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고운의 부귀영화] 분노의 절주

전고운의 부귀영화 4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매일 밤 기로에 선다. 늘 12시가 지나면 서게 되는 그 기로에서 한 시간 째 큰 주전자에 나무와 열매를 넣고 끓이며 또 생각한다. (2020. 04.23)

분노의 절주.jpg

일러스트_ 이홍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짐한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자.’
하지만 밤이 되면 늘 계획은 정정된다. ‘술 마셔야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밤이 되면 내장 기관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다. 수많은 장기 중 뭐가 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하나가 사라지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전할 수가 있을까. 분명히 이름도 모르는 어떤 장기가 사라지는 게 확실하고, 그래서 매일 밤 잃어버린 나의 장기를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그래 뭐 장기 하나쯤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진다. 그게 무슨 장기였던 간에.

 

나의 술 역사는 짧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술을 싫어해서 온갖 술자리에서 술을 안 마시고 사이다와 콜라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술이 들어가야만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는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나약한 인간들, 가짜 삶에 얼마나 찌들었으면 술에 기대야만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지?’

 

당연히 <취중진담> 이라는 노래도 미워했다. 술 마시고 <취중진담>으로 고백하는 것은 최악이었다. 노래방 마이크를 뺏어서 ‘차렷, 열중 쉬어. 맨 정신에 사랑 좀 하자.’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술 없이는 못 살게 되다니. 남을 비난하면 반드시 그 비난은 나에게 돌아온다. 그게 몇 십 년 후라도 반드시 찾아온다. 비난은 부메랑. 비난은 메아리. 작작 좀 비난할 걸.

 

입에도 안 대던 술을 마시게 된 것은 <소공녀>라는 첫 영화를 쓸 때였다. 혼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차갑고 어두운 글 속에 들어가려니 춥고 무서웠다. 흰 화면은 공포 그 자체였고, 무슨 글자를 채우든 망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과 다르게 채워지는 글들에 숨이 막힐 때마다(거의 매일) 남편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그들에게 지분덕거렸다. 그 짓도 계속하다 보니 그들이 나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또 무슨 죄인가 싶어 그만뒀다. 영화를 쓰고, 준비하고, 찍고, 후반 작업을 하는 긴 과정의 시간 동안 나의 능력 부족이나 인성 문제로 작품을 망쳐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만든 긴장감에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야 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잠에 드는 유일한 방법을 찾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혼술이었던 것이다. 소주는 비렸고, 맥주는 배불렀다. 도수 높고 향이 좋은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키면 가슴이 뜨끈해졌다. 그 뜨거움이 시커멓게 타고 있는 내 속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어쩌면 내 장기 중 하나는 이때 사라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한 작품에 장기 하나. 단편은 작은 장기, 장편은 큰 장기. 술을 마시는 다른 사람들도 결혼, 출산, 이사, 이혼 등 다양한 사연에 장기를 하나씩 잃어버리며 사느라 슬퍼서 술을 푸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친 사랑은 사람을 망치듯, 지나친 술은 뇌와 체력을 망쳤다.

 

그리하여 2020년에 결심한 것 중 하나가 절주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윤여정 배우의 대사가 가슴 깊이 박혔다. 해외로 떠나기 전 매일 술에 취해 사는 아들(황정민 배우 역)을 안아주며 이런 말을 하셨다.

 

“술 마시지 마. 인생 맨 정신으로 살아야지.”
 
그래. 30년을 너무 맨 정신으로만 사느라 힘들어서 그동안 좀 마셨다고 치고, 다시 맨 정신으로 돌아가자. 절주를 결심하고 다이어리에 술을 마신 날과 마시지 않는 날을 표시하는데, 이게 꽤 도움이 된다. 이 달의 결과는 15일은 마시고, 16일은 마시지 않았다. 선방했다. 절제가 무절제를 이겼다. 절제를 왜 하는지 모르는 나란 인간에게서 1점의 희망을 발견한 아주 유의미한 결과다. 그런데 오늘 경동시장에서 헛개나무 열매와 벌나무를 사왔다. 약방 선생님께서 이게 숙취 해소와 간에 그렇게 좋다고 하는 말에 바로 질렀다. 양손 가득 헛개나무 열매와 벌나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착잡해졌다. 이게 절주를 하겠다는 태도를 가진 인간이 하는 짓인가. 발렌타인 30년산은 비싸고, 맛도 기품이 넘치는데, 36년 산 나는 왜 이렇게 낮과 밤으로 두 동강이 난 사람처럼 오락가락 하며 돈을 이쪽저쪽에서 써대는 것인가. 차라리 멋이라도 나게 옷이나 지를 것이지 약재용 나무와 열매에 돈을 써 재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술과 헛개나무 열매 차를 동시에 마시면 간은 또 얼마나 헷갈릴까. 취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매일 밤 기로에 선다. 늘 12시가 지나면 서게 되는 그 기로에서 한 시간 째 큰 주전자에 나무와 열매를 넣고 끓이며 또 생각한다. 술을 마실 것인가, 약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참아볼 것인가.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하필 왼쪽 운율에 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하필 내가 왼손잡이인 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지나친 의미 부여는 위험에 빠트리니까. 사실 나는 후천적 양손잡이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5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전고운(영화감독)

영화 <소공녀>, <페르소나> 등을 만들었다.

오늘의 책

수학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유아수학 공부

국내 최대 유아수학 커뮤니티 '달콤수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꿀쌤의 첫 책! '보고 만지는 경험'과 '엄마의 발문'을 통해 체계적인 유아수학 로드맵을 제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수학 활동을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사소함의 힘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인 시대. 불안과 번아웃이 일상인 이들에게 사소한 습관으로 회복하는 21가지 방법을 담았다. 100미터 구간을 2-3분 이내로 걷는 마이크로 산책부터 하루 한 장 필사, 독서 등 간단한 습관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느끼시길.

지금이 바로, 경제 교육 골든타임

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