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한 시기를 산 두 여성의 가혹한 운명을 담은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출간한 이금이 작가는 2020년, 일제 초기 하와이로 떠난 이민 1세대 여성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출간합니다. 그리고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에 사할린 한인들의 아픈 역사를 ‘단옥’이라는 강인한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슬픔의 틈새』를 출간하죠. 그렇게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이 완성됩니다.
체호프가 ‘슬픈 틈새의 땅’이라고 불렀다던 사할린. 일제에 의해 그곳으로 강제 징용되어 굴곡진 삶을 산 한인들은 그야말로 “경계인이자 소수자로서 틈새의 삶을 살았”습니다. 해방 후에도 고국은 이들을 방치했죠. 무국적자라는 아픈 이름은 사할린 사람들을 혼란한 운명에 내던졌는데요. 그럼에도 이 강인한 사람들은 삶을 살았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들은 이렇듯 늘 슬픔과 고통의 틈새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313쪽)는 사실을 이금이 작가는 『슬픔의 틈새』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가 이날 미래로 걸어 나가는 이야기인 이유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마음
작년 3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는 책임지고 세상에 꺼내 놓아야 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던 게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슬픔의 틈새』를 읽고 이번에도 강한 책임감으로 이야기를 마치셨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책임감이란 의무감이나 부담감이기보다, 제게는 굉장히 즐거운 책임감이에요. 과정은 힘들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혼자만 알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서 여러 독자 분들과 같이 읽는다고 생각하면 무척 즐겁거든요. 예를 들어 손님 초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전에 준비하는 마음도 굉장히 즐겁잖아요. 준비가 힘은 들겠지만 말이에요. 저도 그런 느낌인 거죠. 또 제가 작년에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요. 차기작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늘 이 이야기 계획을 얘기했어요. 때문에 약속을 지켰다는 안도감도 있습니다.
『슬픔의 틈새』 출간일이 정확히 8월 15일이에요. 때마침 올해가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죠. 시기를 맞추기 위한 계획이 있던 걸까요?
예정대로라면 작년에 책이 나왔어야 해요.(웃음) 여러 일정 때문에 늦어진 것인데요. 어차피 올해 출간이 된다면 광복 80주년을 넘기지는 말자고 생각했어요. 출판사에서도 열심히 해주시고, 모든 분들과 호흡이 잘 맞은 덕분에 일정을 맞출 수 있게 됐습니다. 최고의 순간에 『슬픔의 틈새』를 세상에 낼 수 있게 되어서 더 좋아요. 덕분에 80주년 광복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쓴 덕분에 광복 80주년을 맞는 작가님의 마음이 더욱 남다르실 것 같아요.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하면 해방된 날 정도로 생각하고, 점점 공휴일로만 인식하게 되잖아요. 사실은 저 역시 그랬어요. 만약 이 책을 내지 않았다면 그저 벌써 80주년이구나, 하고 넘어갔을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슬픔의 틈새』를 썼기 때문에 너무 달라요. 이 작품에서 8월 15일이라는 날의 의미가 참 이중적이잖아요. 조선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날이 진정한 해방의 날이었다면 사할린에 있던 분들에게 그날은 오랜 기간 단절과 고립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날짜이기도 하고요. 후에 영주귀국이 이야기될 때는 8월 15일을 기점으로 동포 1세대와 2세대를 나누기 때문에 너무 아픈 날짜이기도 해요. 그런 이야기를 써서 그런지 올해 광복절은 정말 남다르게 느껴져요. 앞으로의 광복절도 저에게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올 테고요.
읽는 내내 너무 몰랐다는 생각을 했어요. 『슬픔의 틈새』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 많았는데요. 그래서인지 1940년대부터 2025년 현재까지의 시간을 지나온 사할린 땅의 한인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내기로 결심한 데에 어떤 마음이 있으셨는지 무척 듣고 싶었습니다.
2016년에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출간했어요. 작가는 대개 작품을 쓰고 나면 인물들을 가슴에서 떠나보내는데요. 이상하게 ‘태술’이라는 인물이 계속 궁금했어요. 이야기가 주인공 ‘수남’과 ‘채령’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태술이는 후반부에서 죽는 걸로 잠깐 등장을 하거든요. 그런데 계속해서 태술이가 어떻게 살다가 죽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마음 때문에 언젠가는 태술이의 이야기를 써야겠다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 2018년, 동료 작가들과 사할린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였는데요. 실은 태술이가 죽지 않고 사할린에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확 왔어요. 그순간 태술이가 사할린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보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사할린이 먼저 온 게 아니라 태술이 먼저 있었던 거군요.
그런 셈이에요. 사할린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태술이를 생각했고요. 실제로 여행하는 동안 징용으로 끌려와서 사할린에서 평생 살아오신 김윤덕 할아버지를 만나 뵈었어요. 그해 가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도 한국에서는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여러 동포 분들과 동포 2세대인 여행 가이드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사할린 한인을 둘러싼 역사적인 장소들을 탐방하면서 태술이를 통해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사할린 한인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보면서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죠. 이중 징용을 비롯해 그분들이 겪은 일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나 운명이 가혹할 수 있을까 싶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분들의 가혹한 삶을 그려서 잘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하지만 자료 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단순히 과거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태술에서 이야기 구상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요. 『슬픔의 틈새』는 단옥이라는 여성의 이야기예요. 이렇게 초점 인물이 바뀌는 과정에는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태술이지만요. 태술이에 대한 의무감과 미련이 걸림돌이 되어서 소설이 막히기까지 했어요. 또 점점 뒤에 찾아온 단옥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어요. 사할린에서 동포 할머니들도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어렸을 때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오래 가슴에 남았거든요. 하지만 단옥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태술이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있어서요. 이 이야기에서 태술의 장례를 치러주자고 생각했어요.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에서 태술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지 않았으니 그 이야기를 해주자고요. 돌아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뻔했어요. 이야기에도 저마다의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긴 시간을 다루고 있고, 역사적인 사실을 촘촘하게 담은 이야기인데요. 취재가 어렵진 않으셨어요?
취재나 사전 작업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저는 창작의 여러 과정 중 구상할 때가 제일 즐거워요. 마음껏 상상해도 되니까요. 그래서 자료 조사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데요. 자료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은 좀 아쉬웠어요.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은 아주 상세한 부분들이거든요. 굵직한 역사적 사실보다 그때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옷은 어떤 형태로 입었는지 같은 정보가 필요한데요. 의외로 많지가 않아서 힘들었어요.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다양한 자료들 찾아보면서 상상하는 즐거움이 컸어요.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자료가 소설에 쓰이지 못할 때도 있잖아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버려진 것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쓸 때 유혹을 많이 받아요. 내가 공부해서 얻은 것들을 이야기에 넣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하지만 내가 쓰는 건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에 필요한 만큼만 자료를 활용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이르곤 해요. 지금도 저는 여기에 자료 정보가 좀 많지 않나, 생각을 하는데요. 기자님은 어떠셨어요?
제가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요. 일제시대 조선이라든지 그밖의 근현대사에 비해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슬픔의 틈새』가 너무 좋은 입구가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역사적인 사실을 거칠게 말하는 느낌이 전혀 없고, 단옥이라는 생생한 한 사람이 지나온 순간들을 상상하면서 함께 아파할 수 있었어요.
맞아요. 필요한 만큼만 자료를 담되 말씀하신 것처럼 사할린이 잘 알려진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알려야 하는 사실이 분명히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썼던 원고를 보면 설명이 더 담겨 있기도 해요.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많이 덜어내기도 했고요. 쓰면서 독자 분들이 지루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설령 잘 아는 역사라 해도 그 안에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긴 어려워요. 그래서 역사책을 읽는 것과 소설을 읽는 건 정말 다른 것 같고, 소설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에 대해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역사는 사실을 말해주죠. 한편 소설은 그 사실 속, 행간에 숨어 있는 진실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 역시 틈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역사적 사실은 사할린 한인들을 동포 1세대, 2세대 등의 카테고리에 넣어 그분들이 겪은 일을 기술하죠. 하지만 소설은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개인적 고유성이나 개별성이 담긴 서사를 만들어 주는 작업이거든요. 가령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대할 때 대의적인 분노는 일지만 한 개인의 삶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유관순 열사 한 개인을 다룬 영화를 보면 다르죠. 아직 어린 소녀였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감정이 생기잖아요. 저는 소설이 그런 의미를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유로 독자 분들이 역사서도 물론 기본적으로 읽어야겠지만 단지 역사로만, 공부를 위해서만, 나와는 먼 이야기로만 그 시간을 대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소설도 함께 봐주셨으면 해요. 소설로 역사적 사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한 인간, 개개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보다 확실하게 그들의 희노애락을, 그들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작가님은 인물이 살아있는 한 개인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많이 신경 쓰고 계신 것 같거든요. 『슬픔의 틈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단순하게 피해자이기만 하지 않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욕망하고 질투하고 자만하기도 해요.
제가 가장 노력하는 부분이 바로 인물을 입체적으로, 다면적으로 그리는 것이에요. 일제강점기 배경으로 소설을 쓰다 보면 자칫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처럼 인물을 흑백으로 나눌 수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살아갔어요. “사택촌의 몇 안 되는 노인들은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나라가 있으나 없으나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했다.”(84쪽)는 문장도 썼는데요. 일상에서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못 느끼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인물들의 감정이 중요해요. 한 인간으로서 내가 겪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투영하려고 하죠. 감정을 읽으면 ‘인간이 그렇지, 나도 그래’ 생각하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일단 자기부터 생각해요. 그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본능이에요. 그런 면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비중 있는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그래야 이야기 전체에 생동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단옥은 ENFP일 거예요
표지의 그림이 이야기를 꽉 안아주는 느낌이에요. 특히 단옥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좋았는데요. 단옥은 삶을 개척하는 인물이고, 표지에서 분명히 말하듯 읽고 쓰는 인물이에요. 단옥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던 작가님의 마음을 들려주세요.
읽고 쓴다는 것은 기록한다는 것이죠. 저는 기록하는 사람들은 늘 사유하고 반성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단옥은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읽고 쓰는 삶을 살아요.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사할린은 소련에 속하게 되는데요. 그런 사회에서 우리말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려면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체제에 순응하며 살다간 쉽게 잊어버리게 마련이기에 단옥을 쓰는 사람으로 설정했죠. 단옥이는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 고향의 가족들에게 자신들이 사할린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고 싶어 글을 써요. 어떤 대리자가 나서서 이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니고, 이들 스스로 기록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한편 단옥의 일기가 책으로 묶였다는 설정을 한 것은 제가 한인이민사박물관에서 펴낸 ‘백옥빈 일기’를 본 덕분이에요. 그분은 일제강점기는 아니고, 해방 후에 브라질로 이민을 가셨는데요. 월간 <사상계>에 일기 형식으로 연재를 하셨대요. 연재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일기를 썼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어서 박물관에서 책으로 나온 것이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책이 나오는 것으로 했어요. 단지 일기를 쓰는 자체만 해도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요.
단옥이라는 인물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요. 소설이 시작되면서부터 캐릭터를 선명하게 볼 수 있어요. “단옥은 소원 한 번 들어준 적 없던 서낭나무 돌무더기에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어둠 속에서 돌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니 속이 시원했다.”(16쪽) 같은 부분이 그렇죠.(웃음)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와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한테 일이 닥쳐서 움직이긴 하지만 아주 적극적인 인물은 아니었어요. 약간은 모범생 같고요. 그래서 단옥을 그릴 때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요새 MBTI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단옥은 ENFP일 거예요.(웃음) 아주 외향적이고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죠. 서낭당에 돌멩이를 집어던지기도 하고, 엄마한테도 막 대들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아요. 현실에도 나서서 무언가를 하기 좋아하고, 남한테 관심 받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단옥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을 완성하는 작품의 주인공이 그런 인물이라서 더 좋아요.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와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 이어 『슬픔의 틈새』까지, 이 작업들은 어떻게 이어져 온 거예요?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어요.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쓰며 자료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사진 신부’를 알게 되었고요. 그것이 『알로하, 나의 엄마들』로 연결이 됐죠. 두 번째 이야기를 쓰면서 이야기를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일제 초기고,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은 가장 먼저 썼지만 일제 중반부 이야기니까, 자연스럽게 일제 후반부 이야기를 더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해서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이 되었죠.
무엇이 이런 역사 속 사람들을 소설로 살려내도록 한 것인지, 왜 이들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일단 궁금했어요.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시작한 것도 그렇죠. 사진을 보면서 궁금했거든요. 도대체 무엇이 이 어린 소녀들을 자신들의 운명을 건 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떠나게 했을까, 하고요. 특히 정말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점은, 사진 속 인물들이 부채와 양산과 꽃다발을 들고 있는 부분이었는데요. 이들이 이 물건들을 사진사가 주는 대로 받은 걸까 아니면 자기가 취향껏 선택한 걸까, 그런 것이 너무나 궁금하더라고요. 그 장면을 생각하니까 사진관에서 있는 소녀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먼 길을 떠나는 두려운 마음이 있는 한편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자신으로 돌아가서 양산이 좋아, 하면서 고르기도 하고 속으로 저거 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아쉬워하기도 했을 마음이 머릿속에 막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이들의 삶을 복원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마음으로 작품 속에 사진관 장면을 그렸죠.
대부분은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에 녹여내고, 동포의 마음을 담아 독자에게 알리자는 거창한 뜻보다는 그냥 제가 그 인물들을 너무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요. 역사 자료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살이 돋고 피가 도는 존재로 그리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이렇게 해온 것 같아요. 소명 의식이나 책임감 때문이었다면 못했을 것 같아요. 우선은 제 자신이 재미 있어야 쓸 수 있고요. 저는 그걸 즐기고 싶은 거죠.
『슬픔의 틈새』에서 가장 즐겁게 쓰신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단옥이란 이름이 어느 날 문득 떠올랐어요. 이름이 중요하니까 이런저런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제 나이의 여성들을 보면 오빠 이름을 조금 바꿔 ‘순’ 자를 넣는 식으로 성의 없이 지은 이름이 되게 많거든요. 그래서 단옥이도 어른들이 별 생각 없이 단오에 태어났으니까 단옥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어서 그렇다면 얘가 평생 가졌던 생각은 뭘까, 상상하게 됐어요. 작품에도 나오지만, 단오가 양기가 가장 센 날이라면 그날 태어난 여자 아이는 어떤 운명을 살게 될까, 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고요. 그런 가운데 사회적 배경이라든가 가족 내의 위치에 있어서는 또 다른 책임감과 억압이 있을 테니까요. 단옥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니까 캐릭터가 정해지고 삶까지도 그리게 됐어요. 그 과정이 즐거웠어요.
또한 이들이 나중에 ‘마카로프’에서 살게 되는데요. 그곳에 제주도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어요. 그걸 보는데 제주도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마음에서 인물들을 마카로프로 보냈고요.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데 4.3에 대해 아무 언급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이나마 서사에 녹였습니다.
이분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일본, 소련, 북한과 남한, 러시아... 사할린의 사람들은 극도로 복잡한 관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되어 왔어요.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단옥의 이름 변천사고요. 이 아픔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한국 사회가 사할린 한인과 어떻게 제대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주단옥에서 야케모토 타마코, 다시 주단옥, 그리고 올가 송……. 이름이 바뀔 때마다 한동안 헷갈렸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 다른 한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바뀐 이름들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이었다.”(323-324쪽))
처음 이 역사적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어떻게 인간의 삶이 이럴 수 있는지, 도대체 국가는 어떤 존재인지 질문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도 한국 사회에는 난민이나 이주민을 혐오하는 시선이 있고,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사할린 한인 분들에게도 그렇고요. 작년에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무조건 영주귀국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인 거예요. 더욱이 직접적인 보상은 하나도 못 받았죠. 영주귀국 하신 분들께 주거, 생활비, 의료 지원 등을 최소로 하고 있지만 보상금은 없어요.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본계 시민들이 받았던 보상 사례를 보면 여전히 국가 차원의 보상이 너무 미흡하죠.
무엇보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분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존중과 진정 어린 사과라는 점이었어요. 동정이나 시혜의 시선이 아니라 그동안 거기서 너무나 잘 사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같은 말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 건네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의 역동을 잘 모르는 다른 세계의 독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외국 독자를 의식하고 쓰지는 않았어요. 의식을 하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다만 소설이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현재의 세계와 닿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요. 이주민과 난민들이 정말 많잖아요. 이 모든 것이 현재성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고요. 저의 이야기가 과거의 재현에서 끝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된 것도 그런 생각의 반영이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뒷부분에 참고 자료를 촘촘하게 담으셨어요. 관심 있는 분들이 따라 읽을 수 있는 너무나 귀한 지도를 남겨주신 것 같은데요. 『슬픔의 틈새』를 읽고 관심이 생긴 독자 분들이 다음에 읽기 좋을 자료를 추천해주시면 어떨까요?
사할린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분들은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를 보시면 좋겠어요. 이분은 동포 2세이시고요. 국적이 여러 번 바뀌었고, 현재 한국에 영주 귀국해서 사시는 분이에요. 경험한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만큼 강한 울림이 오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또 미디어일다에서 출간된 『사할린』도 추천해요. 최상구 선생님은 몇 년에 걸쳐 사할린을 방문하셨거든요. 이 책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분들 이야기까지도 두루두루 나와 있어서 좋아요. 또 『사할린 잔류자들』은 일본인 사할린 잔류자의 이야기예요. 근데 그분들도 아버지가 조선인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다 한국과 맞물려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와 떼어낼 수 없다는 걸 알게 하는 책이에요. 그밖에 책에 밝혀둔 영상 자료들은 찾아서 보기 어렵지 않으니까요. 함께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슬픔의 틈새
출판사 | 사계절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출판사 | 사계절
알로하, 나의 엄마들
출판사 | 창비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
출판사 | 구름바다
사할린 잔류자들
출판사 | 책과함께

신연선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