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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재의 네덜란드 일기] 끝나고도 지속되는 것 - 마지막 회

이제재의 네덜란드 일기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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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한 문장 안에 깃든 그의 예지적인 힘을 믿어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가 네덜란드에 있는 이상 그의 쓰기는 일단 지속될 것이었다. (2022.06.28)


2022년 6월 8일

유월이 되자 이제재는 머물고 있던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틸뷔르흐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그가 주로 자전거 산책길로 이용하던 숲길을 통과해 더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지역, 리즈호프로의 이사였다. 새 집주인은 이 일대가 원래 물이 흐르던 곳이었고 간척 사업을 통해 주택지로 재개발된 지역이라 말해주었다. 그래서인지 균일하게 정리된 도로와 블록마다 줄지어진 비슷한 색감의 집들은 정갈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이사를 한 뒤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이곳이 빛이 잘 드는 양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방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창문으로부터 먼저 느끼게 된 사실인지도 몰랐다.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그는 이사한 집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면 해가 지는 모습을 오래 바라볼 수 있다고 먼저 얘기하곤 했다. 집을 소개받을 때 집주인으로부터 서향이라는 말을 듣고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난 며칠간 지내보니 낮에도 볕이 잘 들었다. 그가 지내는 곳이 3층이었고 주변의 건물들 역시 비슷한 높이였기에 하늘로 향하는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좋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하늘 색이 바뀐다 싶으면 잠깐 몸을 일으켜 창문 앞에 서 있곤 했고 그때마다 주변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큰 공원과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곳에는 여름 나무와 꽃이 선명한 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쩐지 생기가 도는 동네였다.

괜찮은 거지?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에 몇몇 지인들은 그에게 걱정스럽다는 듯 안부를 물어보았고 그럴 때면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잠시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이전 집에서 지내는 데에 문제가 있었고 이제 이사를 했으니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에게 지낼 공간을 선뜻 내어준 한국인 부부는 친절하고 세심한 배려를 베푸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지내는 3층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이 있었고 한 방은 침실 겸 옷방으로, 다른 방은 서재 겸 작업 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침대와 책상이 분리된 공간, 그것은 그전부터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집의 조건이었다. 괜찮아, 오히려 더 좋아졌어, 하며 그는 하나하나 비슷한 답장을 보냈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조금은 난감해하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새로운 공간에서의 시작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동안의 적응 기간들은 다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미 일 년간 유효한 비자 기간 중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의 시작이었다.


2022년 6월 21일

시가 나의 종교라서…….

K시인의 말이 별다른 개연성 없이 떠오른 것은 이제재가 마스트리흐트의 광장 계단에 앉아 있을 때였다. 광장은 성 세르바티우스 성당 앞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광장 바깥으로 둥글게 퍼져있는 식당가에 모여 있었고, 그는 그들과 꽤 멀리 떨어져 눈이 가는 대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광장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곧잘 횡으로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왔구나, 하고 생각한 것은 그에게도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여행이 아니었던가? 스스로 묻고 보니 그동안은 일상을 부단히 살아보려 애를 쓰며 지냈구나 싶었다. 그가 한국에서 예상했던 삶은 아니었다. 여행이 일상으로 바뀌어 가면 여름쯤에는 많은 것들에 익숙해져 다소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그는 생각하곤 했는데 그 생각에는 허점이 있었고 이제야 그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한국에서도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여행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국에 왔으니 이것이 여행이겠거니 생각한 것은 큰 착오였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어져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구나, 애초에 여행을 하지 않았으니 계속 일상이 이어지고 삶의 문제가 같은 질문, 비슷한 관점의 대답으로 그를 찾아왔던 것이었구나. 그는 가방을 열고 수첩과 펜을 꺼내어 그가 방금 알아차린 것을 적어두었다.

가방 속에는 여분의 보조 배터리, 그의 시집, 다와다 요코의 책 『글자를 옮기는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는 곧 다와다 요코의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고 십여 분 뒤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자 막 읽고 있던 마지막 문장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동쪽 하늘에는 상처 딱지를 연상시키는 검붉은 구름이 떠 있었다. 뜯어 보고 싶을 정도로 풍성한 딱지였다.” 그는 핸드폰을 켜 나침반으로 동쪽을 찾았고 그 순간의 하늘을 영상으로 촬영해두었다. 오후 다섯 시, 그날의 마스트리흐트 하늘에는 검붉은 구름이 떠있지 않았고, 어린 동물의 가슴 털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구름이 연푸른색의 하늘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일주일 전 이 나라의 가장 오래된 도시, 마스트리흐트에 대해 지나가는 어투로 그에게 얘기해준 사람은 그의 시 선생이었던 K시인이었다. 제자인 그가 한국을 출국할 때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와 다른 나라를 헷갈려 했던 그의 선생은, 몇 달 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리는 국제 시 축제에 초청받아 곧 만나자는 안부 인사를 그에게 전해왔다. K시인이 도착한 네덜란드는 가장 맑은 여름 날씨의 네덜란드였다. K시인은 제자인 그를 로테르담에 불러 도시를 구경시켜주었고, 그는 에라스무스 다리를 선생과 함께 걸으며 이곳의 많은 것이 생각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의 K시인은 이렇게 낯선 곳의 축제에 자신이 불려오게 되고, 마침 그 시기 이곳에서 지내는 제자와 만나게 된 것을 어떤 힘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시가 나의 종교라서, 하고 시인이 얘기한 것은 그 순간이었고, 제자인 그는 시에 대해서도 종교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K시인의 삶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즉흥적이고 직감적이면서도 예지적인 시처럼 그의 선생은 삶을 여행하는 법을 알았고, 다음날 그가 그의 선생을 따라 둘러보았던 델프트의 광장, 헤이그의 바다는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순간의 감각에 따라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을 조금 배운 것 같았다.

여섯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는 몸을 일으켰고 광장에서 벗어나 마스트리흐트의 공립도서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앞의 거리가 어떤 우연의 힘으로 나타났다면 그가 보아야 할 것이 이 거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의 눈앞에 바실리카 성당의 문이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성모상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는 양초들이 여럿 타오르고 있었다. 

50센트를 동전함에 넣은 뒤 그는 새 양초의 심지에 불을 옮겨 붙였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손을 모았고 성당 밖으로 나오자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집이 시립도서관 4층, 소설책들 사이에 자리하게 된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깊이로 그의 책을 밀어 넣었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번역기로 돌려보자 양옆에 자리한 책들의 제목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여름 영화' 그리고 '인생은 서커스'라는 이름의 제목들이었다.     


2022년 6월 27일

이제재는 그의 서재방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는 네 권의 시집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방문한 브레다의 도서관에 그의 시집을 남겨두고 오려 했지만, 그곳에는 두지 않기로 결정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직감에 따른 행동이었다. 시집이 꽂혀있는 책꽂이 아래 칸 자리에는 그의 카메라 가방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직 카메라의 할부 기간이 넉넉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고개를 돌려 책상 위를 보면  그의 지갑이 보였고 그 안에는 얼마 전 끊어둔 기차 정기권과 미술관 방문 1년 권이 있었다. 옆에 있는 핸드폰을 켜 메일함을 열어본다면, 출간을 전제로 에세이집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온 메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제 곧 에세이 연재가 마무리될 것이었다. 그는 어떤 힘으로 그가 연재를 이어왔는지 알 수 없었고 , 다만 그가 오래 간직해왔던 질문을 오랜만에 다시 수첩 위로 한번 끄적여보았다. 삶이 신이라면, 하고 시작되는 질문이었다. 삶이 신이라면 삶을 믿고 쓰기를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쓰는 삶을 믿을 수 있을까. 문장들을 들여다보다 그는 그가 썼던 언젠가의 문장이 떠올렸다. 에세이를 통해 네덜란드를 경험하게 될 것 같은 예감 속에 있다는, 그런 뉘앙스의 문장이었다. 시인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한 문장 안에 깃든 그의 예지적인 힘을 믿어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가 네덜란드에 있는 이상 그의 쓰기는 일단 지속될 것이었다.




글라스드 아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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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재 저
아침달
글자를 옮기는 사람
글자를 옮기는 사람
다와다 요코 저 | 유라주 역
workroom(워크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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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제재(시인)

1993년 3월 4일생. 생년월일이 같은 아이를 두 번 만난 적 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글라스드 아이즈』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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