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는 짧고 예술은 길다
저자 서문을 통해 밀로스는 『사로잡힌 영혼』이 “독자를 바르샤바, 프라하, 부크레시티, 부다페스트의 지식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안내할” 거라고 예고한다.
200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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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류의 책에는 특정한 계보가 있다. 198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출신 작가 체슬라브 밀로스(Czeslaw Milosz, 1911-2004)의 『사로잡힌 영혼The Captive Mind』(안정효 옮김, 을유문화사, 1980)은 사회주의 체제와 비판적 지식인을 싸잡아 비난하는 이념서적의 원조다. 한국어판 『사로잡힌 영혼』의 뒤표지 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글에선 이 책을 “공산정권하에서 지식인들의 노예화와 저항을 묘사한 유니크하고도 충격적인 작품”으로 본다.
저자 서문을 통해 밀로스는 『사로잡힌 영혼』이 “독자를 바르샤바, 프라하, 부크레시티, 부다페스트의 지식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안내할” 거라고 예고한다. “나에게는 그 세계가 낯이 익지만,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심지어는 신비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나는 공산권 국가에서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해 보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모스크바가 만들어낸 체제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밀로스가 “거부한 이념”과 그가 “치른 전투를 구체화한 전장이기도 하다.”
역자 후기는 1953년 발표된 에세이 『사로잡힌 영혼Zniewolony umysl』의 내용을 이렇게 간추린다. “이 책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라고만 밝힌 네 명의 폴란드 작가들의 삶을 통해 지성인이 공산주의로부터 받는 영혼의 충격을 그리고 있다. 현대인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위험성에 대한 각성과 휴머니스틱한 태도를 잘 드러낸 이 작품은 곧 영국?프랑스?독일 등 세계 각국어로 번역?출판되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사로잡힌 영혼』을 “의미심장한 한 시대의 기록”이자 “가장 수준이 높은 해석”으로 극찬한다.
“밀로스는 전향한 공산주의자처럼 글을 쓰지는 않으며, 태도나 어조?행동에서 전체주의를 벗어나려는 격렬한 자유의 열광에 대하여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그는 또한 실제로 혁명이나 귀환을 생각하는 망명가로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 그는 정의와 꾸밈없는 진리에의 의지로써, 공포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분석함으로써 동시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행동적인 인간으로서 말한다.”
야스퍼스는 “우리는 그를 통하여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는 인간을 비판하는 데 더욱 신중하게 된다”라고 덧붙였지만, 반세기가 흐름 지금, 이 책은 철 지난 세련된 이념 비판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을 살피는 작업이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극단적인 냉전 체제를 겪었거니와 ‘사로잡힌 영혼’을 사갈시하는 무리가 건재하고 있어서다.
밀로스가 점쟁이가 아닌 이상, 동부 유럽 나라들이 러시아어를 하나의 공통 언어로 사용하게 되리라는 그의 예측과 “서양을 앞지르려던 일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는 단정까지 까다롭게 다룰 이유는 없다. 하지만 밀로스가 제시한 서방세계의 체제적 비교 우위의 요소는 천박하기 짝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는 영화배우가 입은 드레스와 같은 모양으로 대량생산한 값싼 옷을 걸치고, 낡기는 했어도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카우보이 영화를 보고, 집에는 냉장고가 있고,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문명의 어떤 수준에서 살아간다. 그런 반면에 레닌그라드 근처의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여자는 혹시 증손녀나마 그런 평균치에 가까운 수준의 생활을 하게 될는지 앞날을 알 수가 없다.”
미국을 지배하는 반공 히스테리가 “주로 무장을 하고 무자비한 강대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밀로스의 주장을 수긍하기도 어렵지만, 서양의 법치주의를 긍정하는 그의 견해는 동의하기가 더 어렵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서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백하도록 하는 과학적인 고문의 사용을 채택하지 않는” “합법적인 사고방식”의 뿌리가 옅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나는 “서방세계의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는 헛소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법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수단이다. “분명히 법의 보호를 받으며 범죄가 저질러지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서방세계의 법은 지배받는 자들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자들의 손도 묶어놓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도 이의가 있다. 후자는 다분히 지배계급끼리의 갈등과 이권다툼에 연관된다.
그래도 “전염병이나 지진은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라거나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질서를 ‘자연스럽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라는 밀로스의 통찰은 빛이 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밀로스의 통찰을 좀더 짚어보자. “폭탄에 깨진 창문의 유리조각들이 흩어진 길거리를 따라 처음 거닐게 되면, 인간은 그가 살던 세계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신뢰감이 흔들리고 만다.”
또한 “주어진 사회질서와 주어진 가치관의 체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모든 질서는 ‘부자연’스럽고, 인간 본성에 모순되기 때문에 지속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한편, “전제주권국에서 찾아온 방문객은 서방세계에 도착하면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적어도 냉전시기 우리 실정과는 어긋난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냉전시대 초창기의 증언이다.
“그 친구들은 공산주의 초기의 상황에 대해 반기를 들어 이북을 버리고 남쪽으로 온 거지. 미국이 점령한 남쪽이 살기 좋을 것이라고 내려온 거야. 그런데 몇 달 못 버티고 북으로 되돌아가버렸어. 떠나기 전에 나보고 이렇게 말하더라고. ‘우린 도저히 못 살겠다. 이런 무섭고 한심한 사회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사회적으로는 버리고 왔지만 이북이 훨씬 낫다. 영희는 남아서 잘해봐라.’”(리영희?임헌영, 『대화』, 한길사, 2005. 83쪽)
1970년대와 80년대 ‘귀순용사’의 일부가 이른 나이에 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것도 짚어볼 대목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술에 절어 살게 했을까?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으리라. 아울러 ‘여기가 아닌가 봐!’ 하는 실망감도 작용했으리라. 냉전시대 그쪽은 확실히 전제주권국이었지만 이쪽은 서방세계의 진면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무튼 이른바 새터민은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로잡힌 영혼』을 이념적으로 계승한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Intellectuals』(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2005)은 여러 차례 우리말로 옮겨졌다. 한국언론자료간행회에서 김욱 번역의 한국어판을 『지식인들』(1993)과 『위대한 지식인들에 관한 끔찍한 보고서』(1999)라는 제목으로 펴냈고,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벌거벗은 지식인들』(김일세?김영명 옮김, 1999)이라는 제목의 다른 번역판이 있다.
형편없는 책이 이렇게 여러 번 번역된 데에는 반공주의와 냉전의식의 유산이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폴 존슨이 이중성을 까발린 지식인 10여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 자크 루소처럼 “사회적 범죄의 원천인 사유재산을 불신하”는 ‘천년왕국’의 신봉자들이다. 다시 말해 넓은 의미의 좌파다.
폴 존슨에게 루소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또 그는 마르크스를 폄하하기 위해 온건한 노동자들을 부각시킨다. 폴 존슨은 마르크스가 사실을 무시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은 “(목격자에 따르면, 그는 부르주아지라는 단어를 특히 불쾌한 경멸조로 발음했다고 한다)”라며, 『지식인의 두 얼굴』의 원서가 출간된 1988년을 기준으로 적어도 100년 전 목격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삼는다.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그의 깎아내림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자본론』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은 진실에 대한 무시, 때로는 경멸에 가깝기까지 한 그의 시선을 시종일관 반영하고 있다.” 또한 “『자본론』을 읽어보면 근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겐 『자본론』을 평가할 능력이 없다. 그래도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가 폴 존슨의 편견이 가득한 책보다 적어도 만 곱절 탁월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에드먼드 윌슨의 ‘전향’을 높게 평가하는 대목에서 폴 존슨의 비겁함은 극에 달한다. 폴 존슨은 『지식인의 두 얼굴』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지도적 지식인들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태도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여 나는 그에게 균형감을 가지라는 차원에서, 우파 지식인의 두 얼굴을 파헤치는 작업의 일환으로 윈스턴 처칠에 대한 뒷조사를 권하고 싶다.
마크 릴라의 『분별없는 열정The Reckless Mind ―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서유경 옮김, 미토, 2002)은 원제목과 서문에서 『사로잡힌 영혼』을 계승하는 작업임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사로잡힌 영혼』의 “짝패로 읽힐 수도 있다.”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야스퍼스, 칼 슈미트, 벤야민, 알렉상드르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의 간추린 생애와 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이 책은 폴 존슨의 지식인 비판과는 거리를 둔다.
마크 릴라는 이들을 전제(專制) 애호증에 빠져 남들의 인생을 그르칠 사람들로 여긴다. 그러나 나치를 지지한 하이데거와 슈미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지식인의 배신을 이해하려면 지식인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저자의 가설에 징발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하이데거?아렌트?야스퍼스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신비주의에 경도되었다는 것 정도다. 『분별없는 열정』은 『사로잡힌 영혼』과 마찬가지로 약간 세련된 이념비판 서적이다.
『사로잡힌 영혼』 부류의 이념비판서의 저변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흐르고 있다. “나는 그가 아는 바에 관해서 그가 얘기하는 한은 그의 말을 믿지만, 내가 직접 아는 바에 관해서 얘기하기 시작하면 믿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나’는 체슬라브 밀로스이고, ‘그’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이다.
『권력의 장악』(이가형 옮김, 문화서적, 1980)과 『엘베강을 향하여』(이덕형 옮김, 문학사상사, 1980)는 밀로스의 장편소설 『The Seizure of Power』를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나치에 의한 민족 유린과 폴란드 인들의 저항을 기본 골격으로, 바르샤바 탈환 후 엘베 강을 향해 진격하기까지의 폴란드 민족의 수난과 역경, 지식인들의 갈등과 행동을, 당시 폴란드의 청년 그룹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체슬라브 밀로스가 엮은 『폴란드 민족시집』(김정환 옮김, 실천문학사, 1982)에는 밀로스의 시도 네 편 실려 있다. 이 시집을 번역한 김정환 시인은 밀로스의 시 작품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위대한 예술성 및 ‘예술적인 거리 유지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그것은 그가 고난에 찬 삶의 현장과 그 ‘더러워서 아름다운’ 조국을 일찍부터 등진 사실(그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3국을 이루는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태어난 체슬라브 밀로스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5년간 바르샤바에서 항독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2차 대전 직후부터 프랑스 파리 주재 폴란드 대사관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폴란드 공산체제에 염증을 느껴 1951년 프랑스에 망명한다. 밀로스는 1950년대를 서부 유럽에서 떠돌다 1960년부터 미국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세상을 떠났다.
체슬라브 밀로스는 이름의 우리말 표기가 아주 혼란스러운 외국 저자다. Czeslaw Milosz의 우리말 표기는 실로 다양하다. 1980년대 초반 Czeslaw는 ‘체슬라브’로 얼추 일치를 봤으나, Milosz는 ‘밀로슈’, ‘밀로시’, ‘밀로즈’로 표기했다. 20년 후 『분별없는 열정』의 한국어판은 Milosz를 ‘밀로츠’로 표기하고, 밀로스의 사망을 전하는 신문기사에서는 아예 ‘체스와프 미워시’로 환골탈태한다.
그러니까 체슬라브 ‘밀로스’는 혼란을 가중하는 표현인 셈이다. 현지음에 가까운 이름 표기가 바람직하지만, Czeslaw Milosz는 굳어진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고 본다. Czeslaw는 체슬라브라고 하는데 무리가 없으나, Milosz가 문제다. 기존의 표기 넷에서 어느 하나를 취하기보다는 새로운 표기를 써보기로 한다.
밀로스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헤어>(1979), <아마데우스>(1984), <발몽>(1989), <래리 플린트>(1996), <맨 온 더 문>(1999) 등을 감독한 체코 출신의 거장 밀로스 포먼Milos Forman의 이름표기를 근거로 삼았다. Czeslaw Milosz는 체슬라브 밀로스다.
저자 서문을 통해 밀로스는 『사로잡힌 영혼』이 “독자를 바르샤바, 프라하, 부크레시티, 부다페스트의 지식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안내할” 거라고 예고한다. “나에게는 그 세계가 낯이 익지만,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심지어는 신비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나는 공산권 국가에서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해 보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모스크바가 만들어낸 체제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밀로스가 “거부한 이념”과 그가 “치른 전투를 구체화한 전장이기도 하다.”
역자 후기는 1953년 발표된 에세이 『사로잡힌 영혼Zniewolony umysl』의 내용을 이렇게 간추린다. “이 책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라고만 밝힌 네 명의 폴란드 작가들의 삶을 통해 지성인이 공산주의로부터 받는 영혼의 충격을 그리고 있다. 현대인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위험성에 대한 각성과 휴머니스틱한 태도를 잘 드러낸 이 작품은 곧 영국?프랑스?독일 등 세계 각국어로 번역?출판되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사로잡힌 영혼』을 “의미심장한 한 시대의 기록”이자 “가장 수준이 높은 해석”으로 극찬한다.
“밀로스는 전향한 공산주의자처럼 글을 쓰지는 않으며, 태도나 어조?행동에서 전체주의를 벗어나려는 격렬한 자유의 열광에 대하여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그는 또한 실제로 혁명이나 귀환을 생각하는 망명가로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 그는 정의와 꾸밈없는 진리에의 의지로써, 공포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분석함으로써 동시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행동적인 인간으로서 말한다.”
야스퍼스는 “우리는 그를 통하여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는 인간을 비판하는 데 더욱 신중하게 된다”라고 덧붙였지만, 반세기가 흐름 지금, 이 책은 철 지난 세련된 이념 비판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을 살피는 작업이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극단적인 냉전 체제를 겪었거니와 ‘사로잡힌 영혼’을 사갈시하는 무리가 건재하고 있어서다.
밀로스가 점쟁이가 아닌 이상, 동부 유럽 나라들이 러시아어를 하나의 공통 언어로 사용하게 되리라는 그의 예측과 “서양을 앞지르려던 일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는 단정까지 까다롭게 다룰 이유는 없다. 하지만 밀로스가 제시한 서방세계의 체제적 비교 우위의 요소는 천박하기 짝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는 영화배우가 입은 드레스와 같은 모양으로 대량생산한 값싼 옷을 걸치고, 낡기는 했어도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카우보이 영화를 보고, 집에는 냉장고가 있고,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문명의 어떤 수준에서 살아간다. 그런 반면에 레닌그라드 근처의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여자는 혹시 증손녀나마 그런 평균치에 가까운 수준의 생활을 하게 될는지 앞날을 알 수가 없다.”
미국을 지배하는 반공 히스테리가 “주로 무장을 하고 무자비한 강대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밀로스의 주장을 수긍하기도 어렵지만, 서양의 법치주의를 긍정하는 그의 견해는 동의하기가 더 어렵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서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백하도록 하는 과학적인 고문의 사용을 채택하지 않는” “합법적인 사고방식”의 뿌리가 옅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나는 “서방세계의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는 헛소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법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수단이다. “분명히 법의 보호를 받으며 범죄가 저질러지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서방세계의 법은 지배받는 자들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자들의 손도 묶어놓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도 이의가 있다. 후자는 다분히 지배계급끼리의 갈등과 이권다툼에 연관된다.
그래도 “전염병이나 지진은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라거나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질서를 ‘자연스럽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라는 밀로스의 통찰은 빛이 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밀로스의 통찰을 좀더 짚어보자. “폭탄에 깨진 창문의 유리조각들이 흩어진 길거리를 따라 처음 거닐게 되면, 인간은 그가 살던 세계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신뢰감이 흔들리고 만다.”
또한 “주어진 사회질서와 주어진 가치관의 체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모든 질서는 ‘부자연’스럽고, 인간 본성에 모순되기 때문에 지속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한편, “전제주권국에서 찾아온 방문객은 서방세계에 도착하면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적어도 냉전시기 우리 실정과는 어긋난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냉전시대 초창기의 증언이다.
“그 친구들은 공산주의 초기의 상황에 대해 반기를 들어 이북을 버리고 남쪽으로 온 거지. 미국이 점령한 남쪽이 살기 좋을 것이라고 내려온 거야. 그런데 몇 달 못 버티고 북으로 되돌아가버렸어. 떠나기 전에 나보고 이렇게 말하더라고. ‘우린 도저히 못 살겠다. 이런 무섭고 한심한 사회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사회적으로는 버리고 왔지만 이북이 훨씬 낫다. 영희는 남아서 잘해봐라.’”(리영희?임헌영, 『대화』, 한길사, 2005. 83쪽)
1970년대와 80년대 ‘귀순용사’의 일부가 이른 나이에 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것도 짚어볼 대목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술에 절어 살게 했을까?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으리라. 아울러 ‘여기가 아닌가 봐!’ 하는 실망감도 작용했으리라. 냉전시대 그쪽은 확실히 전제주권국이었지만 이쪽은 서방세계의 진면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무튼 이른바 새터민은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로잡힌 영혼』을 이념적으로 계승한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Intellectuals』(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2005)은 여러 차례 우리말로 옮겨졌다. 한국언론자료간행회에서 김욱 번역의 한국어판을 『지식인들』(1993)과 『위대한 지식인들에 관한 끔찍한 보고서』(1999)라는 제목으로 펴냈고,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벌거벗은 지식인들』(김일세?김영명 옮김, 1999)이라는 제목의 다른 번역판이 있다.
형편없는 책이 이렇게 여러 번 번역된 데에는 반공주의와 냉전의식의 유산이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폴 존슨이 이중성을 까발린 지식인 10여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 자크 루소처럼 “사회적 범죄의 원천인 사유재산을 불신하”는 ‘천년왕국’의 신봉자들이다. 다시 말해 넓은 의미의 좌파다.
폴 존슨에게 루소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또 그는 마르크스를 폄하하기 위해 온건한 노동자들을 부각시킨다. 폴 존슨은 마르크스가 사실을 무시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은 “(목격자에 따르면, 그는 부르주아지라는 단어를 특히 불쾌한 경멸조로 발음했다고 한다)”라며, 『지식인의 두 얼굴』의 원서가 출간된 1988년을 기준으로 적어도 100년 전 목격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삼는다.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그의 깎아내림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자본론』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은 진실에 대한 무시, 때로는 경멸에 가깝기까지 한 그의 시선을 시종일관 반영하고 있다.” 또한 “『자본론』을 읽어보면 근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겐 『자본론』을 평가할 능력이 없다. 그래도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가 폴 존슨의 편견이 가득한 책보다 적어도 만 곱절 탁월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에드먼드 윌슨의 ‘전향’을 높게 평가하는 대목에서 폴 존슨의 비겁함은 극에 달한다. 폴 존슨은 『지식인의 두 얼굴』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지도적 지식인들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태도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여 나는 그에게 균형감을 가지라는 차원에서, 우파 지식인의 두 얼굴을 파헤치는 작업의 일환으로 윈스턴 처칠에 대한 뒷조사를 권하고 싶다.
마크 릴라의 『분별없는 열정The Reckless Mind ―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서유경 옮김, 미토, 2002)은 원제목과 서문에서 『사로잡힌 영혼』을 계승하는 작업임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사로잡힌 영혼』의 “짝패로 읽힐 수도 있다.”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야스퍼스, 칼 슈미트, 벤야민, 알렉상드르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의 간추린 생애와 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이 책은 폴 존슨의 지식인 비판과는 거리를 둔다.
마크 릴라는 이들을 전제(專制) 애호증에 빠져 남들의 인생을 그르칠 사람들로 여긴다. 그러나 나치를 지지한 하이데거와 슈미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지식인의 배신을 이해하려면 지식인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저자의 가설에 징발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하이데거?아렌트?야스퍼스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신비주의에 경도되었다는 것 정도다. 『분별없는 열정』은 『사로잡힌 영혼』과 마찬가지로 약간 세련된 이념비판 서적이다.
『사로잡힌 영혼』 부류의 이념비판서의 저변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흐르고 있다. “나는 그가 아는 바에 관해서 그가 얘기하는 한은 그의 말을 믿지만, 내가 직접 아는 바에 관해서 얘기하기 시작하면 믿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나’는 체슬라브 밀로스이고, ‘그’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이다.
『권력의 장악』(이가형 옮김, 문화서적, 1980)과 『엘베강을 향하여』(이덕형 옮김, 문학사상사, 1980)는 밀로스의 장편소설 『The Seizure of Power』를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나치에 의한 민족 유린과 폴란드 인들의 저항을 기본 골격으로, 바르샤바 탈환 후 엘베 강을 향해 진격하기까지의 폴란드 민족의 수난과 역경, 지식인들의 갈등과 행동을, 당시 폴란드의 청년 그룹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체슬라브 밀로스가 엮은 『폴란드 민족시집』(김정환 옮김, 실천문학사, 1982)에는 밀로스의 시도 네 편 실려 있다. 이 시집을 번역한 김정환 시인은 밀로스의 시 작품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위대한 예술성 및 ‘예술적인 거리 유지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그것은 그가 고난에 찬 삶의 현장과 그 ‘더러워서 아름다운’ 조국을 일찍부터 등진 사실(그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3국을 이루는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태어난 체슬라브 밀로스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5년간 바르샤바에서 항독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2차 대전 직후부터 프랑스 파리 주재 폴란드 대사관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폴란드 공산체제에 염증을 느껴 1951년 프랑스에 망명한다. 밀로스는 1950년대를 서부 유럽에서 떠돌다 1960년부터 미국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세상을 떠났다.
체슬라브 밀로스는 이름의 우리말 표기가 아주 혼란스러운 외국 저자다. Czeslaw Milosz의 우리말 표기는 실로 다양하다. 1980년대 초반 Czeslaw는 ‘체슬라브’로 얼추 일치를 봤으나, Milosz는 ‘밀로슈’, ‘밀로시’, ‘밀로즈’로 표기했다. 20년 후 『분별없는 열정』의 한국어판은 Milosz를 ‘밀로츠’로 표기하고, 밀로스의 사망을 전하는 신문기사에서는 아예 ‘체스와프 미워시’로 환골탈태한다.
그러니까 체슬라브 ‘밀로스’는 혼란을 가중하는 표현인 셈이다. 현지음에 가까운 이름 표기가 바람직하지만, Czeslaw Milosz는 굳어진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고 본다. Czeslaw는 체슬라브라고 하는데 무리가 없으나, Milosz가 문제다. 기존의 표기 넷에서 어느 하나를 취하기보다는 새로운 표기를 써보기로 한다.
밀로스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헤어>(1979), <아마데우스>(1984), <발몽>(1989), <래리 플린트>(1996), <맨 온 더 문>(1999) 등을 감독한 체코 출신의 거장 밀로스 포먼Milos Forman의 이름표기를 근거로 삼았다. Czeslaw Milosz는 체슬라브 밀로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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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