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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 날자꾸나

네게 다시 사랑이 찾아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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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우연히 만난 흰부리와 통키는 소소한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서로 부리를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두 마리 닭을 통해 배웠다. (2019.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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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기 좋은 계절이다. 개와 함께 나가면 억새로 뒤덮인 강가가 나를 반긴다. 억새는 하늘하늘 바람을 따라 춤을 추며 소리를 낸다. 눈을 감아본다.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염소가 운다. 개가 짖는다. 그리고 닭이 운다.
 
서울에 살 동안에는 닭 울음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이곳에 이사 오고 나서야 익숙해졌다. 아파트 앞 쪽문 찻길을 따라 내려가자면 상가건물에서도 닭을 키운다. 꼬끼오 소리가 들리면 닭 주인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목 놓아 우는 저 닭을 잡아먹으려고 키웁니까, 아니면 반려로 키웁니까.
 
어린 시절 학교 앞에 자주 병아리 장사가 왔다. 엄마는 병아리를 사지 말라고 했다. 학교 앞에서 파는 것들은 잘 자랄 만한 것을 제외한 우수리라고 했다. 그런 것들은 닭이 되지도 못하고 금세 병들어 죽을 것이라 했지만 삐약 삐약 우는 꼴을 보자면 저절로 주머니로 손이 갔다. 나도 모르게 동전을 몇 개고 꺼내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키우던 병아리는 모두 죽었다. 친구 중에는 간혹 한두 마리 닭으로 잘 키워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잡아먹었는지 늙어죽였는지 그 후의 이야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최근 본 김현중 소설집  『마음의 지배자』  에 실린 단편 「묘생만경」에는 이런 내가 궁금해 했던 살아남은 닭들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귀촌을 동경해 이사를 간 주인공 가족은 여느 귀촌 가정과 마찬가지로 자잘한 불협화음을 맞닥뜨린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서서히 자신의 귀퉁이를 둥그스름하게 가다듬는, 혹은 날카롭게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행위이자 최소한의 보호막이 된다.
 
주인공 가족은 언젠가부터 병아리를 키운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무려 스무 마리다. 서울에서라면 금세 죽어버렸을 병아리들이 이곳에서는 무난하게 자란다. 수탉과 암탉이 패를 나눠 힘자랑을 하기까지 한다. 가족은 한 마리, 두 마리, 자족하는 생활을 위해 이들을 잡아먹는다.
 
이들 중 흰부리라는 암탉이 있다. 흰부리는 남과 비슷하게 태어났지만 남보다 늦됐다. 자신을 지킬 덩치를 키우지 못했고 날카로운 부리를 갖지도 못했다. 을의 자리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이는 자신이 갑이 될 수 있는, 혹은 평등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흰부리가 그랬다. 그저 살아있기 위해 버티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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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흰부리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날아든다. 수탉의 2인자 통키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우연히 만난 흰부리와 통키는 소소한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서로 부리를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두 마리 닭을 통해 배웠다.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후 흰부리의 마음은 어둠이 지속된다. 이 때의 흰부리는 영화 <조커>를 떠올리게 하고도 남을 만큼 암담하다. 칭찬이 필요한 날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널 배신해도 나만큼은 네 곁에 늘 남아있겠다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싶은 날이 있다. 이 날, 흰부리의 곁에 그런 누군가가 나란히 있어줬다면 어땠을까.
 
작가 김현중은 「묘생만경」의 끝에 실은 후기를 통해 어린 시절 경험을 반추한다. 특히 후기에 실린 두 번째 문단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싶을 만큼 충격적이다. 작가의 후기를 보고 나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단편을 읽고 만다. 이렇듯 다시 읽은 단편은 새삼 더욱 깊은 비극으로 다가온다.  
 
흰부리의 삶에 깊이 공감한다. 그 날 밤의 비극을 맞닥뜨리고 만 흰부리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자꾸만 행복하기 짝이 없었던 흰부리와 통키의 밀회, 희망의 장면을 곱씹는다. 나도 모르게 응원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내보는 것이다.
 
날자, 날자꾸나. 네게 다시 사랑이 찾아오도록 그저 날아오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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