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귀화 한국인
박노자 교수(이하 직함 생략)의 책은 두 갈래다. 사회비평 에세이와 한국 근대사의 발견이다. 여기에 허동현 교수와의 역사 논쟁이 더해진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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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이하 직함 생략)의 책은 두 갈래다. 사회비평 에세이와 한국 근대사의 발견이다. 여기에 허동현 교수와의 역사 논쟁이 더해진다. 사회비평 에세이로는 박노자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001)을 위시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신문사, 2002),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신문사, 2003), 『당신들의 대한민국 2』(한겨레출판, 2006)가 있다.

사회비평 에세이도 둘로 나뉘는데 『당신들의 대한민국 1, 2』가 우리 사회 내부에 초점을 맞춘다면, ‘북유럽 사회 탐험’과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를 주제로 하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하얀 가면의 제국』은 나라 바깥의 사정에 비춰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다.

한국 근대사의 발견은 박노자의 매우 뛰어난 우리말 구사력과 더불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특장과 관련이 있다. 『나를 배반한 역사』(인물과사상사, 2003)에서 박노자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노자의 한국 근대사 발견은 ‘구한말’, ‘개화기’, ‘애국계몽기’ 등으로 불리는 1900년 전후에서 혜안을 발휘한다. 『나를 배반한 역사』의 속편에 해당하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인물과사상사, 2005)는 전편과 함께 고품격 대중역사서로 볼 수 있다. 『우승열패의 신화』(한겨레신문사, 2005)는 학술서의 성격이 짙다.

박노자-허동현 논쟁은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생산적인 논쟁으로 학계와 독서계에 두루 화제를 모았다. 한국 근?현대 100년을 둘러싼 두 사람의 논쟁은 『우리 역사 최전선』(푸른역사, 2003)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푸른역사, 2005)에 담겨 있다. 역사논쟁의 속편은 박노자와 허동현을 ‘국제적 진보주의자’와 ‘민족주의적 시민주의자’로 맞댄다.

박노자의 근간 『당신들의 대한민국 2』는 그의 명성에 값한다. 성리학적 금욕주의와 개신교적 순결주의가 뒤섞인 도덕주의의 허상을 드러낸 것부터 그렇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들먹이는 ‘도덕’의 실제 모습은 위선과 강압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그런 가치관을 사회에 강요하려 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은 “예전 사회의 선례를 이용하여 도덕군자의 탈을 쓰는 것이다.” 그래야 “‘아랫사람’의 인격을 짓밟음으로써 그 신분적 위치를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학생을 성추행한 교수가 기껏해야 몇 개월 정직 처분을 받아도 ‘야한 글’을 쓴 교수는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 역설이 생겨난 것” 또한 억압적 신분제의 잔영이라는 것이다.

나는 박노자 덕분에 ‘호국불교’가 형용 모순임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진보적 교수’가 형용 모순적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교수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아서다. 우리가 박노자의 우리말 능력에 감탄하는 것은 단지 그의 어휘력과 표현력이 풍부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적확한 한국어 구사력에 놀란다. 소위 ‘이라크 재건과 민주화’를 “이라크 자원의 약탈과 재식민화”로 교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표현이 어이없다는 지적은 통렬하기 짝이 없다. 신종 용어 ‘좌파 신자유주의’보다는 덜 부적절하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역시 실체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곰을 ‘밀림의 주인’으로 부르면 참 멋지게 들리듯이 3공과 5공 출신의 극우 관료군과 재벌가들을 ‘산업화 세력’으로, 자신의 운동 경력을 팔아 우파 진영에 편승한 중산계급, 귀족 대학 출신의 정객들을 ‘민주화 세력’으로 부르면 참 멋져 보이는 모양이다.”

박노자 책의 애독자로서 나는 그의 시각에 대체로 동의하고, 그의 관점을 존중한다. 다만, 특정 사안에 대해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데 군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견해가 그렇다. 또한 이것은 논의의 결을 세밀하게 따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칫 사소해 보이는 세부사항의 오류나 무리한 일반화로 인해 박노자가 펼친 논지의 타당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이 산발적으로나마 발견되는 것은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문헌 자료에 의존하는 경우보다는 박노자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일반화할 때 무리수를 두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박노자 교수가 군 복무의 폐해를 지적한 대목은 무리한 일반화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학교 교수로서 내가 느낀 것은, 군복무가 학생들의 학습능력과 학습효과를 가차없이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학생은 특전사 복무 이후에 신경박약증, 악몽, 손떨림, 대인관계 기피 등 구타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외국어 공부를 아예 중단하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군대에 갔다 온 남학생들은 대부분 교수를 공포의 대상인 ‘장교’들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여 교수와 접촉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최소화하려 한다.”

군복무가 학습능력과 학습효과를 저하한다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려우나, 이른바 ‘예비역’이 교수와의 접촉을 꺼리는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지며 선입견의 산물로 보인다. 학생 다수는 군에 가기 전, 초중고교에서 이미 ‘스승’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적어도 내게는 초중고교에서 만난 선생님의 대부분이 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가 대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의 초중고교에서의 학교생활이 다들 윤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 쓰는 자에게 필화는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당신들의 대한민국 2』를 읽으며 박노자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반한단체인 양 묘사한 그의 <한겨레> 칼럼이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한 모양이다. 이 칼럼은 신문 지면에서 읽은 바 있는데 박노자의 칼럼을 접하기 전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겪는 고초는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중앙아시아 출신 귀화인의 전언을 통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아무튼 고소 취하의 명목이 된 박노자 사과문의 내용이 짠하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관련한 박노자의 의견을 전폭 지지한다. 반면, 민족주의와 폭력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그의 자세를 모두 수용하진 않는다. 그의 비폭력 노선은 근본주의 성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도 해롭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모든 근본주의는 악하다는 명제 또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들의 대한민국 2』 ‘서문’에서 국가보안법과 혁명을 언급한 대목은, 사태 파악이 분명하고 논지가 적절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박노자의 비폭력 평화주의와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한국 지배계급에게 ‘이념적 타자를 때려잡는 법’이 여전히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의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할 때쯤, 결코 무뎌지지 않는 한국 지배자들의 ‘전가의 보도’ 국보법은 그 효력을 만천하에 보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혁명을 언급한 구절이다. “혁명이란 모든 객관적인 조건들이 두루 성숙되고 특별한 대내외적 계기가 주어질 때만 일어난다. 그런데 그꾷한 일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준비 작업들이 필요하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의식의 준비’다.” 혁명이 ‘의식화’에서 출발하지만, 혁명은 끝내 피를 요구하지 않던가?

박노자는 인터뷰에 잘 응하는 저자다.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한겨레신문사, 2005)에 실린 인터뷰는 그 중 하나다. 강연에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어떤 질문자가 철저한 이상주의자와 철저한 현실주의자 친구 사이에 끼인 자기 신세의 고달픔을 호소한 데 대한 박노자의 답변이 흥미롭다.

“제 동창 한 명이 모스크바에 있는 삼성 지사(支社)에 취직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1991년에 고려대학교에서 유학도 한 친구인데, 이건희 회장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을 때는 저를 만나줄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얼마 안 있다가 보스하고 트러블이 있어서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요. 제한적이나마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그런 곳에 계신 분은 아마 만나고 싶어도 만날 시간이 없을 텐데 차라리 수배당한 친구가 더 만나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 인터뷰는 박노자가 필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시다시피 박노자는 귀화인이다. 하지만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본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본관을 창본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러시아어로 ‘발로자’는 블라디미르의 애칭이다. 송영 소설집 『발로자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2003)의 표제작은 박노자를 모델로 한다.

작중인물과 실존모델을 하나로 여기는 촌스러운 소설 독법을 무릅쓴다면, 박노자는 “그가 나고 자란 그 도시에 대해 다소 지나칠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폭력에 대한 자기의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여기서 그 도시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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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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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박노자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난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귀화한 것은 스스로 한국사회에서 국적, 또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리트머스지가 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노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날카로운 논리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세계사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 속에서 치열하게 인문학적 성찰의 삶을 살아온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보다는 러시아를, 또 세계를 잘 아는 한국인에 가까운 그는 한국 사회를 그 주춧돌부터 다시 살펴본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믿고 살던 권위주의의 서까래며 집단이기주의의 기둥이 그 앞에서는 대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폐품이 되고 만다. 이제까지 나왔던 많은 한국인 비평, 비판보다 서너 길은 더 깊은 통찰이 있고 무엇보다 저자가 한국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든든하다. 두 번째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는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의 이모 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상하의 질서와 복종을 강조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문화와 달리, 다양성의 존중과 소박한 삶을 생활의 주요 철칙으로 여기고 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박노자는 북유럽 사회에 비추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외견상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제3세계에 대한 차별, 인종주의와 극우 민족주의의 발호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면서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그들보다 모순과 부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에서 보여주는 한국 사회는 '동양을 타자화하여 비화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인식'과 서양을 정형화·범주화하는 '서양/비서양'식의 이분법적 인식 속에 좀 더 원어에 가까운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의 혀에 가위를 들이대는 부모들이나 '영어공용화'가 식자층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의되는 사회는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곳이다. 또한, 후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미국과 유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모범으로 삼을만한 미래로 여기는 자세에 대해서도 '맹목적'이라 일갈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 시선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 시선을 만들어낸 곳이 어디인지, 우리 안에 있는 서구제국주의의 시각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근작으로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후퇴하는 민주주의』, 『씩씩한 남자 만들기』『리얼 진보』(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