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속을 헤아려 주는 여행자 이동진 -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이동진
여행이 꿈과 몽상에 비유될 수 있다면, 여행은 영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여행도 한 편의 영화처럼 다뤘다.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에서 그는, 자신의 꿈의 기록을 낱낱이 풀어냈다.
201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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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슴이 벅찰 정도로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되려 할 말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부사어를 써 가면서까지 “너무 좋았어. 너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때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에 오히려 말이 더 많아진다. 침을 튀겨 가며, 그 영화의 아쉬운 점을 꼬집어 댄다. 대개 그런 영화는 불쾌한 감정의 이유가 명확하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에 감정적인 반면, 부정적인 것에 이성적이다. “마냥 좋았어”라는 말은 있었어도, “그냥 싫더라”는 말은 기꺼이 내가 선택하고 돈을 지불한 영화에 쉽게 던질 수 있는 소감은 아니다.
영화뿐이랴. 삶에서 정말 좋은 순간 혹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의 감동은 해석해 내기 어렵다. 그래서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띄는 영화의 못난 점, 돌출된 점에 매서운 망치질을 가하는 영화평도 재미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동, 특유의 쾌감을 고스란히 글로 전해 주는 평만 못하다 싶다. ‘좋다’ 이상 형용할 수 없는 내 감정을 납득할 수 있게 해석해 주는 글, 어렴풋한 감정들을 절묘한 단어로 담아내 다시금 그 감정을 유발하게 만드는 글이 좋다. 그런 글을 읽으며 우리는 또 다시 ‘감동’을 느낀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다시금 영화평을 찾아 읽는 까닭은 이 때문이 아닐는지. 내가 이동진 영화평을 기다리는 까닭은, 그의 평을 좋아하는 이유는 순전히 이러하다.
여행이 꿈과 몽상에 비유될 수 있다면, 여행은 영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여행도 한 편의 영화처럼 다뤘다.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에서 그는, 자신의 꿈의 기록을 낱낱이 풀어냈다. 그를 스치고 간 기억들을 활자로 화석화했다. 그는 ‘과연 내가 이곳에 다녀왔을까’라고 서문에서 되물었고, 이날에도 ‘이 기록이 남의 여행기 같다’는 말을 했지만, 그 때문에 나는 이 기록을 나의 기억처럼 읽어 내려 갈 수 있었다. 마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설렘을 느끼고, 그곳의 풍경을 상상했다. “모든 사랑은 생의 한가운데서 머묾으로써 주변부를 중심으로 바꾸어낸다. (…) 결국 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선을 소유한 자가 디디고 선 자리일 테니까.”(p.31) 세상의 중심이라는 울룰루에는 가 보지 않았지만, 그곳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는 동안 그의 꿈이 순간순간 나의 현실로 체험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혹은 나는 ‘목적’을 이뤘다.
영화 여행, 할 수 있는 한 영화와 같은 상황에 처해 보는 거죠
최근에 <더 폴> 촬영지인 인도에 다녀오셨어요. 어떠셨나요? 워낙 장대한 풍경이 있는 곳이라 무조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더 폴>을 보면 ‘저런 장소가 진짜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잖아요. 거기 있다는 걸 알고 갔는데도 신기했어요.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던 찬드바오리는 더 의미 있었어요. 찬드바오리로 가는 도로에서 카스트 최하층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며칠 동안 도로를 점거했어요. 그래서 2번이나 시도했다 취소되고, 떠나는 날 새벽에 갈 수 있었어요. 평상시면 대여섯 시간이면 될 걸 열두 시간을 갔어요, 워낙 시골 길인 데다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가면서 길을 백 번쯤 물어봤거든요. 간신히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는데, 찬드바오리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거예요. 그 순간 짜릿하죠. 영화 출장을 가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런 순간이에요. <맘마미아>를 촬영한 섬에 갔을 때도 그랬죠. ‘이런 데 아기오스 요아니스 예배당이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헤맸는데, 갑자기 해안 절벽 성당이 눈앞에 딱 나올 때!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동진 여행기’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요?
“영화라는 매체를 즐길 때, 어떤 사람은 서너 번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뛰쳐나가 카메라를 잡고 영화감독이 되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마지막 꿈은 없는 사람이거든요. 이 여행은 영화를 사랑하는 저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다 좋아하는 건 아녜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하 <세중사>) 같은 경우는 울룰루에 가고 싶어서 영화를 선택했고, 잉마르 베리만의 <묘지를 간 여정>은 제가 존경하는 예술가를 향한 제 나름의 경의의 표시고요. <원스> 같은 경우, 그 영화를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는 방식으로써의 여행이죠. 그게 다른 사람에게 대리 만족도 되고, 봐서 나쁘지 않았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죠.”
무인도의 낭만과 공포, 절해고도의 한자어 ‘절’은 절경과 절망이란 단어 모두에서 사용된다. 이를테면 우리를 매혹시키거나 좌절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망망대해 위의 그 무엇이다. 무인도에서 1박 2일을 지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그 섬이 바로 <캐스트 어웨이>의 무대였다면? 짧고 제한적인 경험이지만, 나는 그 섬에 머무는 동안 가급적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톰 행크스)이 겪었던 방식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p.160)
여행지에서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보셨는데요. 무엇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었나요?
“영화 무드에 젖어 여행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연기와 비슷해요. 역할 놀이 같은 거죠. 예를 들면, <세중사>를 위해 울룰루와 일본의 아지초 마을에 갔어요. 순수하고 덜 익은, 십 대의 풋사랑에 관한 영화잖아요. 그런 무드에 젖으려고 노력하죠. 그러지 않으면 이런 여행을 굳이 갈 필요가 없죠. 이때 영화 속 상황과 일치한 심리 상태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몰고 가기도 하지만, 주인공과 비슷한 일을 하면 가장 쉽게 그렇게 돼요. 가장 극단적으로 흉내 냈던 미친 짓이 <캐스트 어웨이>였고요. 그러고 나면 극중의 척이라는 인물의 상황을 정말 잘 알게 돼요.
배구공도 일부러 사서 갔고, 손에 피범벅을 할 수 없어서 포스터 칼라도 가져가고, 심지어 망사가 필요해 어린애 원피스를 피지에서 사 갔어요. <캐스트 어웨이>의 상황도 그런 거잖아요. 소포 중에 그런 게 있다고 가정하는 거죠. 제가 손재주가 되게 없는데 나뭇가지를 두 개 구해서, 망사를 묶어 그물이랍시고 만들었어요. 내가 봐도 한심하더라고요. 그걸로 고기를 잡으려고 하니, 세상에 어떤 눈먼 고기가 그 그물에 걸리겠어요. 두 시간 동안 휘젓고 다니다가 바위에 부딪쳐 다리가 피범벅이 되고 그랬어요. 안 될 걸 알고도 그렇게 하는 거죠. 제가 아주 어렵게, 많은 돈을 지불해서 무인도에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음풍농월하다 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웃음)”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어서 <캐스트 어웨이> 여행이 테마 기행인 줄 몰랐어요. 혼자 갔을 텐데, 이렇게 기이한 위치에서 자기 사진을 찍다니 싶어서…… 무섭더라고요.(웃음)
“설마요.(웃음) 기본적으로 제 책 속에는 제 사진을 잘 안 넣어요. 다만 그 여행은 제가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난 경우라 제 사진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대신 얼굴이 안 나오는 것만 썼어요.”
책에서도 특유의 성실성이 드러납니다. 꼼꼼한 기록과 감상은 성실한 메모 덕에 가능했을 것 같고, 지난번 책보다 훨씬 나아진 사진을 보면, 얼마나 현장에서 공을 들였을지 상상이 가고요. 실제 현장에서는 어떠셨나요?
“제가 사진을 못 찍는 걸 너무 잘 알아요. 카메라 기종이 훌륭한 것도 아녜요. 만약에 사진이 좋았다면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현장에서 노력했기 때문일 거예요. 언제나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남들이 그 장소에서 세 번 찍을 때, 저는 삼백 번 찍어요. 그러면 삼백 번 찍는 동안 우연히 비둘기가 날아가기도 하고, 우연히 벚꽃이 휘날리며 떨어지기도 해요. 직업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니까 구도는 자연적으로 익힌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처음에 사진을 남에게 보여 주는 게 자신이 없어서 사진을 잘 찍는 후배에게 먼저 보여 줬어요. 그 친구가 좋다고 하면서 덧붙인 말이 이랬어요. ‘한 사람이 일관되게 찍은 사진 같아요.’ 저는 그 말이 되게 좋았어요. 저만의 시선이 있다는 얘기니까. 지금 여행을 한 번 가면 4천~6천 장 찍어요. 제가 여행을 30번 이상 갔거든요. 그럼 이십만 번 정도 셔터를 눌렀을 거 아녜요.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아무리 어려운 책도 백 번 읽으면 이해가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웃음) 셔터를 이십만 번 눌렀으면 처음 찍는 사람보다 낫지 않겠어요?(웃음)”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 미련하다는 얘기 듣지 않으세요?(웃음)
“너무 많이 들어요.(웃음) 미련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가 나빠서 손발이 고생한다’ ‘몸으로 때운다’ ‘너를 보면, 기사를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발로 쓰는 것 같다’. 노동을 해서 쓴다는 뜻으로요.”
중요한 가치 아닌가요?
“그렇게, 믿어요.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고요. 첫 책 서문에도 썼는데 여행을 가면 저는 눈과 머리를 믿지 않아요. 제 발바닥을 믿거든요. 남들이 보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요. <비포 선라이즈>에 나왔던 빈 시민 공원에 가면 노숙을 해야 돼요. 그래야 성이 풀려요. 그때 경비원에게 두 번 쫓겨났어요. 한 번 쫓겨나서, 나가는 척하고 숲으로 쏙 들어갔는데 같은 사람에게 또 걸렸어요.(웃음) 창피했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렴풋이’라는 부사를 꼭 넣고 싶었어요
찾아가신 여행지가 대개 커플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아요. 그곳에 가 보면, 실제 커플들도 많이 찾아올 것 같은데, 그런 곳에서 혼자, 외롭진 않았나요?(웃음)
“기본적으로 제가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행을 혼자 가면, 아무래도 가라앉게 되죠. 게다가 여행을 가게 만드는 영화를 보면, 슬픈 장면을 주로 하고 있단 말이죠. 그 감정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노력까지 하게 되면. 여행 가서는 거의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상태가 돼요. 그러니까 당연히, 누가 건드리면 금이 쫘악 가면서 바닥에 파편으로 부서질 것만 같은 상태가 되니까…… 당연히 외롭죠.(웃음)”
여행기에 담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없나요?
“남들은 타이 예쁜 여자 가이드와 다니는데, 내가 가이드를 구하려고 하면 시커먼 남자 가이드가 오고(웃음) 그런 식이죠. 앙코르 와트를 갔는데 오토바이 한 대를 임대했어요. 운전사 청년도 구했는데, 그 친구가 오토바이를 하도 난폭하게 다뤄서 걔 허리를 꽉 잡고 다녔어요……. 이걸 남들이 보면 뭐라 그럴까?(웃음)”
여행을 떠나실 때 대충 계획을 짜고 가실 텐데요. 가장 예상치 못한 상황을 꼽아 보자면 언제였나요?
“티베트요. 고산병이 있잖아요. 이뇨제를 먹고 갔는데도, 내린 뒤 한 시간부터 완전히 인사불성 상태가 됐어요, 코피가 줄줄 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숨이 안 쉬어지고요. 제가 도착한 날이 또 하필이면, 12월 31일 마지막 날이었어요. 사람들이 폭죽 잔치를 하는데, 몸이 아프다고 취재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갔는데, 폭죽에 정통으로 맞았어요. 완전히 꼼짝 못할 만큼 안 좋은 상황이 된 거죠.
새벽 내내 앓다가, 병원에 가야겠는데 1월 1일이라고 모든 병원이 다 문을 닫은 거예요.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 간신히 앰뷸런스를 불렀어요. 딱 3일 있었는데, 응급실을 여러 번 다녀왔어요. 심지어 응급실에서 돈도 갈취당해 봤어요. 안 좋은 일은 다 겪은 거죠. 티베트 여행기는 완벽한 취재 실패기인 셈이죠. 그런데 거기서 얻는 게 또 있더라고요.”
무엇이었나요?
“실패의 기록도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고요. 거기서 잊지 못할 한 순간이 있었어요. 이번에 『천일의 몽상』을 보면 그 OST에 아일랜드 가수인 ‘피욤리간’(Fionn Regan)의 「더 카우셰드(The Cowshed)」를 티베트에 매칭해 넣었어요. 그 이유가 그때 경험 때문이에요. 티베트에서 가장 중요한 관광지이자 성소가 포탈라궁인데, 몸이 아파도 거기는 가야 되겠더라고요. 궁이 언덕 위에 있어요. 완전히 엉금엉금 기어서 포탈라궁 앞 벤치에 쓰러졌어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데, 얼굴도 안 가리고 쓰러져 잤어요. 그런데 무슨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뚱뚱뚱. 눈을 떴더니 제 앞에서 한 아이가 연주랍시고 두들기고 있어요, 걸인이죠. 나이가 한 여덟, 아홉? 차림새가 남루하고, 콧물이 매달려 있고, 머리의 수건은 걸레 같고. 악기라는 건 스티로폼으로 연결을 한 나무 막대기에 빨랫줄 두 개를 걸어 놓은 거예요.
아이의 표정이 한 여든 살 먹은 노인 표정이에요. 텅 빈 표정인데. ‘내가 연주했으니까 빨리 돈 줘’ 하는 표정이죠. 돈을 줬어요. 그때 걔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거예요. 일단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그래서 더 감상적이 된 거죠. 이 차가운 별의 한구석에서 얘와 나는 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장면이 제 모든 여행을 통틀어서 가장 강렬한 경험 중 하나예요. 그 아이를 보고 느낀 감정으로 고른 곡이 「더 카우셰드」라는 곡이고요. 티베트에서는 그런 게 남았죠. 저에겐 포탈라궁도 안 남았고, 그 아이의 얼굴 하나 남았어요.”
여행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허망하다. 가져온 사진 몇 장의 희미한 평면 추억과, 두고 온 잡다한 물건들의 잊혀져가는 잔영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렀던 누군가의 순간은 영겁 속에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그리고 무너진 돌탑과 희미해진 낙서, 녹슨 자물쇠와 닳아버린 동전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운 여행자의 눈동자를 텅 빈 세월의 이명 속에서 무심하게 맞는다.(p.208)
『필름 속을 걷다』는 “여행을 떠나면 일종의 고행상태에 돌입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번 책을 보고는 여행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에서는 여행을 조금은 더 편안하게 느끼는 듯하달까요? 실제로 두 책 사이에 여행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게 있었나요?
“네, 맞아요. 그러려고 노력했고요. 제가 블로그를 명랑, 쾌활 모드로 운영하고 있는데 그건 제 삶이 그렇다기보다, 제 슬픔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죠. 안 좋은 얘기는 안 쓰는 거예요. 이 책이 지난번보다 조금 더 밝아졌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렇게 봐 주셨다면 감사하고요. 더 밝아져야 될 텐데(웃음) 제가 워낙 칙칙해요.”
책 속에서 꿈, 몽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재미있는 건 여행 중에 끊임없이 자신에게 ‘지금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는 점이었어요. “이 여행은 판타지로서의 중심에서 시작해 리얼리티로서의 주변에서 끝나야 했다.”(p.19) 등등의 정언(定言)도 많고요. 마치 꿈속에서 ‘이건 꿈이야. 꿈이야’ 되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 꿈같은 여행을 현실로 각인시키려는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럴 수 있어요. 그것도 이 책의 핵심인 것 같은데요. 인생이 꿈같잖아요. 여행도 그렇더라고요. 이 책 원고를 다 쓰고, 마지막으로 매만지는데, 마치 남의 여행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여길 정말 갔다 왔나?’ ‘내가 <맘마미아> 사진 빌려서 예배당에 올라갔다 온 척한 것 아닌가?’ ‘혹시 내가 꿈을 꾼 게 아닌가?’ 이런 느낌이 계속 들었어요. 그런 생각들 때문에 『천일의 몽상』이나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같은 제목이 나온 것 같아요. 책 제목에서 ‘꿈을 꾸다’라는 말은 ‘어렴풋이’라는 부사에 들어 있는 거잖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제목은 그냥 ‘어렴풋이’였어요. 책에 꼭 그 단어를 넣고 싶었어요. 발음도 어렵고 잘 안 쓰는 말이잖아요. YES24에서 검색을 해봤어요. ‘어렴풋이’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 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책이에요.(웃음) 기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나는 이런 한심한 데서 보람을 찾는데(웃음) 괜히 뭔가 한 것 같더라고. ‘어렴풋이’란 단어에게 밥 한번 얻어먹어도 될 것 같은.(웃음)”
여행-꿈-영화가 한 맥락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제목부터 시작해서, 책을 덮을 때까지.
“맞아요. 영화도 맥락을 잃어버리는 영화가 못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영화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래요. 영화를 더 많이 볼수록 정말 중요한 건 리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도 리듬 있게 쓰고 싶고요. 한 문장 안에서도 리듬을 만들고 싶고요. 문장들이 모인 절에서도 리듬을 만들고 싶고, 크게는 책 한 권에서도 리듬을 만들어 내고 싶어요.”
기자님의 인생은 어떤가요?
“인생은 좀 다른 것 같아요.(웃음) 훌륭한 사람들은 리듬이 있어요. 지난번에 이 책 출판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누군가 비슷한 질문을 했어요. 그때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막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말인 것 같아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점점 나아지는 게 있다면 무엇입니까? 반대로 떠날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일은 무엇인지요?
“점점 나아지는 건 사진 실력이고요. 떠날 때 마다 점점 나빠지는 건 체력이에요.(웃음) 이번 인도 여행에 다녀와서, 정말 실감했어요. 남들이 동안이라고 해서 속고 있었는데.(웃음)”
어떤 순간에도 솔직해야 된다고 믿어요
이전의 인터뷰에서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이 특정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더 중요해질 때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동진 기자님이 영화를 읽어 내는 세계관은 어떻습니까?
“일반인은 그런 게 좋겠지만, 영화평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해서 영화를 보는 건 좋지 않은 방법 같아요. 가장 안 좋은 평은 잣대가 하나밖에 없는 평이에요. 이를테면 페미니즘 시각에서 평을 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모든 영화를 페미니즘을 기준으로만 비평한다면 그건 이상한 평이겠죠. 평하는 사람은 잣대가 유연해야 된다고 봐요. 저는 기본적으로 약속을 지키는 영화들이 좋아요. 그게 잘 만든 영화 같아요. 약속을 잘 지킨다는 건, 이런 거예요. 영화는 초반에 어느 정도 약속을 제시하거든요. 코미디 영화라면 캐릭터의 황당한 상황을 보여 주면서, ‘이 캐릭터를 통해서 당신을 즐겁게 해 줄게’라고 약속을 하는 거고, 잉마르 베리만이라면 처음부터 사람을 기죽이겠죠. 거기서도 실존주의적인 고민을 던져 줄 거고요. 그런데 많은 영화들이 스스로 그 약속을 팽개치고, 모른 척해요. 기껏 코미디를 벌이고 뒤에 가서 감동으로 치장한다면, 이건 사실 웃기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약속을 지키면 기본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럼 ‘기자님이 좋아하는 영화’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입니까?
“질문을 주는 영화들이 좋아요. 많은 영화들이 해답을 주려고 하거든요. 영화 끝날 때 연설이 나오는 영화가 제일 싫고요. ‘이것은 이것이었어’라고 답을 쥐여주는 영화가 싫어요. 영화를 보고 나면 나 스스로 물음이 솟아나는 영화가 있잖아요. ‘저건 왜 그랬을까?’ ‘그래서 이것은 어떻다는 거지?’ 이런 식의 물음 속에서 내가 영화를 통해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 영화. 의미의 여백이 있는 영화들이 좋아요.”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는요?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내용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거라면 굳이 예술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을 어떤 형식에 담았을 때 예술이 되는 것 같고, 내용만 좋다면, 정치적인 메시지나 할머니의 이야기로 다뤄져도 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서 <경계도시 2>라는 영화가 좋았던 것은, 감독의 격렬한 회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점이었어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니까 상황을 조작할 수 없잖아요.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전략을 짜서 찍는데, 송두율 교수의 방한을 둘러싼 상황이 완전히 급변하면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는 거예요. 감독도 이걸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몰라서 눈앞이 마구 흔들리는데 어쨌건 찍긴 찍었어요. 그 후에, ‘내가 대체 뭘 찍었지?’ 하는 성찰이 영화에 담겨 있어요.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지점이거든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광기로 물든 사회냐, 얼마나 레드 콤플렉스로 휩싸인 사회냐,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좋았지만, 그 형식이 이 영화를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거죠. 어떤 영화가 좋은 이야기를 해서 좋은 영화인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인간의 추악한 악마성에 대한 얘기라고 해도, 유의미한 형식으로 얘기하면 훌륭한 영화일 수 있다는 거예요.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거죠.”
영화 비평을 할 때는,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평을 쓰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솔직한 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으세요?
“비평에 있어서는, 어떤 순간에라도 솔직해야 된다고 믿어요. 그러려고 노력해요. 솔직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백 퍼센트 솔직한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다짐을 계속 해요. 제가 벌써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잖아요. 영화를 만드는 분들 대부분을 알고 있어요. 하다못해 지나가다 인사를 몇 번 나눴을 거고, 어떤 사람은 술을 산 적도 있고, 같이 여행을 갔던 사람도 있고 하니까, 어떤 영화가 나오면 그 친소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데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평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글 때문에 인간관계도 여러 번 망쳐 봤고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제 직업윤리라고 생각해요.
비평이라는 것은 한 작품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잖아요. 영화를 보면 어떤 감정이 들잖아요. 비평은 여기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왜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아주 쓸쓸한데도 결국은 슬픔이 아니고 그게 힘이 되더라’,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잖아요? ‘내가 왜 그랬지?’ <밀양>을 예로 든다면, 첫 장면에서 강렬한 햇볕이 쏟아졌지만, 그것이 차 유리창을 통해서 묘사가 되는데, 맨 마지막에는 초라한 마당일지언정 직접적인 햇발이 인물에게 쏟아져요. 이런 식의 방법들을 따져 보는 거죠.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보고 느꼈던 최초의 감정들에서 시작돼요. 결국 영화평은, 최초의 감정에 대한 평론적인 알리바이라고나 할까요? 정직해야 한다고 봐요.”
많은 영화를 봐 온 만큼 많은 영화 관련 글을 써 왔는데,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꼈던 적은 없었나요? 영화도 몰아서 보게 되면, 비슷비슷해 보일 수도 있고,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건 처음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워요. 매 순간 어렵고, 저는 결코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서 일필휘지로 휘갈겨 쓰거나, 30분이면 뚝딱 써 내거나 하지 못하고요. 쓸 때마다 고통스럽게 써요. 반면 쾌감도 있고 보람도 있어요.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구나’라고 아직 느끼고 있고요. 영화를 보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500일의 썸머> <공기인형> <시리어스 맨> 같은 영화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거든요. ‘아, 아직은 내가 이걸로 계속 밥벌이를 해도 되는구나. 내가 누구를 속이지는 않는구나’ 싶죠. 영화를 비평하는 일이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그만둬야죠. 그건 민폐를 주는 일이니까요.”
좋은 인터뷰는 준비하는 시간과 비례해
‘인터뷰어 이동진’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나요?
“인터뷰의 테크닉은 없다고 생각해요. 척 보기만 해도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고, 핵심을 끄집어내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그렇게 보이도록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에요. 저도 인터뷰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인터뷰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때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어의 경력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느껴요. 인터뷰 잘한다는 게 뭐예요? 그 사람이 다른 데서 안 했던 말을 하게 하고, 잘 정리해서 그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잘 읽어 내는 거죠. 인터뷰에 테크닉은 없어요. 다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의 성실성과 독법이 있을 뿐이죠. 성실한 사람이 인터뷰를 잘하고, 인터뷰 대상을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잘하죠.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어가 준비하는 데에 쏟은 시간과 일반적으로 비례해요.”
처음 인터뷰할 때와 지금, 인터뷰어로서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신가요?
“저는 예전보다 인터뷰를 훨씬 잘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인즉, 제가 예전에 인터뷰를 할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고 있어요. 신문사에 있을 때는 인터뷰에 한계가 있거든요. 아무리 와이드 인터뷰를 해도, A4 용지로 한 장 반이에요. 준비도 거기에 맞춰서 하게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도 저는 비교적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한 인터뷰들은 제가 봐도 못했어요. 그때 제가 어리고 통찰력이 없어서, 숫기가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인터뷰를 위한 노력을 덜했기 때문이죠. 인터뷰가 나아졌다면, 지금은 손발이 무지막지하게 고생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일 거예요.”
반갑네요. 어떤 분들이라면, 맨 처음에 고생했지만, 점점 쉬워지고 있다고 하실 것 같은데, 기자님은 점점 더 고생스럽다고 하시네요.(웃음) 사람들이 이동진이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바가 있잖아요. 영화 평론을 계속 쓰고 계속 쓸 것 같은 사람, 믿음직한 글을 쓰는 사람. 어떻게 ‘이동진 스타일’이 만들어졌다고 보십니까? 이를테면 성실함이라든지 남다른 감수성을 들 수 있을 것 같고요. 엄청난 양의 독서나 음악 등의 요소도 포함될 것 같고요. 어떠세요?
“참 모르겠어요. 어떤 분들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나를 믿는구나, 그건 느껴요. 이 말은 그분들의 견해와 내 견해가 다를 경우에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 하고 그분들이 생각하신다는 거죠. 정말로 고마운 일이고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복 받았다는 생각을 해요.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고요. 제가 잘했다기보다 남들이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뭐든, 막연하게 직업인으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자극적인 독설을 쓰면, 처음에는 시원하고 좋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글쓰기는 기술로 보면 쉬워요. 단기간에는 그게 빛날 수 있어요. 헌데 자극적인 향신료를 많이 넣은 음식은 쉽게 물려 버리잖아요. 제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그런 어떤 단기적인 환호와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소설가나 평론가나. 다 그럴 거예요.
재미없는 영화를 완전히 쓰레기라고 박살을 내 버리고, 좋을 때는 ‘당신, 이 영화를 보고 안 좋다고 하면, 영화 볼 줄 모르는 거’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죠. 내가 어떤 영화를 안 좋게 봤어요. 그런데 평론가란 사람도 그렇게 말을 해 주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하죠. 하지만 그런 건 오래 못 간다는 거죠. 예를 들면 그런 거죠. 그런 솔직함에 관한 것. 이런 것들을 지키려고 했던 게 장기적으로 신뢰를 준 게 아닌가. 만약에 신뢰가 있다면 말이죠…….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이런 얘기 하면 웃기잖아요.(웃음) 전국에 최소한 15명은 있다고 가정하고 말이죠.”
시간의 먼지가 덜 묻은 글을 쓰고 싶다
인생을 한 편의 영화라고 했을 때, 본인의 영화를 20자 평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어요. 도로시 파커라는 미국 문필가가 있는데, 그녀가 묘비명을 이렇게 썼대요.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훌륭하다고 생각했죠.(웃음) 저도 사과하고 싶어요.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빨간 안경테를 특별히 선호하시는 까닭이 있나요?
“제가 빨간색을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분이 너무 다운되니까, 안경테를 색깔별로 사서 매일 바꿔 썼어요. 기분이 좀 좋아지더라고요. 번갈아 쓴다고 썼는데, 유독 빨간색을 자주 끼게 되더라고요.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거죠. 상대적으로 어울리는 것 같고요. 늙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빨간 안경이 이동진 기자의 일면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무난한 외모인데도, 빨간 안경 때문에 얼굴이 눈에 탁 띄는 것처럼요. 늘 겸손하고, 스스로 낮추는 태도에도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은 선명하게 드러내시잖아요. 자기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셀러브리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색깔, 브랜드를 명확히 구축해 가시고요. 빨간 안경이 그런 것의 상징 같아요.(웃음)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방송인이 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요. 빨간색 안경으로 브랜딩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끼다 보니 그게 나아서 끼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하신 부분이 맞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나 이중적인 측면이 있으니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노래방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걸 수도 있고.(웃음) 그게 빨간색이라는 상징이 될 수 있죠. 또 하나는, 여자들은 시선을 분산시킬 때 화려한 액세서리 하지 않아요? 제가 훌륭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니까 사람들이 빨간 안경을 보느라고 얼굴 안 보겠지, 이런 생각도 있을 수 있고요.”
빨간색처럼 스스로 노출시키는 의외성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캐스트 어웨이> 속 사진이라든지 이 책에서도 그런 일면을 봤는데(웃음) 그게 기자님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런가요? 변태를 좋아하시는구나.(웃음)”
늘 ‘꿈이 없다’고 말씀하시는(웃음) 이동진 기자의 로망은 뭔가요?
“꿈과 로망의 차이는 뭔가요?”
로망은 좀 더 허무맹랑한 거죠.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 꿈이랄까요?
“비틀스가 최초로 명성을 얻은 게 리버풀의 ‘더 캐번’이라는 작은 술집이었어요. 30~40석 규모인데, 폴 매카트니가 밀레니엄을 맞는 날, 깜짝 콘서트를 했어요. 백오십 명을 뽑아서 스탠딩 공연을 했대요. 그 얘길 듣고 ‘아니, 저기 참여한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성업을 쌓은 거야?’ 싶었거든요.(웃음) 비틀스가 재결합 공연을 하는데 딱 10명을 초대한다고 했을 때, 거기 초대받고 싶어요. 거기에 핑크 플로이드까지 듀엣 공연을 한다고 하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웃음) 그게 제 로망.”
어떤 글을 쓰고 싶습니까? 그리고 어떤 글을 남기고 싶습니까?
“글이 남는다는 것이 허망한 삶에서 그래도 어떤 뿌듯함을 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싫을 것 같기도 해요. 내가 특정한 시공간에서 쓴 글들이 그때의 맥락을 떠나, 수십 년 뒤에도 남아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요. 다만 지금 저는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ㅡ이 말은 먹고살기 위해 쓴다는 의미만은 아니고요ㅡ저는 상대적으로 글을 쓸 때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쓸 뿐이에요. 저는 근시안이라서 20년 뒤에 내 글이 어떻게 남을지 잘 모르겠어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어요.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먼지가 덜 묻은 문장이요. 이를테면, 제가 싫어하는 표현 중 하나가 ‘2퍼센트 부족하다’는 말인데, 처음 누군가 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쉽게 그 말을 붙여요. 실제로 2퍼센트 부족한 맥락도 아니거든요. 글을 보면. 실제로 27퍼센트쯤 부족하다고 써 놓고, 2퍼센트 부족하다고 말을 맺는데, 그것은 게으른 비유라고 생각해요. 말에 묻을 수밖에 없는 시간의 먼지를 최대한 닦아 내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그런 문장을 쓰지만 말이죠.”
울룰루가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코넬란 공항에 이런 글귀가 써 있다고 하셨죠. ‘이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해보세요’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세요?
“악기 배우는 일이요. 실제로 음악을 되게 좋아하는데 들을 줄만 알지 할 줄을 모르거든요. 동생이 음악을 전공해서, 저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게을러서 못 했어요. 만약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악기를 배울 거예요. 기회와 여건이 된다면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작곡도 하고 싶어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노래는 만들어 보고 싶어요.(웃음)”
바깥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가 이 박물관의 이름이 ‘비틀스 이야기’였다는 것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온몸이 찌릿해졌다. 흘러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 비틀스의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다. 비틀스의 자취를 밟으며 다녔던 나의 길지 않은 이야기도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남겨진 이야기를 누군가가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 그 이야기는 불멸한다.(p.282)
여행이 꿈과 몽상에 비유될 수 있다면, 여행은 영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여행도 한 편의 영화처럼 다뤘다.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에서 그는, 자신의 꿈의 기록을 낱낱이 풀어냈다. 그를 스치고 간 기억들을 활자로 화석화했다. 그는 ‘과연 내가 이곳에 다녀왔을까’라고 서문에서 되물었고, 이날에도 ‘이 기록이 남의 여행기 같다’는 말을 했지만, 그 때문에 나는 이 기록을 나의 기억처럼 읽어 내려 갈 수 있었다. 마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설렘을 느끼고, 그곳의 풍경을 상상했다. “모든 사랑은 생의 한가운데서 머묾으로써 주변부를 중심으로 바꾸어낸다. (…) 결국 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선을 소유한 자가 디디고 선 자리일 테니까.”(p.31) 세상의 중심이라는 울룰루에는 가 보지 않았지만, 그곳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는 동안 그의 꿈이 순간순간 나의 현실로 체험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혹은 나는 ‘목적’을 이뤘다.
영화 여행, 할 수 있는 한 영화와 같은 상황에 처해 보는 거죠
최근에 <더 폴> 촬영지인 인도에 다녀오셨어요. 어떠셨나요? 워낙 장대한 풍경이 있는 곳이라 무조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더 폴>을 보면 ‘저런 장소가 진짜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잖아요. 거기 있다는 걸 알고 갔는데도 신기했어요.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던 찬드바오리는 더 의미 있었어요. 찬드바오리로 가는 도로에서 카스트 최하층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며칠 동안 도로를 점거했어요. 그래서 2번이나 시도했다 취소되고, 떠나는 날 새벽에 갈 수 있었어요. 평상시면 대여섯 시간이면 될 걸 열두 시간을 갔어요, 워낙 시골 길인 데다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가면서 길을 백 번쯤 물어봤거든요. 간신히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는데, 찬드바오리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거예요. 그 순간 짜릿하죠. 영화 출장을 가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런 순간이에요. <맘마미아>를 촬영한 섬에 갔을 때도 그랬죠. ‘이런 데 아기오스 요아니스 예배당이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헤맸는데, 갑자기 해안 절벽 성당이 눈앞에 딱 나올 때!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동진 여행기’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요?
“영화라는 매체를 즐길 때, 어떤 사람은 서너 번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뛰쳐나가 카메라를 잡고 영화감독이 되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마지막 꿈은 없는 사람이거든요. 이 여행은 영화를 사랑하는 저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다 좋아하는 건 아녜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하 <세중사>) 같은 경우는 울룰루에 가고 싶어서 영화를 선택했고, 잉마르 베리만의 <묘지를 간 여정>은 제가 존경하는 예술가를 향한 제 나름의 경의의 표시고요. <원스> 같은 경우, 그 영화를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는 방식으로써의 여행이죠. 그게 다른 사람에게 대리 만족도 되고, 봐서 나쁘지 않았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죠.”
무인도의 낭만과 공포, 절해고도의 한자어 ‘절’은 절경과 절망이란 단어 모두에서 사용된다. 이를테면 우리를 매혹시키거나 좌절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망망대해 위의 그 무엇이다. 무인도에서 1박 2일을 지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그 섬이 바로 <캐스트 어웨이>의 무대였다면? 짧고 제한적인 경험이지만, 나는 그 섬에 머무는 동안 가급적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톰 행크스)이 겪었던 방식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p.160)
여행지에서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보셨는데요. 무엇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었나요?
“영화 무드에 젖어 여행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연기와 비슷해요. 역할 놀이 같은 거죠. 예를 들면, <세중사>를 위해 울룰루와 일본의 아지초 마을에 갔어요. 순수하고 덜 익은, 십 대의 풋사랑에 관한 영화잖아요. 그런 무드에 젖으려고 노력하죠. 그러지 않으면 이런 여행을 굳이 갈 필요가 없죠. 이때 영화 속 상황과 일치한 심리 상태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몰고 가기도 하지만, 주인공과 비슷한 일을 하면 가장 쉽게 그렇게 돼요. 가장 극단적으로 흉내 냈던 미친 짓이 <캐스트 어웨이>였고요. 그러고 나면 극중의 척이라는 인물의 상황을 정말 잘 알게 돼요.
배구공도 일부러 사서 갔고, 손에 피범벅을 할 수 없어서 포스터 칼라도 가져가고, 심지어 망사가 필요해 어린애 원피스를 피지에서 사 갔어요. <캐스트 어웨이>의 상황도 그런 거잖아요. 소포 중에 그런 게 있다고 가정하는 거죠. 제가 손재주가 되게 없는데 나뭇가지를 두 개 구해서, 망사를 묶어 그물이랍시고 만들었어요. 내가 봐도 한심하더라고요. 그걸로 고기를 잡으려고 하니, 세상에 어떤 눈먼 고기가 그 그물에 걸리겠어요. 두 시간 동안 휘젓고 다니다가 바위에 부딪쳐 다리가 피범벅이 되고 그랬어요. 안 될 걸 알고도 그렇게 하는 거죠. 제가 아주 어렵게, 많은 돈을 지불해서 무인도에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음풍농월하다 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웃음)”
처음에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어서 <캐스트 어웨이> 여행이 테마 기행인 줄 몰랐어요. 혼자 갔을 텐데, 이렇게 기이한 위치에서 자기 사진을 찍다니 싶어서…… 무섭더라고요.(웃음)
“설마요.(웃음) 기본적으로 제 책 속에는 제 사진을 잘 안 넣어요. 다만 그 여행은 제가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난 경우라 제 사진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대신 얼굴이 안 나오는 것만 썼어요.”
책에서도 특유의 성실성이 드러납니다. 꼼꼼한 기록과 감상은 성실한 메모 덕에 가능했을 것 같고, 지난번 책보다 훨씬 나아진 사진을 보면, 얼마나 현장에서 공을 들였을지 상상이 가고요. 실제 현장에서는 어떠셨나요?
“제가 사진을 못 찍는 걸 너무 잘 알아요. 카메라 기종이 훌륭한 것도 아녜요. 만약에 사진이 좋았다면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현장에서 노력했기 때문일 거예요. 언제나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남들이 그 장소에서 세 번 찍을 때, 저는 삼백 번 찍어요. 그러면 삼백 번 찍는 동안 우연히 비둘기가 날아가기도 하고, 우연히 벚꽃이 휘날리며 떨어지기도 해요. 직업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니까 구도는 자연적으로 익힌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처음에 사진을 남에게 보여 주는 게 자신이 없어서 사진을 잘 찍는 후배에게 먼저 보여 줬어요. 그 친구가 좋다고 하면서 덧붙인 말이 이랬어요. ‘한 사람이 일관되게 찍은 사진 같아요.’ 저는 그 말이 되게 좋았어요. 저만의 시선이 있다는 얘기니까. 지금 여행을 한 번 가면 4천~6천 장 찍어요. 제가 여행을 30번 이상 갔거든요. 그럼 이십만 번 정도 셔터를 눌렀을 거 아녜요.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아무리 어려운 책도 백 번 읽으면 이해가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웃음) 셔터를 이십만 번 눌렀으면 처음 찍는 사람보다 낫지 않겠어요?(웃음)”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 미련하다는 얘기 듣지 않으세요?(웃음)
“너무 많이 들어요.(웃음) 미련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가 나빠서 손발이 고생한다’ ‘몸으로 때운다’ ‘너를 보면, 기사를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발로 쓰는 것 같다’. 노동을 해서 쓴다는 뜻으로요.”
중요한 가치 아닌가요?
“그렇게, 믿어요.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고요. 첫 책 서문에도 썼는데 여행을 가면 저는 눈과 머리를 믿지 않아요. 제 발바닥을 믿거든요. 남들이 보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요. <비포 선라이즈>에 나왔던 빈 시민 공원에 가면 노숙을 해야 돼요. 그래야 성이 풀려요. 그때 경비원에게 두 번 쫓겨났어요. 한 번 쫓겨나서, 나가는 척하고 숲으로 쏙 들어갔는데 같은 사람에게 또 걸렸어요.(웃음) 창피했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렴풋이’라는 부사를 꼭 넣고 싶었어요
“기본적으로 제가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행을 혼자 가면, 아무래도 가라앉게 되죠. 게다가 여행을 가게 만드는 영화를 보면, 슬픈 장면을 주로 하고 있단 말이죠. 그 감정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노력까지 하게 되면. 여행 가서는 거의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상태가 돼요. 그러니까 당연히, 누가 건드리면 금이 쫘악 가면서 바닥에 파편으로 부서질 것만 같은 상태가 되니까…… 당연히 외롭죠.(웃음)”
여행기에 담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없나요?
“남들은 타이 예쁜 여자 가이드와 다니는데, 내가 가이드를 구하려고 하면 시커먼 남자 가이드가 오고(웃음) 그런 식이죠. 앙코르 와트를 갔는데 오토바이 한 대를 임대했어요. 운전사 청년도 구했는데, 그 친구가 오토바이를 하도 난폭하게 다뤄서 걔 허리를 꽉 잡고 다녔어요……. 이걸 남들이 보면 뭐라 그럴까?(웃음)”
여행을 떠나실 때 대충 계획을 짜고 가실 텐데요. 가장 예상치 못한 상황을 꼽아 보자면 언제였나요?
“티베트요. 고산병이 있잖아요. 이뇨제를 먹고 갔는데도, 내린 뒤 한 시간부터 완전히 인사불성 상태가 됐어요, 코피가 줄줄 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숨이 안 쉬어지고요. 제가 도착한 날이 또 하필이면, 12월 31일 마지막 날이었어요. 사람들이 폭죽 잔치를 하는데, 몸이 아프다고 취재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갔는데, 폭죽에 정통으로 맞았어요. 완전히 꼼짝 못할 만큼 안 좋은 상황이 된 거죠.
새벽 내내 앓다가, 병원에 가야겠는데 1월 1일이라고 모든 병원이 다 문을 닫은 거예요.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 간신히 앰뷸런스를 불렀어요. 딱 3일 있었는데, 응급실을 여러 번 다녀왔어요. 심지어 응급실에서 돈도 갈취당해 봤어요. 안 좋은 일은 다 겪은 거죠. 티베트 여행기는 완벽한 취재 실패기인 셈이죠. 그런데 거기서 얻는 게 또 있더라고요.”
무엇이었나요?
아이의 표정이 한 여든 살 먹은 노인 표정이에요. 텅 빈 표정인데. ‘내가 연주했으니까 빨리 돈 줘’ 하는 표정이죠. 돈을 줬어요. 그때 걔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거예요. 일단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그래서 더 감상적이 된 거죠. 이 차가운 별의 한구석에서 얘와 나는 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장면이 제 모든 여행을 통틀어서 가장 강렬한 경험 중 하나예요. 그 아이를 보고 느낀 감정으로 고른 곡이 「더 카우셰드」라는 곡이고요. 티베트에서는 그런 게 남았죠. 저에겐 포탈라궁도 안 남았고, 그 아이의 얼굴 하나 남았어요.”
여행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허망하다. 가져온 사진 몇 장의 희미한 평면 추억과, 두고 온 잡다한 물건들의 잊혀져가는 잔영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렀던 누군가의 순간은 영겁 속에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그리고 무너진 돌탑과 희미해진 낙서, 녹슨 자물쇠와 닳아버린 동전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운 여행자의 눈동자를 텅 빈 세월의 이명 속에서 무심하게 맞는다.(p.208)
“네, 맞아요. 그러려고 노력했고요. 제가 블로그를 명랑, 쾌활 모드로 운영하고 있는데 그건 제 삶이 그렇다기보다, 제 슬픔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죠. 안 좋은 얘기는 안 쓰는 거예요. 이 책이 지난번보다 조금 더 밝아졌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렇게 봐 주셨다면 감사하고요. 더 밝아져야 될 텐데(웃음) 제가 워낙 칙칙해요.”
책 속에서 꿈, 몽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재미있는 건 여행 중에 끊임없이 자신에게 ‘지금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는 점이었어요. “이 여행은 판타지로서의 중심에서 시작해 리얼리티로서의 주변에서 끝나야 했다.”(p.19) 등등의 정언(定言)도 많고요. 마치 꿈속에서 ‘이건 꿈이야. 꿈이야’ 되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 꿈같은 여행을 현실로 각인시키려는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럴 수 있어요. 그것도 이 책의 핵심인 것 같은데요. 인생이 꿈같잖아요. 여행도 그렇더라고요. 이 책 원고를 다 쓰고, 마지막으로 매만지는데, 마치 남의 여행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여길 정말 갔다 왔나?’ ‘내가 <맘마미아> 사진 빌려서 예배당에 올라갔다 온 척한 것 아닌가?’ ‘혹시 내가 꿈을 꾼 게 아닌가?’ 이런 느낌이 계속 들었어요. 그런 생각들 때문에 『천일의 몽상』이나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같은 제목이 나온 것 같아요. 책 제목에서 ‘꿈을 꾸다’라는 말은 ‘어렴풋이’라는 부사에 들어 있는 거잖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제목은 그냥 ‘어렴풋이’였어요. 책에 꼭 그 단어를 넣고 싶었어요. 발음도 어렵고 잘 안 쓰는 말이잖아요. YES24에서 검색을 해봤어요. ‘어렴풋이’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 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책이에요.(웃음) 기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나는 이런 한심한 데서 보람을 찾는데(웃음) 괜히 뭔가 한 것 같더라고. ‘어렴풋이’란 단어에게 밥 한번 얻어먹어도 될 것 같은.(웃음)”
여행-꿈-영화가 한 맥락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제목부터 시작해서, 책을 덮을 때까지.
“맞아요. 영화도 맥락을 잃어버리는 영화가 못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영화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래요. 영화를 더 많이 볼수록 정말 중요한 건 리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도 리듬 있게 쓰고 싶고요. 한 문장 안에서도 리듬을 만들고 싶고요. 문장들이 모인 절에서도 리듬을 만들고 싶고, 크게는 책 한 권에서도 리듬을 만들어 내고 싶어요.”
기자님의 인생은 어떤가요?
“인생은 좀 다른 것 같아요.(웃음) 훌륭한 사람들은 리듬이 있어요. 지난번에 이 책 출판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누군가 비슷한 질문을 했어요. 그때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막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말인 것 같아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점점 나아지는 게 있다면 무엇입니까? 반대로 떠날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일은 무엇인지요?
“점점 나아지는 건 사진 실력이고요. 떠날 때 마다 점점 나빠지는 건 체력이에요.(웃음) 이번 인도 여행에 다녀와서, 정말 실감했어요. 남들이 동안이라고 해서 속고 있었는데.(웃음)”
어떤 순간에도 솔직해야 된다고 믿어요
이전의 인터뷰에서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이 특정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더 중요해질 때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동진 기자님이 영화를 읽어 내는 세계관은 어떻습니까?
“일반인은 그런 게 좋겠지만, 영화평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해서 영화를 보는 건 좋지 않은 방법 같아요. 가장 안 좋은 평은 잣대가 하나밖에 없는 평이에요. 이를테면 페미니즘 시각에서 평을 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모든 영화를 페미니즘을 기준으로만 비평한다면 그건 이상한 평이겠죠. 평하는 사람은 잣대가 유연해야 된다고 봐요. 저는 기본적으로 약속을 지키는 영화들이 좋아요. 그게 잘 만든 영화 같아요. 약속을 잘 지킨다는 건, 이런 거예요. 영화는 초반에 어느 정도 약속을 제시하거든요. 코미디 영화라면 캐릭터의 황당한 상황을 보여 주면서, ‘이 캐릭터를 통해서 당신을 즐겁게 해 줄게’라고 약속을 하는 거고, 잉마르 베리만이라면 처음부터 사람을 기죽이겠죠. 거기서도 실존주의적인 고민을 던져 줄 거고요. 그런데 많은 영화들이 스스로 그 약속을 팽개치고, 모른 척해요. 기껏 코미디를 벌이고 뒤에 가서 감동으로 치장한다면, 이건 사실 웃기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약속을 지키면 기본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럼 ‘기자님이 좋아하는 영화’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입니까?
“질문을 주는 영화들이 좋아요. 많은 영화들이 해답을 주려고 하거든요. 영화 끝날 때 연설이 나오는 영화가 제일 싫고요. ‘이것은 이것이었어’라고 답을 쥐여주는 영화가 싫어요. 영화를 보고 나면 나 스스로 물음이 솟아나는 영화가 있잖아요. ‘저건 왜 그랬을까?’ ‘그래서 이것은 어떻다는 거지?’ 이런 식의 물음 속에서 내가 영화를 통해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 영화. 의미의 여백이 있는 영화들이 좋아요.”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는요?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내용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거라면 굳이 예술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을 어떤 형식에 담았을 때 예술이 되는 것 같고, 내용만 좋다면, 정치적인 메시지나 할머니의 이야기로 다뤄져도 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서 <경계도시 2>라는 영화가 좋았던 것은, 감독의 격렬한 회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점이었어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니까 상황을 조작할 수 없잖아요.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전략을 짜서 찍는데, 송두율 교수의 방한을 둘러싼 상황이 완전히 급변하면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는 거예요. 감독도 이걸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몰라서 눈앞이 마구 흔들리는데 어쨌건 찍긴 찍었어요. 그 후에, ‘내가 대체 뭘 찍었지?’ 하는 성찰이 영화에 담겨 있어요.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지점이거든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광기로 물든 사회냐, 얼마나 레드 콤플렉스로 휩싸인 사회냐,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좋았지만, 그 형식이 이 영화를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거죠. 어떤 영화가 좋은 이야기를 해서 좋은 영화인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인간의 추악한 악마성에 대한 얘기라고 해도, 유의미한 형식으로 얘기하면 훌륭한 영화일 수 있다는 거예요.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거죠.”
영화 비평을 할 때는,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평을 쓰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솔직한 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으세요?
“비평에 있어서는, 어떤 순간에라도 솔직해야 된다고 믿어요. 그러려고 노력해요. 솔직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백 퍼센트 솔직한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다짐을 계속 해요. 제가 벌써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잖아요. 영화를 만드는 분들 대부분을 알고 있어요. 하다못해 지나가다 인사를 몇 번 나눴을 거고, 어떤 사람은 술을 산 적도 있고, 같이 여행을 갔던 사람도 있고 하니까, 어떤 영화가 나오면 그 친소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데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평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글 때문에 인간관계도 여러 번 망쳐 봤고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제 직업윤리라고 생각해요.
비평이라는 것은 한 작품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잖아요. 영화를 보면 어떤 감정이 들잖아요. 비평은 여기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왜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아주 쓸쓸한데도 결국은 슬픔이 아니고 그게 힘이 되더라’,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잖아요? ‘내가 왜 그랬지?’ <밀양>을 예로 든다면, 첫 장면에서 강렬한 햇볕이 쏟아졌지만, 그것이 차 유리창을 통해서 묘사가 되는데, 맨 마지막에는 초라한 마당일지언정 직접적인 햇발이 인물에게 쏟아져요. 이런 식의 방법들을 따져 보는 거죠.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보고 느꼈던 최초의 감정들에서 시작돼요. 결국 영화평은, 최초의 감정에 대한 평론적인 알리바이라고나 할까요? 정직해야 한다고 봐요.”
많은 영화를 봐 온 만큼 많은 영화 관련 글을 써 왔는데,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꼈던 적은 없었나요? 영화도 몰아서 보게 되면, 비슷비슷해 보일 수도 있고,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건 처음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워요. 매 순간 어렵고, 저는 결코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서 일필휘지로 휘갈겨 쓰거나, 30분이면 뚝딱 써 내거나 하지 못하고요. 쓸 때마다 고통스럽게 써요. 반면 쾌감도 있고 보람도 있어요.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구나’라고 아직 느끼고 있고요. 영화를 보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500일의 썸머> <공기인형> <시리어스 맨> 같은 영화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거든요. ‘아, 아직은 내가 이걸로 계속 밥벌이를 해도 되는구나. 내가 누구를 속이지는 않는구나’ 싶죠. 영화를 비평하는 일이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그만둬야죠. 그건 민폐를 주는 일이니까요.”
좋은 인터뷰는 준비하는 시간과 비례해
‘인터뷰어 이동진’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나요?
“인터뷰의 테크닉은 없다고 생각해요. 척 보기만 해도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고, 핵심을 끄집어내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그렇게 보이도록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에요. 저도 인터뷰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인터뷰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때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어의 경력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느껴요. 인터뷰 잘한다는 게 뭐예요? 그 사람이 다른 데서 안 했던 말을 하게 하고, 잘 정리해서 그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잘 읽어 내는 거죠. 인터뷰에 테크닉은 없어요. 다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의 성실성과 독법이 있을 뿐이죠. 성실한 사람이 인터뷰를 잘하고, 인터뷰 대상을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잘하죠.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어가 준비하는 데에 쏟은 시간과 일반적으로 비례해요.”
처음 인터뷰할 때와 지금, 인터뷰어로서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신가요?
“저는 예전보다 인터뷰를 훨씬 잘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인즉, 제가 예전에 인터뷰를 할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고 있어요. 신문사에 있을 때는 인터뷰에 한계가 있거든요. 아무리 와이드 인터뷰를 해도, A4 용지로 한 장 반이에요. 준비도 거기에 맞춰서 하게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도 저는 비교적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한 인터뷰들은 제가 봐도 못했어요. 그때 제가 어리고 통찰력이 없어서, 숫기가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인터뷰를 위한 노력을 덜했기 때문이죠. 인터뷰가 나아졌다면, 지금은 손발이 무지막지하게 고생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일 거예요.”
반갑네요. 어떤 분들이라면, 맨 처음에 고생했지만, 점점 쉬워지고 있다고 하실 것 같은데, 기자님은 점점 더 고생스럽다고 하시네요.(웃음) 사람들이 이동진이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바가 있잖아요. 영화 평론을 계속 쓰고 계속 쓸 것 같은 사람, 믿음직한 글을 쓰는 사람. 어떻게 ‘이동진 스타일’이 만들어졌다고 보십니까? 이를테면 성실함이라든지 남다른 감수성을 들 수 있을 것 같고요. 엄청난 양의 독서나 음악 등의 요소도 포함될 것 같고요. 어떠세요?
“참 모르겠어요. 어떤 분들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나를 믿는구나, 그건 느껴요. 이 말은 그분들의 견해와 내 견해가 다를 경우에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 하고 그분들이 생각하신다는 거죠. 정말로 고마운 일이고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복 받았다는 생각을 해요.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고요. 제가 잘했다기보다 남들이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뭐든, 막연하게 직업인으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자극적인 독설을 쓰면, 처음에는 시원하고 좋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글쓰기는 기술로 보면 쉬워요. 단기간에는 그게 빛날 수 있어요. 헌데 자극적인 향신료를 많이 넣은 음식은 쉽게 물려 버리잖아요. 제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그런 어떤 단기적인 환호와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소설가나 평론가나. 다 그럴 거예요.
재미없는 영화를 완전히 쓰레기라고 박살을 내 버리고, 좋을 때는 ‘당신, 이 영화를 보고 안 좋다고 하면, 영화 볼 줄 모르는 거’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죠. 내가 어떤 영화를 안 좋게 봤어요. 그런데 평론가란 사람도 그렇게 말을 해 주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하죠. 하지만 그런 건 오래 못 간다는 거죠. 예를 들면 그런 거죠. 그런 솔직함에 관한 것. 이런 것들을 지키려고 했던 게 장기적으로 신뢰를 준 게 아닌가. 만약에 신뢰가 있다면 말이죠…….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이런 얘기 하면 웃기잖아요.(웃음) 전국에 최소한 15명은 있다고 가정하고 말이죠.”
시간의 먼지가 덜 묻은 글을 쓰고 싶다
인생을 한 편의 영화라고 했을 때, 본인의 영화를 20자 평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어요. 도로시 파커라는 미국 문필가가 있는데, 그녀가 묘비명을 이렇게 썼대요.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훌륭하다고 생각했죠.(웃음) 저도 사과하고 싶어요.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빨간 안경테를 특별히 선호하시는 까닭이 있나요?
“제가 빨간색을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분이 너무 다운되니까, 안경테를 색깔별로 사서 매일 바꿔 썼어요. 기분이 좀 좋아지더라고요. 번갈아 쓴다고 썼는데, 유독 빨간색을 자주 끼게 되더라고요.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거죠. 상대적으로 어울리는 것 같고요. 늙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빨간 안경이 이동진 기자의 일면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무난한 외모인데도, 빨간 안경 때문에 얼굴이 눈에 탁 띄는 것처럼요. 늘 겸손하고, 스스로 낮추는 태도에도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은 선명하게 드러내시잖아요. 자기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셀러브리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색깔, 브랜드를 명확히 구축해 가시고요. 빨간 안경이 그런 것의 상징 같아요.(웃음)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방송인이 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요. 빨간색 안경으로 브랜딩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끼다 보니 그게 나아서 끼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하신 부분이 맞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나 이중적인 측면이 있으니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노래방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걸 수도 있고.(웃음) 그게 빨간색이라는 상징이 될 수 있죠. 또 하나는, 여자들은 시선을 분산시킬 때 화려한 액세서리 하지 않아요? 제가 훌륭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니까 사람들이 빨간 안경을 보느라고 얼굴 안 보겠지, 이런 생각도 있을 수 있고요.”
빨간색처럼 스스로 노출시키는 의외성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캐스트 어웨이> 속 사진이라든지 이 책에서도 그런 일면을 봤는데(웃음) 그게 기자님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런가요? 변태를 좋아하시는구나.(웃음)”
늘 ‘꿈이 없다’고 말씀하시는(웃음) 이동진 기자의 로망은 뭔가요?
“꿈과 로망의 차이는 뭔가요?”
로망은 좀 더 허무맹랑한 거죠.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 꿈이랄까요?
“비틀스가 최초로 명성을 얻은 게 리버풀의 ‘더 캐번’이라는 작은 술집이었어요. 30~40석 규모인데, 폴 매카트니가 밀레니엄을 맞는 날, 깜짝 콘서트를 했어요. 백오십 명을 뽑아서 스탠딩 공연을 했대요. 그 얘길 듣고 ‘아니, 저기 참여한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성업을 쌓은 거야?’ 싶었거든요.(웃음) 비틀스가 재결합 공연을 하는데 딱 10명을 초대한다고 했을 때, 거기 초대받고 싶어요. 거기에 핑크 플로이드까지 듀엣 공연을 한다고 하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웃음) 그게 제 로망.”
어떤 글을 쓰고 싶습니까? 그리고 어떤 글을 남기고 싶습니까?
“글이 남는다는 것이 허망한 삶에서 그래도 어떤 뿌듯함을 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싫을 것 같기도 해요. 내가 특정한 시공간에서 쓴 글들이 그때의 맥락을 떠나, 수십 년 뒤에도 남아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요. 다만 지금 저는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ㅡ이 말은 먹고살기 위해 쓴다는 의미만은 아니고요ㅡ저는 상대적으로 글을 쓸 때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쓸 뿐이에요. 저는 근시안이라서 20년 뒤에 내 글이 어떻게 남을지 잘 모르겠어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어요.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먼지가 덜 묻은 문장이요. 이를테면, 제가 싫어하는 표현 중 하나가 ‘2퍼센트 부족하다’는 말인데, 처음 누군가 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쉽게 그 말을 붙여요. 실제로 2퍼센트 부족한 맥락도 아니거든요. 글을 보면. 실제로 27퍼센트쯤 부족하다고 써 놓고, 2퍼센트 부족하다고 말을 맺는데, 그것은 게으른 비유라고 생각해요. 말에 묻을 수밖에 없는 시간의 먼지를 최대한 닦아 내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그런 문장을 쓰지만 말이죠.”
울룰루가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코넬란 공항에 이런 글귀가 써 있다고 하셨죠. ‘이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해보세요’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세요?
“악기 배우는 일이요. 실제로 음악을 되게 좋아하는데 들을 줄만 알지 할 줄을 모르거든요. 동생이 음악을 전공해서, 저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게을러서 못 했어요. 만약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악기를 배울 거예요. 기회와 여건이 된다면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작곡도 하고 싶어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노래는 만들어 보고 싶어요.(웃음)”
바깥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가 이 박물관의 이름이 ‘비틀스 이야기’였다는 것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온몸이 찌릿해졌다. 흘러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 비틀스의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다. 비틀스의 자취를 밟으며 다녔던 나의 길지 않은 이야기도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남겨진 이야기를 누군가가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 그 이야기는 불멸한다.(p.282)
6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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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sunjue
2010.07.25
향기로운이끼
2010.06.20
촉촉지효
2010.05.20
정말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글이에요.^^
좋은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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