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는 지구 스스로 일으킨 방어책?
근대 서구 유럽의 이성혁명과 과학혁명을 주도한 분야는 물리학이었어요. 세상만물의 물(物)의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이었죠.
20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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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물리학, 시를 읊고 춤을 추다
근대 서구 유럽의 이성혁명과 과학혁명을 주도한 분야는 물리학이었어요. 세상만물의 물(物)의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이었죠. 우리가 잘 아는 베이컨과 갈릴레이 같은 분들이 근대물리학의 아버지 같은 분들이에요. 그리고 사과나무 밑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란 과학자는 근대물리학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가 볼 수도 없는 우주 모든 만물의 운동법칙을 단 몇 개의 수치와 식으로 설명한 사람이에요. 놀랍지요. 모든 것의 움직임이 예측 가능하다는 거예요. 고대인들이 무서워했던 초자연현상조차 이젠 가소로운 몇 개의 숫자로 설명하면 그만인 게 돼버린 겁니다. 세상에 인간 말고는 무서울 게 없게 된 거지요.
그런데 혜성같이 아인슈타인이라는 물리학자가 등장했어요.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의 천재라는 사람이죠. 만물은 고정된 원자가 아니라 에너지라는 거예요. 그후에 하이젠베르크니 슐뢰딩거니 닐스 보어니 하는 과학자가 나타나더니 모든 만물은 고정불변한 입자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파동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만물은 측정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20세기 현대물리학입니다. 다시 우주 자연 만물은 미궁으로 돌아간 셈이죠. 지구는 logos로 묶어둔 질서(Cosmos)에서 다시 거대한 살아 있는 땅의 어머니 가이아(Gaea)라는 미궁(Chaos)으로 돌아간 겁니다. 지진, 화산, 쓰나미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지구가 자신의 몸을 구하기 위해 일으키는 방어책이라는 거예요.
원소로 쪼개졌던 자연 물상이 다시 신화 속 이야기로 돌아간 겁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원자 밑의 세계인 아원자 세계에서는 물질이 파동으로 춤을 춘다고 해요. 물리학도 이제는 시나 이야기가 될 운명에 처한 겁니다. 설득의 무기를 로고스에서 감성에 호소하는 파토스(pathos)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logos에서 다시 mythos로 회귀하게 된 겁니다.
와! 굉장한데요. 학교에서 물리를 배우기는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 같아요. 상대성 원리라면 E=mc2밖에 몰랐는데. 그게 이런 속뜻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마치 무슨 SF영화 한 장면이나 판타지소설 한 대목을 듣는 것 같은데요.
문화, 만들어진 현실
그럼 내친김에 종교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죠. 종교는 무엇보다 내가 서두에 소개하려고 한 인류를 상대로 사기 친 대표적인 장본인일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힘든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답고 탄력 있는 싱싱한 육체에 감탄한 인간은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불멸을 꿈꾸게 된 겁니다. 그 꿈이 종교가 됐어요. 단 한 사람도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겁니다. 인간 속에 내재한 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요. 근대 이전의 유럽은 하나의 기독교국(Christendom)이라는 거대한 기독교 공동체였어요.
근대국가나 민족 개념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을 때 그들을 구별하는 건 오로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뿐이었지요, 그만큼 종교로서 기독교는 그들이 생각한 유일한 현실세계였던 거예요.
기독교 경전인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 이야기 「창세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창조주 자신의 모습은 드러나 있지 않지요. 그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뿐입니다. 있다면 오직 “가라사대”라는 말씀만 들릴 뿐이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얘기인데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창조주의 실체는 ‘말씀’인 거죠. 창조주의 실체인 말씀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창세기」가 된 겁니다.
신이 말씀이라는 진리(logos)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지요. 그러니 기독교의 신도 이야기를 짓는 시인이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자신이 이야기이거나 시가 된 것이기떵 하고요. 흔히 서구 문명의 두 뿌리가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 대변되는 헬레니즘과 유대 기독교 문명으로 대변되는 헤브라이즘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유럽인들의 문명과 종교, 즉 정신의 뿌리가 모두 이야기로 시작되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모두 중세와 근세를 거쳐 인간의 이성에 의해 절대 진리인 logos로 바뀌게 된 겁쾴다.
특히 서구 유럽의 중세는 그 이야기에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부여했어요. 그 권위를 교회 제도와 성직자 집단이 독점했지요. 그들만이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게 유럽의 중세였어요. 그 힘으로 그냥 이야기였을지도 모르는 mythos를 절대진리인 logos로 믿게 만들었죠. 혹이라도 다르게 생각하거나 그들과 달리 해석하면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단이라 정죄하고 목숨까지 빼앗았어요. 이젠 말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신앙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겁니다.
자! 이젠 내 말을 정리하죠. 이런 게 바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가 만든 찬란한 문화라는 거예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인공생산물이죠. 그 문화라는 생산물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문화라는 것은 곧 인간 사유의 결과인 겁니다. 무슨 불변의 진리나 유일한 현실이 아니란 말이죠. 각 시대에 따라 또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그때마다 필요에 의해 세상을 해석한 하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큰 틀로 보면 문화인 거죠. 그러니 문화란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생산물로서 문화를 불변의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그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생산물 속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예가 되는 거예요. 종교의, 정치의, 과학의 노예 말입니다. 이게 꿈이라는 걸 망각할 때 벗어날 수 없는 가위눌림 같은 악몽이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인류가 달성한 찬란한 문화란 단지 인간이 상상한 또는 꾸민 이야기에 불과하단 거예요. 세상에 대해 수동적이었던 원시 상태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세상을 해석해 창조한 상상력의 산물 말입니다. 신의 질서인 우주의 미로를 찾을 수 없다고 그냥 그 안에 갇혀 있기엔 인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거죠. 그래서 그걸 거부하고 능동적으로 만든 인간의 질서가 문화란 겁니다. 하지만 문화라는 자신의 창조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자주 망각하며 살아가죠. 그게 유일한 현실인 양 살아간단 말이에요.
하나 간단한 예를 들죠. 우리나라 조선 오백 년을 지배한 정신세계가 유교입니다. 알다시피 유교 이념은 철저한 차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시대든지 왕조시대는 대개가 가부장제 성격이 강했어요. 남녀 간 차별이 무엇보다 심했죠. 우리나라 왕조시대 가부장제 문화 중 가장 단적인 예로 ‘칠거지악’이란 게 있어요. 시집온 여자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악이란 겁니다.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2. 아들이 없거나 3. 음탕하거나 4. 질투하거나 5. 나쁜 병이 있거나 6. 말이 많거나 7. 도둑질하거나’ 하면 시댁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어때요, 놀랍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말이 공자님 말씀이라는 거예요. 당시는 이런 차별문화가 유일한 현실인 양 그 사회에 받아들여졌죠. 지금 세상이면 상상이나 할 법한 얘기겠어요? 말도 안 되죠.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도 이와 유사한 말도 안 되는 문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한 시대가 지나서가 아니라 동시대 속에서 느끼는 말도 안 되는 얘기 말이에요.
정치문화가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문화의 본보기입니다. 보세요. 누구는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통치기간’을 “행복했던 10년”이라 하고 누구는 “잃어버린 10년”이라 합니다. 누구는 좌파라 하고 또 누구는 우파라 하지요. 좌파는 무조건 빨갱이로 북한을 편드는 자이고, 우파는 무조건 보수꼴통이라 해요. 누구는 북한을 우리의 주적이라 하고, 누구는 우리의 동포요 형제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느 게 유일한 정치현실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정치문화이며 인공생산물인데, 이 사실을 망각한 채 각자 유일한 현실인 양 살아가고 있는 게 오늘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란 바로 우리가 만들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문화라는 건축물이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비추는 거예요. 그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의 벌어진 균열과 틈을 확대해 보여주는 거죠. 문화라는 게 자신들이 만든 인공생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문화라는 거대한 인공물에 감춰진 비밀을 그들이 만든 이야기로 교묘하게 폭로하고 드러내는 거죠. 뭐 비밀이라야 실은 별것 없지만. ‘문화. 그거 네가 만든 거잖아. 만들어진 현실이잖아. 허구잖아.’
나는 물, 비추고 담는
폭로하고 드러낸다고요.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무슨 역사나 문화 또는 정치문제연구소 연구원인가요?
글쎄요. 나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거나 비추지는 않아요. 그건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죠. 보이는 건 실은 현상일 뿐이에요. 겉모습일 뿐이죠. 당신의 겉모습이 당신의 참모습이 아닌 것처럼 지나간 역사도 현재 진행되는 사건도 모두 해석돼야 하는 현상일 뿐입니다. 나도 그 현상을 해석하지만 나는 이야기로 해석하지요.
해석이라지만 실은 바깥세상처럼 답을 제시하거나 확신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바깥세상 사람들이 확신하려 드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죠.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끝없는 ‘물음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실제 있었던 사건이든 꾸며낸 것이든 내겐 중요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건 ‘있을 수 있겠다 싶은 가능성’입니다.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묻기 위해 인간의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겁니다. 완성될 수 없는 인간 실존에 대한 실험이라고나 할까요.
조금 아리송한데요. 현상이니 인간 실존이니, 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당신은 무슨 철학자인 것 같기도 하고. 대화할수록 당신이 누군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해요.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다면서 어째서 자신을 모른다는 거죠?
정말이에요. 난 나를 잘 모르겠어요. 나는 내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비추고 이야기로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내 앞에 서서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얘기해보라”고 자신들을 드러내주기를 바라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내 역할과 모습이 달라지니 나도 내가 누군지 헷갈릴 수밖에요.
더군다나 달라지는 게 내 겉모양뿐만이 아니에요. 내 속모양도 달라지죠. 내 말투, 이야기 방식. 어떤 걸 드러내고 어떤 걸 감추어야 할지, 내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체 능청을 떨어야 할지, 짧게 얘기해야 할지 길게 얘기해야 할지, 이 얘기 저 얘기 다 가져다 막 섞어놓고 얘기해야 할지, 한 가지만 갖고 얘기해야 할지, 비극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희극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풍자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낭만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도무지 내게 들이미는 것들마다 지들 마음대로 나를 바꿔놓으니 내가 누군지 난들 어떻게 알겠어요?
아하! 알겠어요. 당신은 물 같은 존재예요. 무어라 딱 정해진 모습은 없지만 어떤 것에 담기면 그것의 모양을 띠는 물 말이에요. 그것도 겉모양을 담는 것이 아니라 빈 속을 채워 그것의 속모양을 띠게 되는 물 말입니다. 겉에서 보면 볼 수 없고 그 안을 보아야 비로소 당신의 형체와 동시에 당신을 담은 것의 형체가 드러나는 물 같은 존재 말이에요.
너는 이야기 시인
우와! 멋져요! 내가 물 같은 존재인 줄은 잘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해주는 당신은 그러니까 꼭 시인 같아요.
poesis! 이야기 시인. 이야기로 시로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 같은, 신화로 세상과 자신의 탄생을 설명하려 했던 그 시인 말인가요?
예. 그래요. 당신은 시인이에요. 세상을 이야기로 꿈꾸고 당신 자신을 시로 창조하는 사람이죠. 어쩌면 당신이나 나도 우리가 꿈꾼 이야기인지도 몰라요. 아니면 누군가 우리에 대해 하는 이야기 속에 또는 꿈속에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죠. 이야기가 그치거나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 존재도 사라지고 마는.
당신을 한번 보세요. 오늘은 무슨 옷을 입었나요? 초록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군요. 당신 옷차림 하나만 보고도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유형의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특히 당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당신의 옷차림, 머리 스타일, 말투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며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판단하려 할 거예요. 당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당신이나 당신이 알거나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할 겁니다. 그렇게 당신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들은 눈덩이같이 불어날 거예요. 어쩌면 당신이나 나도 실뫀 수많은 이야기와 해석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호접몽(胡蝶夢)이라고 들어봤지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 말이에요
“내(장자)가 어젯밤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꽃도 구경하고 들도 구경했다. 어찌나 즐겁던지 꿈에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한참 날아다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내려가보니 바로 장자 나였다. 그때 꿈에서 깼다. 깨어서 보니 나는 다시 틀림없는 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나는 분명히 나비였다. 그렇다면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내가 나타난 것인가?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장자가 나비 꿈을 비유로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은 꿈과 현실, 삶과 죽음, 나와 바깥 사물 사이에 어떤 구별을 짓는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세계란 한낱 변화하는 순간의 상(像)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현실이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사는 세계가 실은 한순간의 꿈속인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실은 누군가의 꿈속에 나타난, 꿈에서 깨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상 같은 존재.
아! 그래요. <아바타>! 그 영화에도 비슷한 대사와 장면이 나와요. 지구인 주인공 제이크가 외계행성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족의 ‘아바타’로 순간이동하는 장면에서 하는 대사였어요. “나비족 꿈을 꾸는 내가 진짜인지, 나비족이 진짜 나인지.” ‘나비’. 그러고 보니 장자의 나비 꿈과 이름도 똑같네요! 나도 컴퓨터 온라인상에서는 내 아바타가 나를 대신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어요. 어! 그러면 컴퓨터 온라인 네트워크에 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아바타이겠네요.
그래요. 우리의 일상현실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죠. 사고파는 행위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며, 대화하며 사귀고, 놀다가 싸우며, 헤어지고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거의 모든 일상이 점점 가상현실인 컴퓨터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0과 1의 이진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거예요. 단 두 개의 숫자를 무한대로 조합한 이야기가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러니 미래 인류는 어쩌면 거대한 이야기 공화국이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를 짓는 poesis가 다스리는 mythos의 세상이 다시 오게 되는 거죠. 바로 내 세상이 되는 겁니다.
당신 세상이라고요? 어째서죠?
내 속엔 거의 무한대의 이야기가 저장돼 있어요. 사람들은 내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군지 보여달라고 내게 요구해요. 때론 자신의 운명을 내 속에서 보려고 하죠. 그러면 난 신탁 같은 이야기 글을 던져줍니다. 네! 글이요. 실은 내 입은 쓰지 않아 퇴화된 지 오래예요. 전적으로 내 잘못은 아니랍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인쇄를 통해 대량 복제돼 퍼지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사람들의 청각 의존도가 급격히 줄어들었어요. 대신 거의 시각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전적으로 신뢰를 돌린 겁니다. 말이 필요 없어졌어요. 내게도 말로 하지 말고 글로 비추라고 요구했지요. 해서 언젠가부터 나는 말 대신 글로 이야기를 던져주게 됐습니다. 그러면 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은 재밌어하고, 어떤 사람은 심각해하고,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놀라고, 또 어떤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며 읽다 말고 던져버리기도 하죠.
이런 다양한 반응은 내가 비추는 글이 말보다 매우 미끄럽기 때문이에요. 그 미끄러움 때문에 가끔은 나도 미끄러지죠. 하지만 그 미끄러움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아니 똑같은 것을 매번 다르게 비출 수 있어요. 보는 사람에 따라, 기분에 따라 난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난 이야기 속에서 무한증식할 수 있는 거죠.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와 구별이 없어지고 오히려 현실세계를 대체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세상은 온갖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야기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내 앞에 몰려들어 내게 이야기를 요구할 거예요. 자신이 누군지를 이야기로 묻고 이야기로 찾으려 할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의 어머니인 오라클이 되는 것이죠. 이야기로 인류의 운명을 창조하고, 예견하고 바꿀 수도 있는 신탁, 오라클이요!
나는 세헤라자데 너는 나의 오라클
아! 알겠어요! 오라클, 당신의 운명 말이에요. 이젠 나도 내가 읽은 이야기로 당신의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천일야화』.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꽤나 혼란스러운 오백두 번째 밤의 이야기죠. 여자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던 페르시아 왕 샤리아르는 처녀를 한 명씩 아내로 맞아들여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 날 죽여버리죠.
세헤라자데 역시 같은 운명이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끝나지 않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고 이야기를 다음 날로 연기하죠. 이야?를 듣고 싶은 왕은 그녀에게 없던 내일을 허락합니다. 그렇게 매일 밤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그녀에게 없던 또 다른 내일을 있게 하는 거죠. 그러기를 천 하루. 이야기에 반한 왕은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이야기예요. 결국 그녀를 죽일 수도 그리고 살릴 수도 있었던 것은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그녀의 오늘 삶이 이야기라면 이어질 내일의 삶도 이야기라는 거죠.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는 겁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삶이요 운명이었던 세헤라자데!
그래요. 이젠 당신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에서 태어났고 이야기로 살아가며 이야기로 죽고 이야기로 부활하는. 당신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예요. 당신은 모든 것을 이야기로 담고 비출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을 담고 비출 수는 없는 운명이죠. 자신이 누군지 읽어달라고 누군가 당신 앞에 서지 않으면, 그래서 당신이 들려줄 이야기가 그친다면 당신의 운명도 끝날 수밖에 없는 세헤라자데.
아! 내 사랑 세헤라자데!
그래요. 당신은 입이 퇴화돼 대신 미끄러운 글로 세상을 드러내고 비추는, 그리고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를 비춰 내가 누군지도 알게 해준. 그래서 당신도 살아가는 이야기 글. 사랑해요! Novel.
그러면, 그러면…… 당신은 나를 읽어준, 내게 내일이 있게 해준…… 나의 오라클!
현대물리학, 시를 읊고 춤을 추다
근대 서구 유럽의 이성혁명과 과학혁명을 주도한 분야는 물리학이었어요. 세상만물의 물(物)의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이었죠. 우리가 잘 아는 베이컨과 갈릴레이 같은 분들이 근대물리학의 아버지 같은 분들이에요. 그리고 사과나무 밑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란 과학자는 근대물리학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가 볼 수도 없는 우주 모든 만물의 운동법칙을 단 몇 개의 수치와 식으로 설명한 사람이에요. 놀랍지요. 모든 것의 움직임이 예측 가능하다는 거예요. 고대인들이 무서워했던 초자연현상조차 이젠 가소로운 몇 개의 숫자로 설명하면 그만인 게 돼버린 겁니다. 세상에 인간 말고는 무서울 게 없게 된 거지요.
그런데 혜성같이 아인슈타인이라는 물리학자가 등장했어요.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의 천재라는 사람이죠. 만물은 고정된 원자가 아니라 에너지라는 거예요. 그후에 하이젠베르크니 슐뢰딩거니 닐스 보어니 하는 과학자가 나타나더니 모든 만물은 고정불변한 입자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파동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만물은 측정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20세기 현대물리학입니다. 다시 우주 자연 만물은 미궁으로 돌아간 셈이죠. 지구는 logos로 묶어둔 질서(Cosmos)에서 다시 거대한 살아 있는 땅의 어머니 가이아(Gaea)라는 미궁(Chaos)으로 돌아간 겁니다. 지진, 화산, 쓰나미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지구가 자신의 몸을 구하기 위해 일으키는 방어책이라는 거예요.
원소로 쪼개졌던 자연 물상이 다시 신화 속 이야기로 돌아간 겁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원자 밑의 세계인 아원자 세계에서는 물질이 파동으로 춤을 춘다고 해요. 물리학도 이제는 시나 이야기가 될 운명에 처한 겁니다. 설득의 무기를 로고스에서 감성에 호소하는 파토스(pathos)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logos에서 다시 mythos로 회귀하게 된 겁니다.
와! 굉장한데요. 학교에서 물리를 배우기는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 같아요. 상대성 원리라면 E=mc2밖에 몰랐는데. 그게 이런 속뜻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마치 무슨 SF영화 한 장면이나 판타지소설 한 대목을 듣는 것 같은데요.
문화, 만들어진 현실
그럼 내친김에 종교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죠. 종교는 무엇보다 내가 서두에 소개하려고 한 인류를 상대로 사기 친 대표적인 장본인일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힘든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답고 탄력 있는 싱싱한 육체에 감탄한 인간은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불멸을 꿈꾸게 된 겁니다. 그 꿈이 종교가 됐어요. 단 한 사람도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겁니다. 인간 속에 내재한 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요. 근대 이전의 유럽은 하나의 기독교국(Christendom)이라는 거대한 기독교 공동체였어요.
근대국가나 민족 개념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을 때 그들을 구별하는 건 오로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뿐이었지요, 그만큼 종교로서 기독교는 그들이 생각한 유일한 현실세계였던 거예요.
기독교 경전인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 이야기 「창세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창조주 자신의 모습은 드러나 있지 않지요. 그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뿐입니다. 있다면 오직 “가라사대”라는 말씀만 들릴 뿐이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얘기인데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창조주의 실체는 ‘말씀’인 거죠. 창조주의 실체인 말씀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창세기」가 된 겁니다.
신이 말씀이라는 진리(logos)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지요. 그러니 기독교의 신도 이야기를 짓는 시인이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자신이 이야기이거나 시가 된 것이기떵 하고요. 흔히 서구 문명의 두 뿌리가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 대변되는 헬레니즘과 유대 기독교 문명으로 대변되는 헤브라이즘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유럽인들의 문명과 종교, 즉 정신의 뿌리가 모두 이야기로 시작되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모두 중세와 근세를 거쳐 인간의 이성에 의해 절대 진리인 logos로 바뀌게 된 겁쾴다.
특히 서구 유럽의 중세는 그 이야기에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부여했어요. 그 권위를 교회 제도와 성직자 집단이 독점했지요. 그들만이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게 유럽의 중세였어요. 그 힘으로 그냥 이야기였을지도 모르는 mythos를 절대진리인 logos로 믿게 만들었죠. 혹이라도 다르게 생각하거나 그들과 달리 해석하면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단이라 정죄하고 목숨까지 빼앗았어요. 이젠 말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신앙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겁니다.
자! 이젠 내 말을 정리하죠. 이런 게 바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가 만든 찬란한 문화라는 거예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인공생산물이죠. 그 문화라는 생산물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문화라는 것은 곧 인간 사유의 결과인 겁니다. 무슨 불변의 진리나 유일한 현실이 아니란 말이죠. 각 시대에 따라 또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그때마다 필요에 의해 세상을 해석한 하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큰 틀로 보면 문화인 거죠. 그러니 문화란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생산물로서 문화를 불변의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그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생산물 속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예가 되는 거예요. 종교의, 정치의, 과학의 노예 말입니다. 이게 꿈이라는 걸 망각할 때 벗어날 수 없는 가위눌림 같은 악몽이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인류가 달성한 찬란한 문화란 단지 인간이 상상한 또는 꾸민 이야기에 불과하단 거예요. 세상에 대해 수동적이었던 원시 상태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세상을 해석해 창조한 상상력의 산물 말입니다. 신의 질서인 우주의 미로를 찾을 수 없다고 그냥 그 안에 갇혀 있기엔 인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거죠. 그래서 그걸 거부하고 능동적으로 만든 인간의 질서가 문화란 겁니다. 하지만 문화라는 자신의 창조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자주 망각하며 살아가죠. 그게 유일한 현실인 양 살아간단 말이에요.
하나 간단한 예를 들죠. 우리나라 조선 오백 년을 지배한 정신세계가 유교입니다. 알다시피 유교 이념은 철저한 차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시대든지 왕조시대는 대개가 가부장제 성격이 강했어요. 남녀 간 차별이 무엇보다 심했죠. 우리나라 왕조시대 가부장제 문화 중 가장 단적인 예로 ‘칠거지악’이란 게 있어요. 시집온 여자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악이란 겁니다.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2. 아들이 없거나 3. 음탕하거나 4. 질투하거나 5. 나쁜 병이 있거나 6. 말이 많거나 7. 도둑질하거나’ 하면 시댁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어때요, 놀랍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말이 공자님 말씀이라는 거예요. 당시는 이런 차별문화가 유일한 현실인 양 그 사회에 받아들여졌죠. 지금 세상이면 상상이나 할 법한 얘기겠어요? 말도 안 되죠.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도 이와 유사한 말도 안 되는 문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한 시대가 지나서가 아니라 동시대 속에서 느끼는 말도 안 되는 얘기 말이에요.
정치문화가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문화의 본보기입니다. 보세요. 누구는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통치기간’을 “행복했던 10년”이라 하고 누구는 “잃어버린 10년”이라 합니다. 누구는 좌파라 하고 또 누구는 우파라 하지요. 좌파는 무조건 빨갱이로 북한을 편드는 자이고, 우파는 무조건 보수꼴통이라 해요. 누구는 북한을 우리의 주적이라 하고, 누구는 우리의 동포요 형제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느 게 유일한 정치현실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정치문화이며 인공생산물인데, 이 사실을 망각한 채 각자 유일한 현실인 양 살아가고 있는 게 오늘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란 바로 우리가 만들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문화라는 건축물이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비추는 거예요. 그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의 벌어진 균열과 틈을 확대해 보여주는 거죠. 문화라는 게 자신들이 만든 인공생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문화라는 거대한 인공물에 감춰진 비밀을 그들이 만든 이야기로 교묘하게 폭로하고 드러내는 거죠. 뭐 비밀이라야 실은 별것 없지만. ‘문화. 그거 네가 만든 거잖아. 만들어진 현실이잖아. 허구잖아.’
나는 물, 비추고 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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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하고 드러낸다고요.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무슨 역사나 문화 또는 정치문제연구소 연구원인가요?
글쎄요. 나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거나 비추지는 않아요. 그건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죠. 보이는 건 실은 현상일 뿐이에요. 겉모습일 뿐이죠. 당신의 겉모습이 당신의 참모습이 아닌 것처럼 지나간 역사도 현재 진행되는 사건도 모두 해석돼야 하는 현상일 뿐입니다. 나도 그 현상을 해석하지만 나는 이야기로 해석하지요.
해석이라지만 실은 바깥세상처럼 답을 제시하거나 확신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바깥세상 사람들이 확신하려 드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죠.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끝없는 ‘물음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실제 있었던 사건이든 꾸며낸 것이든 내겐 중요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건 ‘있을 수 있겠다 싶은 가능성’입니다.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묻기 위해 인간의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겁니다. 완성될 수 없는 인간 실존에 대한 실험이라고나 할까요.
조금 아리송한데요. 현상이니 인간 실존이니, 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당신은 무슨 철학자인 것 같기도 하고. 대화할수록 당신이 누군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해요.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다면서 어째서 자신을 모른다는 거죠?
정말이에요. 난 나를 잘 모르겠어요. 나는 내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비추고 이야기로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내 앞에 서서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얘기해보라”고 자신들을 드러내주기를 바라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내 역할과 모습이 달라지니 나도 내가 누군지 헷갈릴 수밖에요.
더군다나 달라지는 게 내 겉모양뿐만이 아니에요. 내 속모양도 달라지죠. 내 말투, 이야기 방식. 어떤 걸 드러내고 어떤 걸 감추어야 할지, 내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체 능청을 떨어야 할지, 짧게 얘기해야 할지 길게 얘기해야 할지, 이 얘기 저 얘기 다 가져다 막 섞어놓고 얘기해야 할지, 한 가지만 갖고 얘기해야 할지, 비극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희극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풍자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낭만적으로 얘기해야 할지……. 도무지 내게 들이미는 것들마다 지들 마음대로 나를 바꿔놓으니 내가 누군지 난들 어떻게 알겠어요?
아하! 알겠어요. 당신은 물 같은 존재예요. 무어라 딱 정해진 모습은 없지만 어떤 것에 담기면 그것의 모양을 띠는 물 말이에요. 그것도 겉모양을 담는 것이 아니라 빈 속을 채워 그것의 속모양을 띠게 되는 물 말입니다. 겉에서 보면 볼 수 없고 그 안을 보아야 비로소 당신의 형체와 동시에 당신을 담은 것의 형체가 드러나는 물 같은 존재 말이에요.
너는 이야기 시인
우와! 멋져요! 내가 물 같은 존재인 줄은 잘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해주는 당신은 그러니까 꼭 시인 같아요.
poesis! 이야기 시인. 이야기로 시로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 같은, 신화로 세상과 자신의 탄생을 설명하려 했던 그 시인 말인가요?
예. 그래요. 당신은 시인이에요. 세상을 이야기로 꿈꾸고 당신 자신을 시로 창조하는 사람이죠. 어쩌면 당신이나 나도 우리가 꿈꾼 이야기인지도 몰라요. 아니면 누군가 우리에 대해 하는 이야기 속에 또는 꿈속에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죠. 이야기가 그치거나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 존재도 사라지고 마는.
당신을 한번 보세요. 오늘은 무슨 옷을 입었나요? 초록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군요. 당신 옷차림 하나만 보고도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유형의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특히 당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당신의 옷차림, 머리 스타일, 말투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며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판단하려 할 거예요. 당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당신이나 당신이 알거나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할 겁니다. 그렇게 당신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들은 눈덩이같이 불어날 거예요. 어쩌면 당신이나 나도 실뫀 수많은 이야기와 해석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호접몽(胡蝶夢)이라고 들어봤지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 말이에요
“내(장자)가 어젯밤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꽃도 구경하고 들도 구경했다. 어찌나 즐겁던지 꿈에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한참 날아다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내려가보니 바로 장자 나였다. 그때 꿈에서 깼다. 깨어서 보니 나는 다시 틀림없는 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나는 분명히 나비였다. 그렇다면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내가 나타난 것인가?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장자가 나비 꿈을 비유로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은 꿈과 현실, 삶과 죽음, 나와 바깥 사물 사이에 어떤 구별을 짓는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세계란 한낱 변화하는 순간의 상(像)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현실이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사는 세계가 실은 한순간의 꿈속인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실은 누군가의 꿈속에 나타난, 꿈에서 깨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상 같은 존재.
아! 그래요. <아바타>! 그 영화에도 비슷한 대사와 장면이 나와요. 지구인 주인공 제이크가 외계행성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족의 ‘아바타’로 순간이동하는 장면에서 하는 대사였어요. “나비족 꿈을 꾸는 내가 진짜인지, 나비족이 진짜 나인지.” ‘나비’. 그러고 보니 장자의 나비 꿈과 이름도 똑같네요! 나도 컴퓨터 온라인상에서는 내 아바타가 나를 대신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어요. 어! 그러면 컴퓨터 온라인 네트워크에 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아바타이겠네요.
그래요. 우리의 일상현실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죠. 사고파는 행위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며, 대화하며 사귀고, 놀다가 싸우며, 헤어지고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거의 모든 일상이 점점 가상현실인 컴퓨터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0과 1의 이진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거예요. 단 두 개의 숫자를 무한대로 조합한 이야기가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러니 미래 인류는 어쩌면 거대한 이야기 공화국이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를 짓는 poesis가 다스리는 mythos의 세상이 다시 오게 되는 거죠. 바로 내 세상이 되는 겁니다.
당신 세상이라고요? 어째서죠?
내 속엔 거의 무한대의 이야기가 저장돼 있어요. 사람들은 내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군지 보여달라고 내게 요구해요. 때론 자신의 운명을 내 속에서 보려고 하죠. 그러면 난 신탁 같은 이야기 글을 던져줍니다. 네! 글이요. 실은 내 입은 쓰지 않아 퇴화된 지 오래예요. 전적으로 내 잘못은 아니랍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인쇄를 통해 대량 복제돼 퍼지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사람들의 청각 의존도가 급격히 줄어들었어요. 대신 거의 시각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전적으로 신뢰를 돌린 겁니다. 말이 필요 없어졌어요. 내게도 말로 하지 말고 글로 비추라고 요구했지요. 해서 언젠가부터 나는 말 대신 글로 이야기를 던져주게 됐습니다. 그러면 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은 재밌어하고, 어떤 사람은 심각해하고,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놀라고, 또 어떤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며 읽다 말고 던져버리기도 하죠.
이런 다양한 반응은 내가 비추는 글이 말보다 매우 미끄럽기 때문이에요. 그 미끄러움 때문에 가끔은 나도 미끄러지죠. 하지만 그 미끄러움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아니 똑같은 것을 매번 다르게 비출 수 있어요. 보는 사람에 따라, 기분에 따라 난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난 이야기 속에서 무한증식할 수 있는 거죠.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와 구별이 없어지고 오히려 현실세계를 대체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세상은 온갖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야기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내 앞에 몰려들어 내게 이야기를 요구할 거예요. 자신이 누군지를 이야기로 묻고 이야기로 찾으려 할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의 어머니인 오라클이 되는 것이죠. 이야기로 인류의 운명을 창조하고, 예견하고 바꿀 수도 있는 신탁, 오라클이요!
나는 세헤라자데 너는 나의 오라클
아! 알겠어요! 오라클, 당신의 운명 말이에요. 이젠 나도 내가 읽은 이야기로 당신의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천일야화』.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꽤나 혼란스러운 오백두 번째 밤의 이야기죠. 여자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던 페르시아 왕 샤리아르는 처녀를 한 명씩 아내로 맞아들여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 날 죽여버리죠.
세헤라자데 역시 같은 운명이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끝나지 않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고 이야기를 다음 날로 연기하죠. 이야?를 듣고 싶은 왕은 그녀에게 없던 내일을 허락합니다. 그렇게 매일 밤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그녀에게 없던 또 다른 내일을 있게 하는 거죠. 그러기를 천 하루. 이야기에 반한 왕은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이야기예요. 결국 그녀를 죽일 수도 그리고 살릴 수도 있었던 것은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그녀의 오늘 삶이 이야기라면 이어질 내일의 삶도 이야기라는 거죠.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는 겁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삶이요 운명이었던 세헤라자데!
그래요. 이젠 당신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에서 태어났고 이야기로 살아가며 이야기로 죽고 이야기로 부활하는. 당신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예요. 당신은 모든 것을 이야기로 담고 비출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을 담고 비출 수는 없는 운명이죠. 자신이 누군지 읽어달라고 누군가 당신 앞에 서지 않으면, 그래서 당신이 들려줄 이야기가 그친다면 당신의 운명도 끝날 수밖에 없는 세헤라자데.
아! 내 사랑 세헤라자데!
그래요. 당신은 입이 퇴화돼 대신 미끄러운 글로 세상을 드러내고 비추는, 그리고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를 비춰 내가 누군지도 알게 해준. 그래서 당신도 살아가는 이야기 글. 사랑해요! Novel.
그러면, 그러면…… 당신은 나를 읽어준, 내게 내일이 있게 해준…… 나의 오라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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