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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니 사랑이었구나

<월간 채널예스> 2018년 6월호 - 마지막 회 김해자 시집 『해자네 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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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내 얼굴에 마음이 상할 때가 있다. 나만 세월을 다 먹는 것 같다. (2018. 06. 04)

김서령의 우주 서재.jpg

           언스플래쉬

 

 

세 돌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만 두 살이다. 두 살이라고 말을 하면 너무 아기 같아서 나는 가끔 아기를 보며 웃는다. 요즘은 말대꾸도 하고 짜증도 곧잘 내는데 아직 두 살이라니. 아기의 이름은 우주다. (그래서 내 칼럼의 제목도 우주서재다.)

 

나는 우주와 종종 화장대 앞에 나란히 앉는다. 아기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고 머리를 땋아주고 서랍 속에서 예쁜 핀을 같이 고른다. 내가 썬크림을 바르고 파운데이션을 톡톡 찍어바르는 동안 아기는 나에게 예쁘다는 말을 다섯 번쯤 해준다. 여태도 나에게 예쁘다는 말을 해주는 이는 아기뿐이다. 신이 난 나는 예쁘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서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 치마나 노란 원피스를 꺼내 입는다. 그럴 줄 알았다. “엄마, 너무 예쁘다!” 빨간색과 노란색을 제일 좋아하는 아기는 예쁘다는 말을 세 번쯤 더 보태어준다.

 

그럼에도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에 마음이 상할 때가 있다. 나만 세월을 다 먹는 것 같다. 나는 잘 웃는 여자의 오래된 눈주름을 참 좋아하는데, 나는 참말 잘도 웃는데, 왜 내 눈주름은 예쁘게 잡히지 않는지 모를 일이고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노년의 헤어스타일은 염색기 하나 없이 희디희지만 탱글탱글 탄력 있게 올라 붙은 짧은 파마머리인데, 벌써부터 머리칼이 시들시들하게 늘어지니 귀엽고 깜찍한 백발을 하기는 영 글렀다. 게다가 내 목소리는 어쩜 아직도 이리 까칠한지.

 

얼마 전 제주 4.3항쟁 추모행사에 다니러 갔다가 소설가 이경자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유, 왔구나, 내 새끼들!” 나는 그만 코가 찡해지고 말았는데 오랜 시간 너그럽고 다정한 심사로 사람들을 대해온 한 여자의 인사법이 온몸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흔이 넘었어도 이경자 선생님은 여태 귀엽다. “얘, 그러니까 이번엔 꼭 춘천엘 가자고. 기차 타고 가서 산도 보고 물도 보고. 우리 꼭 가자, 응?” 춘천에 계신 소설가 최성각 선생님네 집에 가보잔 이야기다. “얘, 최성각이 오리도 보여준대!” 선생님은 최성각 선생님이 키우는 오리 사진을 우리에게 몇 번이나 보여주며 춘천엘 가자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주에 선생님을 따라 춘천엘 간다. 오리도 보고, 커다랗고 흰 오리알도 보러.

 

거문도에 갔다가는 시인 김해자 선생님을 만났다. 김해자 선생님의 이야기는 다 귓속말 같다. 조근조근, 나지막한 목소리에다 은은하게 웃음을 얹기 때문이다. 내가 기침을 콜록콜록 하자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말린 대추 한줌을 꺼내주었다. 직접 말린 건데 기침에 그만이란다. 한참 후에 선생님은 다시 내 곁으로 와 비닐에 담긴 대추를 몽땅 건네주었다. “아까 다 줄 걸. 이게 뭐라고 내가 너한테 그만큼만 줬을까.” 거문도 일정은 짧아서 바로 다음날 우리는 배를 타고 돌아가야 했지만 김해자 선생님은 일행들 뒤로 스윽 빠진 뒤 가만히 내 팔짱을 끼었다. “가지 말자. 하늘이 너무 예뻐서 나는 못 가겠어.” 도무지 배에 올라타고 싶지 않았던 나는 헤벌쭉 웃으며 하루 더 머물렀다. 긴 밤 동안 우리는 소주를 마시고 참외를 깎아먹었다. 다음날에도 김해자 선생님은 부두에서 말했다. “물별이 너무 예뻐서 나는 못 가겠어. 도저히 못 가겠어.” 정말이지 햇살을 가득 받은 거문도 바다의 물별에 눈이 부셨지만 배표를 바꿀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거문도를 떠나야만 했다.

 

내가 나이 들어 가장 닮고 싶은 두 분이다. 타고난 성정 상 그리 될 리는 만무하지만 나는 귀엽고 카리스마 터지는 이경자 선생님과 해사하고 맑디맑은 김해자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눈에 오래 넣는다. 팔 짝 벌려 큰소리로 인사하는 방법도 연습하고 조근조근, 귓속말하듯 위로하는 방법도 연습하면 나도 그리 될까 싶어서.

 

마침 김해자 선생님의 시집이 새로 나왔다. 해자네 점집』 . ‘불구가 아니면 불구에게 닿지 못하는/불구의 말, 떠듬떠듬 네게 기울어지던 말들이/더듬어보니 사랑이었구나’ 하는 선생님의 시가 들어 있다.

 

 

*그동안 <김서령의 우주서재>를 아껴주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해자네 점집김해자 저 | 걷는사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시대의 그늘진 면면을 너른 품으로 껴안는 그 많은 말들이 더듬어보면 모두 삶에 대한, 시대에 대한, 또한 사람에 대한 시인만의 진한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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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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