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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북커버러버] 출판사들이 호퍼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11화 - 『호퍼 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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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떠오른 추상적인 형상을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서 길고 긴 글을 쓰고, 어떤 사람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2023.09. 21)


격주 목요일, 소설가 김중혁이 좋아하는 북커버를 소개하는 칼럼
'김중혁의 북커버러버'를 연재합니다.



『나의 명화 읽기』 책표지

외국에 나가면 꼭 하는 두 가지 일이 있어. 음반 가게 들르기, 그리고 미술관 가기. 음반 가게 갈 일은 거의 없어졌지. 아니, 가고 싶어도 음반 가게 자체가 거의 사라져서 갈 수가 없지. 미술관 가는 것도 조금씩 지쳐가. 체력적인 문제야. 예전에는 한 작품이라도 더 보려고 애를 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마음으로 포기하게 됐지.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책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미술관 체력이 점점 떨어질 때쯤 이런 글을 읽었거든.

“빠른 걸음으로 그림을 둘러보자. 예를 들면 미술관이나 전시회 등을 맹렬한 속도로 둘러보는 것이다. 20~30분 만에. …… (중략) …… 이렇게 빠른 걸음으로 보고 나니 그동안 의리와 이론으로 보아 왔던 그림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좋다, 맛있다, 라고 느껴지는 진짜 그림 앞에서는 순간 멈추었다. 이것은 나의 속마음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속보 감상’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눈도 팽팽하게 긴장하고, 감각도 춤을 춘다. 모든 그림을 동등한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좋은 작품을 빠르게 간파할 수 있다. 빈둥거리며 볼 때는 이런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나의 명화 읽기』 아카세가와 겐페이, 장민주 옮김, 눌와) 

처음으로 속보 감상을 했을 때는 그림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곧 마음이 편안해졌어. 어떤 느낌이냐면,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재미 없는 친구들로부터 해방된 느낌이랄까, 명절 때마다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 고향에 내려가다가 처음으로 서울에 남아 극장에서 영화 감상을 하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속이 시원했어. 모든 그림에 공평한 시간을 주기보다는 내 마음에 드는 그림에 시간을 ‘몰빵’하는 거지. 시간은 늘 부족하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하는데 시간을 쏟아붓자는 말이야.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 1층에는 모네의 작품 ‘수련’이 있는데, 나는 4시간 동안 이 작품이랑 논 적도 있어. 그 시간에 다른 그림을 보러 가고 싶기도 했는데,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지. 속보 감상이란 ‘선택과 집중 감상’이란 말이기도 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벽에다 붙여두는 것도 ‘선택과 집중 감상’ 방식이야. 모네와 반 고흐의 원화를 걸어두면 좋겠지만, 그건 음…… 나중에 하기로 하고, 좋아하는 한국 작가의 그림이나 포스터 북에서 잘라낸 그림이나 좋아하는 책의 페이지를 찢어서 벽에 붙여두면 기분이 좋아져. 그림들이 나를 둘러싸면서 마음이 포근해져. 실제 미술관에서 보는 것만큼의 감동은 없지만 그림 작품이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라서 오히려 좋은 구석도 있어. 책 표지에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싣는 것도 다 그런 이유겠지. 

한국의 책 표지에 자주 사용되는 그림은 따로 있어. 한때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가 출판사들이 사랑하는 화가였다면, 요즘에는 ‘에드워드 호퍼’가 아닌가 싶어. 호퍼의 그림이 표지에 실리면 책 판매가 좋아진다는 소문도 있다던데, 많은 사람들이 호퍼를 좋아하긴 하나 봐. 나도 좋아해. 호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고, 호퍼가 내 마음속의 그림자를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게 만들어. 책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잖아.




출판사들이 호퍼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책을 보는 사람들이 유난히 자주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민음사에서 나온 『피츠제럴드 단편선 1』 표지에 실린 작품에는 책을 읽으면서 웃고 있는 여성이 등장해. 책의 형태를 보면 평범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상품 카탈로그일지도 모르고, ‘아코디언 북’처럼 모든 페이지가 접힌 채 연결된 것인지도 모르겠어. 어쨌거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환하게 웃기는 힘들어. 출판사들이 좋아할 그림이지.






『피츠제럴드 단편선 2』 표지에 실린 작품은 호퍼의 <뉴욕의 방>이야. 여자는 무료한 듯 피아노를 만지작거리고, 남자는 신문을 보고 있어. 1931년에 그린 <호텔방>이라는 작품 속 여자는 기차 시간표를 보고 있어. 1952년 작 <철로변 호텔> 속 여자 역시 책을 읽고 있어. 남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고.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맞추는 경우가 거의 없어. 뭔가 내려다보고 있거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 책을 읽을 때의 우리 마음도 비슷하지 않아? 몰두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어. 여러분, 책을 읽으세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요. 출판사들이 호퍼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호퍼가 책 읽는 사람을 자주 그린 건 본인이 책을 좋아했기 때문일 거야. 가장 유명한 작품인 <나이트호크>는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살인자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건데, 헤밍웨이 단편선집에 호퍼의 <나이트 호크>를 표지로 쓰면 완전 찰떡 아니겠어? 소설 『살인자들』은 이렇게 시작하잖아.

“헨리스 간이식당의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카운터에 앉았다.”




 『호퍼 A-Z』는 알파벳 키워드에 맞춰 호퍼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책인데, 인쇄가 좋아서 그림 보는 맛이 있어. 어릴 때 낙서처럼 그렸던 사람 눈의 해부학적 단면도, 스스로 ‘끔찍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전쟁 포스터, 호퍼의 대표작인 <웨스턴 모텔>, <정오>, <주유소> 등 다양한 작품이 해설과 함께 들어 있어. 그중에서 Z 항목을 좋아해. 영점(Zero point)에 대한 이야기야. 

그는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회화는 일종의 언어적 영점에서, 아무 할 말이 없을 때 시작된다는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떠오른 추상적인 형상을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서 길고 긴 글을 쓰고, 어떤 사람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북 커버는 그런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야. 그러니 북 커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의 명화 읽기
나의 명화 읽기
아카세가와 겐페이 저 | 장민주 역
눌와
피츠제럴드 단편선 1
피츠제럴드 단편선 1
스콧 피츠제럴드 저 | 김욱동 역
민음사
피츠제럴드 단편선 2
피츠제럴드 단편선 2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 한은경 역
민음사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 이종인 역
문예출판사
호퍼 A-Z
호퍼 A-Z
얼프 퀴스터 저 | 박상미 역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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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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