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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의 옛 담 너머] 바다표범의 뼈로 만든 할머니의 페니스

현호정 칼럼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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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있든 여자로 있든 사람이 혼자 살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2024.04.23)


현호정 소설가가 신화, 설화, 전설, 역사 등 다양한 옛이야기를 색다른 관점에서 읽으며, 현대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을 전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손녀와 할머니가 결혼하는 이야기를 나는 작년에 처음 접했다. 이 문장을 읽은 당신은 높은 확률로 지금 처음 접했을 거고, 그 생각을 하니 웃게 된다. 물론 옛이야기에는 근친 관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주인공은 대개 남매인데, 그 둘만 빼고 인류가 대홍수로 멸종했다든지 하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나도 ‘하기 싫었겠다’며 유감스러워할 뿐 딱히 질색한 적 없었더랬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분야를 잘 아는 친구가 절판된 책을 스캔까지 해 보내준 이야기를 읽고선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기 싫었겠다’가 아니라 ‘하기 싫다’고 생각해 버린 거였다.

옛날에 투글리크라는 할머니와 손녀딸 쿠자피크를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큰 고래를 사냥하러 나갔다. 할머니와 손녀는 조금 배가 고팠지만 자기들의 식량을 어떻게 사냥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투글리크 할머니는 마법의 주문을 조금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을 무아지경에 빠져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할머니는 남자로 변했다. 할머니는 바다표범의 뼈로 만든 페니스를, 기름 덩어리로 만든 고환을 갖게 되었다. 할머니의 질은 썰매가 되었다. 그러고는 손녀딸에게 말했다.

“이제 나는 피오르까지 나가 우리가 먹을 식량을 구해 올 수 있단다.”

(……)

“너는 아이를 가진 것 같구나. 남편은 누구지?”

“저희 할머니가 제 남편이에요.”

“그러니? 나는 네게 더 좋은 남편이 될 사람을 알고 있단다…….”

이윽고 썰매 위에 잡은 고래를 갖고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왔다.

“쿠자피크! 쿠자피크!”

할머니가 소리쳐 불렀지만 쿠자피크는 없었다. 손녀는 모든 소지품을 챙겨 새로운 남편과 마을을 떠났던 것이다.

투글리크 할머니는 더는 남자로 있어야 할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남자로 있든 여자로 있든 사람이 혼자 살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마법의 주문을 외워 썰매 대신 질을 가진 쪼그랑 노파로 되돌아왔다.1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니 머릿속 혼란의 한가운데서 『두 늙은 여자』2 가 불쑥 솟아올랐다.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부제로 단 이 소설은 알래스카 아타바스칸족 작가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다. 오랜 세월 모계 전승되어 왔다는 이 이야기에서 부족민들은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두 늙은 여인을 눈보라 치는 벌판에 버리고 떠난다. 그 뒤로 묘하게 ‘실제로 이렇게 버려졌을 때 도움이 되는 여성 생존 매뉴얼’과 ‘그냥 문학’의 경계를 타고 가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는 가장 희망적인 부분에서조차 공포와 절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들이 이루는 성취의 모든 빛이 그들의 영웅적 예외성을 거치며 수많은 그림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의 옛이야기마다 할머니들은 띄엄띄엄 버려져 있지만, 이렇게 생존을 도모하는 유형의 할머니는 드물다. ‘두 늙은 여자’는 서로를 방패 삼아 전사로 거듭났지만, 다른 할머니들은 주로 홀로 버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로 있든 여자로 있든 사람이 혼자 살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손녀가 떠난 뒤 혼자 남은 투글리크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말을 『두 늙은 여자』 속 한 늙은 여자의 단단한 선언, “내 마음은 우리가 여기서 쉬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해”와 겹쳐 놓으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런 속엣말이 드러난다. ‘내 마음이 우리의 전진을 원하듯 나의 전진도 원할까.’

이 속엣말을 통해 나는 앞서 말한 두 이야기, 「투글리크와 손녀딸」과 『두 늙은 여자』가 실은 하나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말과 말을 겹치듯 이야기와 이야기를 겹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겹친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한 할머니가 부족으로부터 버려져 벌판에서 죽어간다.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환상을 본다. 바다표범의 뼈로 페니스를 만들어 사나이가 되는 꿈.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므로 버려지지 않는 꿈.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꿈을…….’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꾼 비슷한 맥락의 꿈에서 소녀는 난로를 쬐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벌판의 할머니는 꿈속에서 자기 몸으로 썰매로 만들어 고래를 사냥하고 손녀와 아기를 배불리 먹인다. 할머니가 꿈에서마저 하고 싶어 했던 게 일이라는 게, 그러니까 또 열심히 일해 다른 사람들을 먹이는 자기를 꿈꿔보다 죽었다는 게, 두 이야기 사이의 교각이 된 내 마음을 자꾸 무너뜨린다. 할머니들은 이미 너무 많이 일했다. 과거가 무효의 시간이라면 현재는 대체 무엇으로 유효해지는가?


1  북극 이뉴잇족, 「투글리크와 손녀딸」. 앤젤라 카터 지음, 서미석 옮김, 코리나 사굿 그림, 『여자는 힘이 세다 – 안젤라 카터의 세계 여성 동화집』, 민음사, 2009에 수록. 현재 절판. 

2  벨마 윌리스 지음, 김남주 옮김, 짐 그랜트 그림, 『두 늙은 여자』, 이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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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호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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