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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 브리저스, 날카롭게 스며드는 고찰의 바다

피비 브리저스(Phoebe Bridgers) < Punis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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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 브리저스는 협업과 오마주라는 편법에서 본인만의 양식을 찾고 형식적인 재료를 한 데 모아 독보적인 사운드를 창출한다. (2020.09.29)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인디-포크록 싱어송라이터 피비 브리저스(Phoebe Bridgers)는 착실하게 본인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2017년 정규 1집 <Stranger in the Alps>가 평단의 호평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동종의 음악가 줄리안 베이커(Julien Baker)와 루시 다커스(Lucy Dacus)와의 합작 프로젝트 '보이지니어스(Boygenius)', 코너 오버스트(Conor Oberst)와 함께한 듀오 '베터 오블리비언 커뮤니티 센터(Better Oblivion Community Center)' 등 다방면에서 활약을 펼치며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을 쌓았다. 최근 The 1975, 피오나 애플(Fiona Apple)과 도모한 협업은 그의 놀라운 활동 범위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발매된 <Punisher>는 재료만 두고 본다면 그리 독특한 충격은 아닐지 모른다. 사춘기의 방황과 혼란을 노래하는 이모(Emo)적 성질,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열화된 어쿠스틱 기타는 이미 전작에서 다루던 작법의 연장선이다. 포맷 역시 스네일 메일(Snail Mail), 왁사해치(Waxahatchee) 등의 수많은 인디 록 아티스트가 선호하고 애용하던 소재다. 그럼에도 본작이 단연 돋보이는 이유는 포용성을 겸비한 매력과 꽉 찬 음악적 내실이다. 그간 넓은 반경에서 만난 인적 자원을 토대로 앨범은 많은 참여진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실제 사운드는 마치 한 사람이 제작한 듯 단일 색채로 묶이며 하나의 브랜드로 일축된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의 교두보를 수행하고 방대한 양의 서사를 다루는 가사에는 들뜨거나 조바심하는 모습이 일절 없다. 아주 조용하고 날카롭게 스며들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는 마니아 팬덤을 소유한 영화 '도니 다코(Donnie Darko)'의 '해골 코스튬'이나 자주 듣는 코미디 팟캐스트, 엘리엇 스미스(Elliot Smith)에 대한 경외감 등 다양한 동경과 애정의 대상을 본인만의 것으로 흡수하고 해석하는 데 집중한다. 스미스의 쓸쓸한 읊조림을 표방하기 위해 더블 트래킹 기법으로 입체감을 구현한 보컬,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곡 'Tears in heaven'을 언급하는 'Moon song', 그리고 인디 록 밴드 내셔널(The National)을 연상시키는 'Garden song'의 코러스 구간은 활용의 좋은 예시다. 이는 본작의 기반이 소름 끼칠 정도로 애정 어린 '트리뷰트' 정신에 있음을 시사한다. <Punisher>라는 제목 또한 강박적인 팬의 집착이 아티스트에게는 '응징자'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에 대한 자조적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종합적인 외부 요소를 배치하고 연출하는 방식에서 치밀함을 보인다는 점이다. 인스트루멘탈 트랙 'DVD Menu'에서 'Garden song'으로 넘어가는 기조 변화는 우울한 젊음이 한 줄기 희망을 찾게 되는 시작점이다. 이후 한산한 일본 여행이라는 소재 속 아버지와의 애증 관계를 덤덤히 표현한 'Kyoto'는 의연한 내용과 달리 멜로디컬한 구성으로 반어적인 극복을 기획하고, 과학의 산물 인공위성에 소원을 비는 행위로 신을 믿지는 않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길 고대하는 내용의 'Chinese satellite'는 전개에 맞춰 오케스트라와 로킹한 면이 차례로 드러난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ICU'와 'I know the end'은 드러머이자 현재는 결별한 전 애인 '마셜 보어'와의 경험이 섞인 탓인지 유독 격한 감정선이 특징인데, 기타와 드럼이 동시에 페이드인 되는 전자의 도입부와 후자의 장대한 서사적 구성 등 작중 청적 희열감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Punisher>은 광대한 바다다. 사적 경험, 트라우마, 의식의 흐름에서 파생된 깊은 고찰 등 내면에 넘치는 역동성이 트랙 내에서 다양한 파고를 오가며 살아 숨 쉬지만, 이내 앨범이라는 거시적 관점으로 본다면 정적이고 고요한 수평선처럼 보일 뿐이다. 이는 혼란은 언젠가 균형을 찾아간다는 테마를 어느정도 상정한다. 그 뿐인가, 피비 브리저스는 협업과 오마주라는 편법에서 본인만의 양식을 찾고 형식적인 재료를 한 데 모아 독보적인 사운드를 창출한다. 엔트로피의 개념마저 집어삼키는 이 모순적인 알고리즘을 감히 정의할 수 있을까.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어렴풋이 도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열성 팬'이자 '카피캣'이라 소개하던 그는 이미 엄연한 '아티스트'가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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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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