 한 사람이 우뚝 일어서는 것 같았다. 마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타자인 것 같았다. 마음은 말을 시작했다. 내가 마음을 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마음이 온전히 자신의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끔찍하구나
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
- 「시집」 부분

 

편하게 쓰는 법과 편하게 사는 법을 몰랐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편하게 말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일 것만 같다. 외부의 압력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침묵의 내부에서 한없이 팽창하고 있는 마음. 팽창하다가 몸 바깥으로 탁 뱉어진 마음. 안미옥의 시는 마음의 말로 빚어진 시다. 시인의 마음이 저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건 일기가 아닌가 싶겠지만, 시인의 마음은 저 혼자 중얼거리는 상태가 아니다. 오른쪽으로 한없이 당기는 세계와 왼쪽으로 한없이 달아나는 나 사이에서 심장을 박박 찢고 툭 튀어나온 마음이다. 그러므로 안미옥의 시에서 마음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과 말 사이인 것 같다. 좁은 골목이 복잡하게 뻗어 있는 침묵의 장소 말이다. 마음이 하고 싶은 말은 행간에 있다. 이 시집이 마음의 말을 붙잡는 방식이다. 언어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침묵 속에 붙잡아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다시 흐르고 퍼지며 풍기고 넘치겠지. 한없이 풍요롭게.

 

어항 속 물고기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낡은 소파가 필요하다
길고 긴 골목 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고 빛나는 흰 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려고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이 우리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들킬까 봐 겁을 내면서
겁을 내는 것이 진심일까 걱정하면서
구름은 구부러지고 나무는 흘러간다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구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었다
맨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나는 더 어두워졌다
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
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
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
찌르는 것
휘어 감기는 것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나는 지나가지 못했다
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
 - 「한 사람이 있는 정오」 전문

 


 

 

안미옥 저 | 창비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등단 5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맨살 같은 언어로 맞이하는 시적 환대”의 세계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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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계영(시인)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

<안미옥> 저9,900원(10% + 1%)

시인의 첫 시집은 왜 이리도 특별할까. '잊을 수 없는 눈빛'을 가진 이 젊은시인의 시집엔 '모든 곳으로 오는 시'가 가득 출렁인다.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기도함으로써 더 단단해진 씨앗 같은 시들. 바야흐로 여름을 맞이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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