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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육아 휴직을 돌아보다 - 마지막 화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 8화(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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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제주의 휴식을 통해 나는 가능하면 오래 일하고 싶어졌다. 같은 맥락으로 돌아갈 회사가 있고, 그곳에서 여전히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얼마만큼 안도했다. (2023.07.10)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을 연재합니다.
6개월 육아 휴직을 냈지만, 조금 일찍 복귀한  
 전종환 아나운서가 일상과 삶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육아 휴직을 중단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아나운서 2팀장은 회사로 돌아온 내가 새롭게 맡게 된 업무였다. 2팀장의 주요 업무는 뉴스와 스포츠 방송에 투입되는 아나운서를 정하고 다른 부서와 협의하는 일이다. 나아가 부서에 소속된 열일곱 명의 아나운서가 현재 맡고 있는 일과 그에 따른 마음을 살피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업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송을 많이 하면 많이 해서 힘들고 적게 하면 적게 해서 힘든 게 아나운서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최선을 찾아야만 할 텐데, 너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다르니, 가능한 많은 이의 최선이 모이는 곳을 고민하고 나아가는 게 이 일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최선이라 말했지만 아마도 최선이란 단어는 팀장으로 일하게 된 나의 욕심일 것이고 다만 이 공간에서 일하는 마음이 지옥처럼 여겨지는 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만큼은 절실하다 하겠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일곱 살 된 아들 범민으로 인해 나의 육아휴직은 시작됐다. 영어 어학원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이 범민에게 큰 고통이었다고 나와 아내는 판단했고, 아예 판을 바꿔 새로운 경험을 전해주고 싶었다. 계획했던 반년의 시간을 모두 채우지는 못했지만, 제주의 시간은 범민에게 도움이 됐다. 과거 영어 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범민은 늘 지쳐 있었다. 이미 하루에 쓸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돌아왔기에 밖에 나가 놀기를 꺼렸고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유튜브 영상 시청에 할애했다. '영어 어학원 – 유튜브 – 학습지 – 유튜브 – 취침'으로 이어지는 범민의 일상은 단순했고 메말라 있었다. 삶의 공간을 제주로 바꾸니 달랐다. 

제주에는 유튜브가 안 나온다는 아내의 선한 거짓말을 범민은 믿었고, 별달리 할 게 없는 제주에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했다. 범민은 멋진 야외 경기장이 있는 축구 클럽에서 신나게 공을 찼고, 2시간 넘는 숲길을 쉬지 않고 걸었으며, 바다에서는 거친 파도에게 싸움을 걸며 긴 시간 놀았다. 노는 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 아니란 걸 잘 알면서도 도시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도통 보지 못했던 아내와 나는 잘 노는 범민의 모습에 감동했다. 모름지기 아이는 잘 뛰어 놀아야 건강하고 아름답다는 걸 우리는 온전히 받아들였다. 반면 직접 범민의 공부를 가르쳐 보겠다던 계획은 실패로 마무리됐다. 내가 맡았던 영어만 놓고 보자면 범민에게 어떤 수준의 영어 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해 무지했고, 아빠를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기에 범민에게 나는 너무 만만했다. 결과적으로 제주의 시간은 공부보다는 놀이로 충만했다.

가까운 친구와 동료, 가족들은 기쁜 마음으로 제주를 방문했고 우리는 서울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밀도 높은 시간들을 함께 했다. 제주의 숲길을 걸으며 또 달과 별을 바라보며 나눈 대화는 도시의 그것보다 많이 깊고 정겨웠다. 먼 길을 방문해 준 이들 덕분에 큰맘 먹고 지불한 반년 치 제주 집세는 아깝지 않았고 훗날 여유가 생긴다면 제주에 집을 짓고 오며 가며 살고 싶다는 꿈도 꾸게 됐다. 막연하기만 했던 은퇴 뒤의 삶을 미리 경험해 본 것은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내 은퇴계획은 단순했다. 첫째, 일단 도시를 떠난다. 둘째, 자연 안에서 논다.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나의 노년이 행복하리란 생각에 나는 어떠한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시를 떠난 기쁨은 공항에서 서귀포까지 이동하는 한 시간 거리에서 느낄 법한 감정이었을 뿐, 떠났다는 상태가 긴 시간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는 못했다. 떠났기 때문에 아이가 달라졌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내면에서 느껴지는 행복이 도시보다 월등히 높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주로 떠날 무렵 나는 일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언제나 잠이 부족한 상태로 출근해야 했던 아침 뉴스를 2년간 진행했고 그 뒤로도 줄곧 아침 방송을 맡았으니, 무려 5년 넘게 새벽 알람에 의지해 하루를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일이란 게 얼마만큼 고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내가 일을 하고 있고, 일로 인해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있으며, 일을 통해 이 사회의 유의미한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감각은 무척이나 소중하단 걸 나는 제주의 생활을 통해 알게 됐다. 제주에는 종종 무서울 만큼 많은 비가 내리곤 했는데, 그런 비가 사나흘 이어져 아무것도 못 하고 집안에 갇혀 뒹굴 거리고 있노라면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왜 여기에 와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샘솟곤 했다. 해가 뜨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편하던, 조금 고되던, 정말 힘들던,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제주의 휴식을 통해 나는 가능하면 오래 일하고 싶어졌다. 같은 맥락으로 돌아갈 회사가 있고, 그곳에서 여전히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얼마만큼 안도했다. 

2023년 9월부터 다시 시작될 줄 알았던 우리의 서울 생활은 내가 다니는 회사 사정으로 인해 조금 앞당겨져 2023년 6월부터 재개됐다. 나는 회사로 돌아갔고, 아내는 서울의 일에 집중하게 됐으며, 범민은 유치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내는 영어 학습을 위주로 하는 영어 어학원이 아닌 정부 보조금이 지급되는 일반 유치원에 범민을 보내기로 했다. 어른들도 잘 모르는 스무 개의 영단어를 매일 외워야만 하는 학습의 세계로 범민을 밀어 넣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우리 부부에게는 쌓여 있었다. 

범민의 첫 등원 전날. 우리는 일찍 저녁을 먹은 뒤 평소보다 빨리 침대에 누웠다. 내일이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된다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범민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뒤척이던 범민이 물었다. 

"엄마, 나 유치원에서 잘할 수 있을까?"

아내는 웃으며 답했다. 

"그럼. 범민이는 이제 어딜 가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믿어."

그제야 범민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잠들 수 있었다. 꿈같은 제주의 시간을 뒤로 하고 범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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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전종환(아나운서)

MBC 아나운서.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을 썼다.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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