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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의 기념사진, 가미야 온천

온천 명인 안소정의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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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푸에 여행 왔느냐고 묻기에, 꼭 써먹으려고 외워온 문장을 읊었다. “저는 온천 명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2019.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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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벳푸 시내로 왔다. 번화한 풍경을 보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분주히 오가는 버스와 기차, 관광객 가득한 상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였지만, 얼른 벳푸와 친해지고 싶었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역시 온천. 벳푸팔탕 중 가장 온천이 많은 동네에 왔으니 당연히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지도에 수많은 별을 찍어두고도 의심했다. 정말 골목골목마다 온천이 있을까? 얼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곳이 나타났다. 커다란 온천 마크와 가미야 온천(紙屋?泉)이라고 적힌 간판을 발견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운터에 100엔을 내고 입욕권을 받았다. 탕에는 할머니 한 분이 느릿느릿하게 몸을 씻고 계셨다. 조심스레 온도를 체크했는데 물이 무척 뜨거웠다. 찬물을 틀고 싶었지만, 탕 안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계신 할머니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견뎌보기로 했다. 장차 온천 명인이 될 사람인데 이 정도쯤은 버텨야 하지 않겠는가? 속으론 온갖 호들갑을 떨었지만, 겉으론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수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셈하며 참다보니 견딜 만했다. 어느새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변태 같지만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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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할머니가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나갔다. 문득 ‘온천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데,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한 뒤, 할머니께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온천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할머니는 흔쾌히 “괜찮아요”라고 답하더니,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되새겼다. 그건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내가 사진 모델을 해줄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 말에 놀라서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급히 대답했다. 그러자 돌아온 말은 더 흥미로웠다. “그럼, 네 사진을 찍어줄까?” 당황한 나는 손사래를 치며 이상한 일본어로 대답했다.


“이마 누드데스(지금 누드입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게 아닌가! 탕에 들어간 뒤, 벽에 바짝 붙으면 보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할머니의 권유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온천에서 알몸으로 기념사진이라니.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에 냉큼 탕으로 입수했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은 뒤, 잘 찍혔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수평도 기울고 초점도 흐렸지만, 결과물에 할머니와의 에피소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좋았다.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활짝 웃으며 “최고예요”라고 답했다. 할머니와 나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벳푸에 여행 왔느냐고 묻기에, 꼭 써먹으려고 외워온 문장을 읊었다. “저는 온천 명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할머니는 어떤 온천에 다녀왔는지, 어떤 온천이 좋았는지, 어디서 머무르는지 등 계속해서 질문했고 신이 난 나는 서툰 일본어로 한참 수다를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내 이야기에 반가움을 표하며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며 음식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 고마운 일이 생기면 보답하려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 유자차 포션을 선물로 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물이 가득 담긴 페트병을 건네주시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내게 “이거 여기의 온천수야. 위장이랑 피부에 좋아. 냉장고에 뒀다 마시면 더 좋고”라고 하며 내 손에 병을 쥐여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례에 깊이 감동했다. 먼저 온천을 떠나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했습니다. 살펴 가세요.”


나는 한참을 탈의실에 앉아 오늘의 만남이 가져다준 여운을 즐겼다. 온천의 문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았다. 알몸의 기념사진도, 갑자기 손에 쥐어진 온천수도.


문득 근거 없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건, 벳푸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온천들이 손짓하며 어서 오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앞으로의 온천은 또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정처 없이 부푸는 마음을 안고 다음 온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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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오이타현 벳푸시 지요마치11-27(大分縣 別府市 千代町11-27)
영업시간 | 13:00~23:00, 연중무휴
찾아가기 | 나게시온센마에(永石溫泉前)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2분 또는 벳푸역에서 도보 12분
입욕요금 | 100엔
시설정보 | 대야, 의자 있음
수질 | 탄산수소염천
영업형태 | 공동 온천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안소정 저 | 앨리스
좋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특별합니다. 또 무언가 좋아하게 되면,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일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매일을 더 윤기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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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안소정(작가)

보통의 회사원. 볕 좋은 가을날 온천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적성을 발견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의 목욕탕을 여행하고 기록해왔다. 내친김에 목욕 가방 들고 일본의 소도시 벳푸를 거닐다 제7843대 벳푸 온천 명인이 되었다.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안소정> 저13,320원(10% + 5%)

연분홍빛 타일,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끈한 물, 습기로 뿌옇게 된 창문, 열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가득 떠서 몸에 끼얹는 짜릿한 순간. 그리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마시는 고소한 우유 한 모금. 이쯤 생각하니, 온천에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온천’이라고 하면 ‘값비싼 료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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