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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효과에 최적화된 자의 변명

꾸준한 속도는 내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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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가 간혹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잘 해내는데, 나는 왜 일에 끌려 다니는 건지 답답할 때. (2020.07.24)

픽사베이

야무지지 못한 나는 마감 효과에 늘 끌려다니며 사는 사람 중 하나다. 사실 이런 내가 출근을 하고 산다는 것도 대견하다. 뭐든 미리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 대학교 때까지도 시험은 늘 벼락치기였으며, 원고 청탁이 와도 마감일이 가까워져서야 겨우 한 자를 시작한다. 심지어 퇴근 후 화장도 잠들기 전까지 지우지 않고 미루다가 도저히 잠이 와 안 되겠다 싶을 때 지우는 적도 꽤 많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까지 버티다가 몸을 움직이는 건 좋지 않은 습성인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몸도 여기에 적응이 되었는지 바꿀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걸 요즘 느낀다. 내 삶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빈틈없이 날카로운 잣대는 늘어진 뱃살 드러나는 쫄티처럼 이제 내게 안 어울린다. 갑갑하고 각박하다. 남 보기에도 안 좋고 나도 불편하다. 야무지게 살려니 체력도 달린다. 오래된 휴대폰처럼 일 하나 처리하면 어느새 배터리가 한 칸만 남는다. 아무래도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할 때인가 보다. 게으름을 지혜의 알리바이로 삼지는 말되, 게으름이 아닌 느긋함으로, 조급함이 아닌 경쾌함으로, 주변의 것들과 어우러지는 행복한 삶의 속도를 만들어나가야겠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볼 수 있도록.

- 은유, 『올드걸의 시집』 중

어떤 누가 무언가에 빠져들면 부지런해진다. 한 친구는 어느 날부터 혼자 ‘베이킹 수련’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회사와 사람들에 시달려 누군가를 만나면 대화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스스로 느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혼자 지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김에 관심 있던 베이킹을 시작했고, 매일 퇴근 후 무언가를 만들 생각에 부풀어 일상에 제법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바쁜 시즌이 다시 왔지만, 친구는 주말 동안 오븐 앞에서 버터와 밀가루가 익는 냄새를 맡으면서 있다고 사진을 찍어 보낸다.

그저 늘어져만 있는 무기력한 요즘의 나는, 그녀를 보면서 내가 어딘가에 빠져들지 않아서 그런건가 잠시 생각했다. 최근까지 내가 빠져 있던 건 운동이었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열심히 하고 싶어서 매일 몸을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마감에 시달리지 않고서도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인 건 운동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몸 곳곳이 아우성을 치면서 2년 만에 매일 하던 운동을 한 달 쉬게 되었다. 단연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역시 집중할 곳을 잃은 몸은 더 느려지기 마련이다. 몸의 속도가 느리게 타고난 사람은 무엇에라도 집중해야 빨라진다. 음, 어쩌면 게으른 자의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픽사베이

본디 게으르다는 걸 스스로도 알지만, 넋 놓고 사는 내 모습은 또 싫어서 무엇이든 하려고 시도는 한다. 성취를 해 내려고 마감을 만들고, 돈을 들여 클래스에 등록하고, 순간이라도 집중해 끝내고 만다. 시작이 반이라는 게 너무나도 실감 나는 삶이지만, 그렇게라도 해내고 나면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인정 욕구 또한 넘치는 사람이라, 이렇게 보이는 것에 또 나름대로 만족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는 잡아둔 일들에 끌려 겨우 따라가는 것뿐인데, 나더러 그만 바삐 움직이라고 한다. ‘겨우’라도 완수해내는 건 그래서 중요한 걸까. 일을 잡아 두면 어떻게든 끝내긴 한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삶은 어떻게든 돌아간다.

‘어떻게든 돌아간다’는 내 말이 무책임하다 느낄 수도 있겠다. 꼼꼼하고 빈틈없이 돌아가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하고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문득 쉬지 않고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던 식물이 과습으로 죽었던 걸 떠올린다. 주인을 닮아서 쉼 없이 자라나도록 물을 준 건 이 친구에게 맞지 않았나 보다.

그냥 나의 속도는 천천히라도 나가는 게 맞는 거라고 인정해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떻게든 돌아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람들이 책임감 없다고만 생각하지는 말아주었으면. 몸의 긴장을 늘 유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것뿐일 테니. 어쨌든 나아가고는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 삶은 돌아갈 테니까 삶의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주눅 들 것도, 애써 자신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나의 태도를 스스로도 인정하겠다.



멈춰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게, 잠깐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식물을 위한 길입니다. 휴식기를 맛있게 잘 보낸 식물은 반드시 다시 깨어나 이파리에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예쁘게 자라줄 테니까요. 어쩌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어요. 각자의 속도로 자라나는 식물처럼,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모두가 달릴 필요는 없어요.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찾아 움직이거나 멈춰 있어도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부디, 스스로의 속도에 안달하지 않고 평화로운 시간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임이랑,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중



올드걸의 시집
올드걸의 시집
은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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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나영(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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