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베이비-인간

노을의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여린 색 같은 개념은 인간의 것이다. 자연은 여리지 않고 첫 발을 겨우 내딛은 자연도 역시 여리지 않다. (2021.01.29)

픽사베이강을 따라 걷다 보면 수많은 색깔을 발견한다. 해가 지고 뜰 때 하늘의 색은 정말 다채롭다. 연푸른 바탕이 점점 짙어지고 생경한 붉은 계열의 색이 등장하여 기세를 펼칠 때, 끝까지 물들인 다음 모두 검게 변해가는 때. 그 몇 분간 세상의 모든 색을 보는 느낌이다. 어린 왕자는 우울할 때마다 노을을 본다고 했다. 이후 노을은 감상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기분 상태, 예를 들면 우울이나 상심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노을이라고. 얼마 전 노을을 보고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은 개인과 인간 전체를 넘어서는 거대함에 대한 경이라고. 노을이 아니라 어떤 자연을 보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자연의 일은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고, 개인은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노을이 되지 못한 채 노을을 본다. 노을의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베이비블루라는 색깔의 이름을 보고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여린 상태를 ‘베이비’라는 수식어가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어느 해 봄, 나뭇가지 끝 갓 피어난 어린 잎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여린 색은 봄의 색이 아니다. 새로 올라온 잎은 다른 배경과 섞이지 않을 만큼 쨍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의 형광에 가까울 만큼 반짝이는 그 잎은 전혀 여리지 않았다. 여린 색 같은 개념은 인간의 것이다. 자연은 여리지 않고 첫발을 겨우 내디딘 자연도 역시 여리지 않다. 여린 것은 인간 개인뿐인가 생각했다. 

몇천 년, 몇만 년,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반복과 변주를 병행해온 자연의 일을 생각한다.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베이비’일 수 없겠구나. 자연은 무자비하다. 자연은 순간에 모든 것을 발산하라고 요구한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나는 그저 지켜볼 뿐, 나의 귀가 잘린다 해도.


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진은영,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수록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저
문학과지성사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주연(도서 MD)

수신만 해도 됩니까.

오늘의 책

법정 스님의 죽비 같은 말씀 모음집

입적 후 14년 만에 공개되는 법정 스님의 강연록. 스님이 그간 전국을 돌며 전한 말씀들을 묶어내었다. 책에 담아낸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가르침의 목소리는 고된 삶 속에서도 성찰과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전한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로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은 책.

3년 만에 찾아온 김호연 문학의 결정판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소설가의 신작. 2003년 대전 ‘돈키호테 비디오 가게’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던 아이들. 15년이 흐른 뒤, 어른이 되어 각자의 사정으로 비디오 가게를 찾는다.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모험을 행했던 돈키호테 아저씨를 찾으면서, 우정과 꿈을 되찾게 되는 힐링 소설.

투자의 본질에 집중하세요!

독립 리서치 회사 <광수네,복덕방> 이광수 대표의 신간. 어떻게 내 집을 잘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이다. 무엇이든 쉽게 성취하려는 시대. 투자의 본질에 집중한 현명한 투자법을 알려준다.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투자 이야기.

건강히 살다 편하게 맞는 죽음

인류의 꿈은 무병장수다. 현대 의학이 발전하며 그 꿈이 실현될지도 모른다.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 세계적인 장수 의학 권위자 피터 아티아가 쓴 이 책을 집집마다 소장하자. 암과 당뇨, 혈관질환에 맞설 생활 습관을 알려준다. 초고령사회 대한민국에 필요한 책.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