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과대평가도, 평가절하도 아닌
2008년도의 촛불집회는 길었던 한여름 밤의 꿈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악몽에서 깨어났던 역사적 인식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인가.
200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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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아~ 연약한 이 여인을 누구에게 말할까요.” 조용필이 부른 「촛불」은 1980년대 초반 방영된 주말 연속극 <축복>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내가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은 불치병에 걸린 <축복>의 여자 주인공을 돌보거나 지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윤형근 외 지음, 한겨레출판, 2008)는 ‘2008 촛불의 기록’이다. 지난해 늦봄부터 초여름에 이르는 석 달 간 주로 서울 도심의 광장과 아스팔트를 수놓은 촛불의 전개 과정을 순차적으로 정리한 글과 <한겨레> 사진기자들이 찍은 관련 사진을 함께 엮었다.
“촛불을 보면서 시민들이 마음속에 그린 소망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학교 자율화 정책 반대, 공영방송 사수, 물?의료?가스?전기 민영화 반대를 외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었을까? 촛불이 넓혀간 다양한 의제들을 하나로 포괄하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공공성’이다.”(오건호, 146쪽)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오건호는 공공성을 “국가가 제공하는 ‘필수 서비스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접근성’으로 정의”한다. 공공성은 “시민들이 의료?주거 등 사회복지, 물?전기?가스?교통 등 공공서비스, 문화?정보 등 소통재들을 공정하고 부담 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
공공성의 유지와 강화는 나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저들이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공공성에 반하는 정책을 거둬들이게 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나는 다소 순진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다. 촛불집회의 위력은 그리 세지 않았다. 참석자 다수는 세 불리기에 관심 없어 보였다. 나도 그랬다.
그러면 나는 시민권을 드날리려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일까?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촛불을 시민권 행사의 중요한 상징으로 보는 변호사 차병직은 시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갈등과 모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그 문제의 해결과 발전적 변화를 목적으로 행사하는 정치 참여의 권리다.”
내가 서울시청 앞 광장과 인근 도로에서 촛불을 켠 시점은 촛불의 성격이 문화제에서 집회로 바뀌는 국면이었다. 내가 촛불문화제를 가까이서 본 것은 6월 10일의 약간 늦은 밤, 풍문여고 앞쪽의 작은 ‘명박산성’ 앞에서 펼쳐진 게 전부였다. 나는 촛불집회의 문화제적인 측면보다 참석자들이 밤늦도록 집에 갈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촛불집회는 예전의 거리 집회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야! 다 죽여 버려, 이 새끼들아! 다 죽여 버리란 말이야!” 에세이스트 김현진 글에 나오는 경찰 지휘관의 선명한 증오감은 이 나라 경찰의 본질을 일깨우는 한편 ‘문무대에서의 굴욕’을 떠올린다.
내 기억으로는, 물론 과문한 탓도 있지만, 이 나라 경찰은 제국주의 경찰의 인력과 조직을 물려받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을 내보인 일이 없다. 그러니 성고문과 고문치사의 이력은 더 말해 뭣하랴. 어느덧 23년 전의 일이 되었다. 문무대에 입소한 나는 “아군의 피해가 컸다”는 구대장이었던 중위의 난데없는 발언에 짧은 휴식시간을 망친다.
좌담 참석자인 디가(남성)는 혜안을 보여준다. “직접민주주의는 계속된다고 봐요. 많은 분들이 이제 70만 명이 모일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해요. 그런데 저는 당장 한 달 뒤라도 다시 그렇게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촛불집회에 왜 갔을까?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시각에 그 이유가 어렴풋하게 담겨 있는 듯도 하다.
“릴레이 촛불문화제는 그동안 경제성장 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에 휘둘려 고통 받고 있던 시민들이, 각성된 눈으로 민주주의와 현실을 바로보고자 했던 그들의 아름다운 인문적 욕망이 집약되어 함께 만들어낸 꿈같은 풍경이 아니었을까? 생활의 무게에 눌려 낱낱이 고립돼 있다가 넓은 광장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소통하면서 스스로의 힘에 대한 ‘긍정의 힘’을 얻는 시민들이, 흔들림 속에서도 제 몸을 다해 타오르는 촛불의 아름다움처럼, 타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일의 진정한 가치, 그 공생공락(共生共樂)의 비전을 폭죽처럼 솟아올렸던 한여름 밤의 꿈은 아니었을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산책자, 2009)는 내게 ‘센치하다’. 이 책이 센티멘털한 까닭을 말하기에 앞서 제목이 던지는 물음에 먼저 답하련다. 내가 촛불집회에 대여섯 번 참석하고 그만 둔 것은 어느 아주머니의 구박을 받고 나서다.
그날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들은 우리가 도로로 나서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가두시위자는 전원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다. 누군가 강제 연행되는 것을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거의 저절로 소리를 지르고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도로로 발을 들여놓진 않았다.
나는 인도에 서서 차도 진입을 막아선 전경에게 농지거리를 하다가 옆에 있던 어느 아주머리로부터 심한 핀잔을 들었다. 무진장 쪽팔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농지거리를 하던 전경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 나는 ‘내부의 적’이 더 두렵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언행을 더욱 조심하기로 다짐한다.
현실과의 괴리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센티멘털리즘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선 낯설거나 덜 낯선 차이만 있지 외국학자의 이론에 기대고 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10여 년 전, 진보 성향의 국내학자가 쓴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지오반니 아리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남한 노동운동의 향후 전망은 어떨까요.” 아리기의 대답은 이랬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여기서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거든요.”
또한 유학파의 한계랄까, 그런 게 느껴진다. 그들은 유학하는 동안의 부재(不在)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20년 전, 군복무 기간의 빈틈을 여적 극복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1988년 7월부터 1990년 10월 사이에 출간된 책에 관해 잘 모른다. 내 군복무 기간에 있었던 전교조 교사 집단 해직과 잇단 방북 사건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일부 필자는 촛불집회 구성원의 계층적 한계를 지적하나, 이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일 수 있다. 이 책 필자의 대부분은 중산층에 속한다. 일부 필자의 제 글에 갇히기는 과잉 해석으로도 드러난다. 그것은 지나친 기대감의 발로일 수 있다. 괜스레 들뜨거나 몸보다 앞선 머리랄지.
“국가가 당장이라도 시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기만 하면, 정부가 고시 철회만 하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시민들이었다.”(79쪽) 촛불집회 참가자 중 적잖은 인원이 날 밤새기를 밥 먹듯 한 것은 오로지 정부의 고집불통 때문인가? 한편 아래와 같은 주장은 막연한 가정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만일 10대들의 외침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고통과 우리 사회 전체의 고통을 좀 더 연속적으로 읽어냈더라면, 그리고 그 목소리를 시민 혹은 국민의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성급하게 번역하기 전에 시민이 되지 못한 혹은 국민이 되지 못한 그 어떤 사회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대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여타의 다른 비국민/비시민들의 사회적 주체들의 삶과 계열화했다면, 향후 촛불의 의미와 성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125쪽)
“현 사회구조에서 지켜야 할 확실한 이익과 지위가 있는 보수?기득권 세력과 그 지지계층은 오히려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결집된 투표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몫이 있는 자들은 투표소로 가고, 지켜야 할 몫이 없는 자들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선거보다 생계 벌이가 더 걱정인 형국이다.”(143쪽)
쉽게 해도 되는 말을 공연히 어렵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마 공감 가는 내용이라 뜻 파악은 된다. “필자는 그들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몰표를 던진 국민이나 촛불을 든 국민이나 ‘한국 현상’을 만든 주체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220쪽)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닐는지.
“2008년도의 촛불집회는 길었던 한여름 밤의 꿈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악몽에서 깨어났던 역사적 인식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인가. 최근에 사람들을 체면 불구하고 흑흑 느껴 울게 만드는 영화 <워낭소리>는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아마 관객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자연적인 삶을 허용했을 때 소가 40년이나 살 수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213쪽)
이 책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귀 기울여 듣자. “이미 30개월만 넘어도 교환 가치가 급강하하는, 그래서 살아 있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소들의 삶은, 모든 것들이 그것이 자란 땅으로부터 분리되는, 인간이 되는 과정과 인간의 본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땅과 분리된 채 인공적으로, 정보적으로 규정되는 우리 시대를 가슴 저리게 환기시킨다.”(213-214쪽)
지난 6월 21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열린 추모음악회에 참석했다. 두 시간 가까이 ‘입장’을 기다리는 도중, 서명지 두 종류가 대열을 따라 전해졌다. 나는 두 개 다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케이블카 없는 지리산 1만인 선언’에 동참하지 않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 5월 중순 나는 친구 둘과 오랜만에 여행을 했다.
난생 처음 지리산에도 갔었다. 지리산 노고단을, 차를 타고 갔다. 산의 거의 정상까지 찻길을 닦는 것과 케이블카를 놓는 것이 뭐가 다르랴! 하여 소심한 나는 차마 서명할 수 없었다. 아마도 차를 타고서 노고단을 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케이블카 설치 반대 서명을 했으리라. 그나저나 난 어째서 촛불집회에 갔었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윤형근 외 지음, 한겨레출판, 2008)는 ‘2008 촛불의 기록’이다. 지난해 늦봄부터 초여름에 이르는 석 달 간 주로 서울 도심의 광장과 아스팔트를 수놓은 촛불의 전개 과정을 순차적으로 정리한 글과 <한겨레> 사진기자들이 찍은 관련 사진을 함께 엮었다.
“촛불을 보면서 시민들이 마음속에 그린 소망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학교 자율화 정책 반대, 공영방송 사수, 물?의료?가스?전기 민영화 반대를 외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었을까? 촛불이 넓혀간 다양한 의제들을 하나로 포괄하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공공성’이다.”(오건호, 146쪽)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오건호는 공공성을 “국가가 제공하는 ‘필수 서비스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접근성’으로 정의”한다. 공공성은 “시민들이 의료?주거 등 사회복지, 물?전기?가스?교통 등 공공서비스, 문화?정보 등 소통재들을 공정하고 부담 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
공공성의 유지와 강화는 나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저들이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공공성에 반하는 정책을 거둬들이게 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나는 다소 순진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다. 촛불집회의 위력은 그리 세지 않았다. 참석자 다수는 세 불리기에 관심 없어 보였다. 나도 그랬다.
그러면 나는 시민권을 드날리려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일까?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촛불을 시민권 행사의 중요한 상징으로 보는 변호사 차병직은 시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갈등과 모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그 문제의 해결과 발전적 변화를 목적으로 행사하는 정치 참여의 권리다.”
내가 서울시청 앞 광장과 인근 도로에서 촛불을 켠 시점은 촛불의 성격이 문화제에서 집회로 바뀌는 국면이었다. 내가 촛불문화제를 가까이서 본 것은 6월 10일의 약간 늦은 밤, 풍문여고 앞쪽의 작은 ‘명박산성’ 앞에서 펼쳐진 게 전부였다. 나는 촛불집회의 문화제적인 측면보다 참석자들이 밤늦도록 집에 갈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촛불집회는 예전의 거리 집회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야! 다 죽여 버려, 이 새끼들아! 다 죽여 버리란 말이야!” 에세이스트 김현진 글에 나오는 경찰 지휘관의 선명한 증오감은 이 나라 경찰의 본질을 일깨우는 한편 ‘문무대에서의 굴욕’을 떠올린다.
내 기억으로는, 물론 과문한 탓도 있지만, 이 나라 경찰은 제국주의 경찰의 인력과 조직을 물려받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을 내보인 일이 없다. 그러니 성고문과 고문치사의 이력은 더 말해 뭣하랴. 어느덧 23년 전의 일이 되었다. 문무대에 입소한 나는 “아군의 피해가 컸다”는 구대장이었던 중위의 난데없는 발언에 짧은 휴식시간을 망친다.
좌담 참석자인 디가(남성)는 혜안을 보여준다. “직접민주주의는 계속된다고 봐요. 많은 분들이 이제 70만 명이 모일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해요. 그런데 저는 당장 한 달 뒤라도 다시 그렇게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촛불집회에 왜 갔을까?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시각에 그 이유가 어렴풋하게 담겨 있는 듯도 하다.
“릴레이 촛불문화제는 그동안 경제성장 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에 휘둘려 고통 받고 있던 시민들이, 각성된 눈으로 민주주의와 현실을 바로보고자 했던 그들의 아름다운 인문적 욕망이 집약되어 함께 만들어낸 꿈같은 풍경이 아니었을까? 생활의 무게에 눌려 낱낱이 고립돼 있다가 넓은 광장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소통하면서 스스로의 힘에 대한 ‘긍정의 힘’을 얻는 시민들이, 흔들림 속에서도 제 몸을 다해 타오르는 촛불의 아름다움처럼, 타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일의 진정한 가치, 그 공생공락(共生共樂)의 비전을 폭죽처럼 솟아올렸던 한여름 밤의 꿈은 아니었을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산책자, 2009)는 내게 ‘센치하다’. 이 책이 센티멘털한 까닭을 말하기에 앞서 제목이 던지는 물음에 먼저 답하련다. 내가 촛불집회에 대여섯 번 참석하고 그만 둔 것은 어느 아주머니의 구박을 받고 나서다.
그날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들은 우리가 도로로 나서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가두시위자는 전원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다. 누군가 강제 연행되는 것을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거의 저절로 소리를 지르고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도로로 발을 들여놓진 않았다.
나는 인도에 서서 차도 진입을 막아선 전경에게 농지거리를 하다가 옆에 있던 어느 아주머리로부터 심한 핀잔을 들었다. 무진장 쪽팔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농지거리를 하던 전경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 나는 ‘내부의 적’이 더 두렵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언행을 더욱 조심하기로 다짐한다.
현실과의 괴리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센티멘털리즘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선 낯설거나 덜 낯선 차이만 있지 외국학자의 이론에 기대고 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10여 년 전, 진보 성향의 국내학자가 쓴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지오반니 아리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남한 노동운동의 향후 전망은 어떨까요.” 아리기의 대답은 이랬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여기서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거든요.”
또한 유학파의 한계랄까, 그런 게 느껴진다. 그들은 유학하는 동안의 부재(不在)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20년 전, 군복무 기간의 빈틈을 여적 극복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1988년 7월부터 1990년 10월 사이에 출간된 책에 관해 잘 모른다. 내 군복무 기간에 있었던 전교조 교사 집단 해직과 잇단 방북 사건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일부 필자는 촛불집회 구성원의 계층적 한계를 지적하나, 이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일 수 있다. 이 책 필자의 대부분은 중산층에 속한다. 일부 필자의 제 글에 갇히기는 과잉 해석으로도 드러난다. 그것은 지나친 기대감의 발로일 수 있다. 괜스레 들뜨거나 몸보다 앞선 머리랄지.
“국가가 당장이라도 시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기만 하면, 정부가 고시 철회만 하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시민들이었다.”(79쪽) 촛불집회 참가자 중 적잖은 인원이 날 밤새기를 밥 먹듯 한 것은 오로지 정부의 고집불통 때문인가? 한편 아래와 같은 주장은 막연한 가정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만일 10대들의 외침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고통과 우리 사회 전체의 고통을 좀 더 연속적으로 읽어냈더라면, 그리고 그 목소리를 시민 혹은 국민의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성급하게 번역하기 전에 시민이 되지 못한 혹은 국민이 되지 못한 그 어떤 사회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대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여타의 다른 비국민/비시민들의 사회적 주체들의 삶과 계열화했다면, 향후 촛불의 의미와 성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125쪽)
“현 사회구조에서 지켜야 할 확실한 이익과 지위가 있는 보수?기득권 세력과 그 지지계층은 오히려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결집된 투표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몫이 있는 자들은 투표소로 가고, 지켜야 할 몫이 없는 자들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선거보다 생계 벌이가 더 걱정인 형국이다.”(143쪽)
쉽게 해도 되는 말을 공연히 어렵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마 공감 가는 내용이라 뜻 파악은 된다. “필자는 그들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몰표를 던진 국민이나 촛불을 든 국민이나 ‘한국 현상’을 만든 주체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220쪽)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닐는지.
“2008년도의 촛불집회는 길었던 한여름 밤의 꿈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악몽에서 깨어났던 역사적 인식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인가. 최근에 사람들을 체면 불구하고 흑흑 느껴 울게 만드는 영화 <워낭소리>는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아마 관객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자연적인 삶을 허용했을 때 소가 40년이나 살 수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213쪽)
이 책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귀 기울여 듣자. “이미 30개월만 넘어도 교환 가치가 급강하하는, 그래서 살아 있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소들의 삶은, 모든 것들이 그것이 자란 땅으로부터 분리되는, 인간이 되는 과정과 인간의 본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땅과 분리된 채 인공적으로, 정보적으로 규정되는 우리 시대를 가슴 저리게 환기시킨다.”(213-214쪽)
지난 6월 21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열린 추모음악회에 참석했다. 두 시간 가까이 ‘입장’을 기다리는 도중, 서명지 두 종류가 대열을 따라 전해졌다. 나는 두 개 다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케이블카 없는 지리산 1만인 선언’에 동참하지 않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 5월 중순 나는 친구 둘과 오랜만에 여행을 했다.
난생 처음 지리산에도 갔었다. 지리산 노고단을, 차를 타고 갔다. 산의 거의 정상까지 찻길을 닦는 것과 케이블카를 놓는 것이 뭐가 다르랴! 하여 소심한 나는 차마 서명할 수 없었다. 아마도 차를 타고서 노고단을 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케이블카 설치 반대 서명을 했으리라. 그나저나 난 어째서 촛불집회에 갔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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