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적이고 오감을 자극하는’ 바쿠스, 우리들의 행복한 주신(酒神)
바쿠스, 술의 신이 강림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분은 꼭 이맘때 술을 곳곳에 품고 불콰해진 얼굴로 오신다. 그리고선 술 한 잔 권하며 속삭인다.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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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자연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면, 후회도 하고, 아쉬운 일도 많다. 또 잊고 싶은 일도, 지우고 싶은 일도 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망년회’라는 이름을 붙여 술을 들이킨다.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요, 명분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즈음, 풀어지고 관대해진다.
바쿠스, 술의 신이 강림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분은 꼭 이맘때 술을 곳곳에 품고 불콰해진 얼굴로 오신다. 그리고선 술 한 잔 권하며 속삭인다. 한 해 동안 수고했어. 먹고 마시고 죽자. 인생 뭐 있어? 술의 신이 권하는 한 잔은 어찌나 강력한지, 우리는 내일 있을 숙취의 고통도 까맣게 잊은 채 환락의 세계로 빠져든다. 환락의 밤은 짧고 숙취의 낮은 길지라도.
그런 우리 안의 바쿠스를 깨우는 시간이 마련됐다. 지난 5일, 서울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예스24 인문예술 릴레이 세미나’ 5탄으로 마련된 ‘동서양 미술의 만남 두 번째 - 이주은, 서양미술을 말하다’. 『다, 그림이다』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이주은 교수(성신여대 미술교육학과)가 ‘서양미술 속의 지금 이 순간’이란 주제로 바쿠스를 모셨다.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돈키호테에 짙은 연민을 갖고 사는 저자가 말해주는 바쿠스의 세계.
바쿠스 축제의 의미
‘바쿠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술(포도주)의 신. 저자에 의하면, 바쿠스는 ‘뒤집힌 세계’를 함의한다. 남녀, 연령, 계급(장) 떼고 평등하게, 혹은 게으르게, 내키는 대로. 귀도 레니의 <와인을 마시는 바쿠스>(1623)는 그런 의미를 잘 담은 그림이다. 잘 놀면 잘 산다. 그러다 보면 깨달음도 온다. 곧, 깨달음이 축제의 의미.
오호, 와인 통 옆에 턱하니 기대어 앉은 투실투실한 술의 신 바쿠스가 한편으로는 와인을 마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줌을 싸고 있군요. 그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제 맘대로 살고픈 이 어린아이야말로 본능대로 사는 신이고, 본능을 이해해주는 신이기도 합니다. (p.72)
그러나 잘 놀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다. 카라바조의 <병든 바쿠스>(1593~4)는 그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에서 바쿠스, 축제가 가진 의미는 한 번 죽고, 소멸시키고 싶은 것을 없애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바쿠스는 관능적이고 본능적으로 그려진다. 카라바지오의 <바쿠스>(1597)라는 그림을 보면, 촉각적이고 관능적이다. 오감을 자극한다.”
바쿠스가 데리고 다니는 동물이 있다. 표범이다. 표범은,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을 대표한다. 티치아노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1521)를 비롯해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1898)에는 표범이 등장한다.
“본능은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아리아드네는 잠, 꿈과 관련된 여자다. 본능, 잠, 꿈, 잘 어울리지 않나? 피테르 브뢰헬의 <게으름뱅이의 천국>(1567)을 보라. 먹고 배부르게 널부러졌다. 게으름, 성충동, 잠, 꿈, 모두 바쿠스와 관련이 있다.”
파멸,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된 본능
저자가 우선 꺼낸 바쿠스의 테마는 ‘파멸’이다.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된 본능’이자, ‘현실과 이상의 간극과 괴리’다. 장 뒤뷔페 <사팔뜨기>(The Squinter, 1953)와 영화 <양들의 침묵>을 나란히 놓은 저자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선율을 들려준다.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이 좋아하는 음악이다. 지적이면서도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그런데 한니발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다. 그건 반칙이다.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표피와 나의 괴리감을 만들 뿐이다.”
이어 난잡한 교접이 일어나는 축제의 현장을 그린 알마 타데마의 <헬리오 가발루스의 장미>(1888)를 든다. 금기된 욕망을 억누르고 살다가 중년이 돼서 이를 터뜨리는, 미국 중산층의 허위를 다룬 영화 <아메리칸 뷰티>가 조응한다.
“우리 대부분은 금욕적인 일상을 산다. 성충동을 억누르면서.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영웅이 성장할 때 질풍노도를 제때 격지 못하면 느지막하게 일탈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파멸을 제때 겪어야 한다. 40~50대 때 겪으면 곤란해진다. (웃음)”
그녀는 베르니니의 <성녀 테레사의 희열>(1645~52)과 <레이디 채털리>의 포스터를 비교해볼 것을 권했다. 그 표정에서 성스럽고 속된 것은 차이가 있는지, 구별이 가능한지 묻는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전족’이 아름다움과 성적인 기준이자, 잘 자란 규수라는 표준이었기 때문에 고통 받았던 여자들의 고통도 말했다. 의미와 가치, 기준과 표준이 옭아 맨 자유다.
미국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 World’s highest standard of Living >(1937)은 그런 허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대공황 이후, 미국(이라는 사회)은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큼을 보여준다. 사진의 활짝 웃고 있는 가족사진은 즐거운 척 하지만, 아래 노동자들의 모습은 좌절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타낸다.
“헨리 월리스의 <채터톤>(1855~6)은 모든 것을 놓은 모습이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을 때도 파멸이지만,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을 때도 파멸한다. 내 환상과 현실을 소멸하는 충동이 죽음에의 충동이다. 이건 바쿠스의 자연스러운 성정이 아니다.”
채터톤은 중세의 어투를 흉내 내어 토마르 롤리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문제시되면서 갖은 혹평과 표절시비에 휘말리게 되고, 견디지 못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지요.… 약 백 년쯤 흐른 후에 헨리 윌리스라는 영국의 화가가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어요. (p.81)
공포를 품은 어두운 밤
- 침묵, 내면에의 은거
- 의미상실
- 불가해한 것에 대한 공포
“영혼의 나이는 육체의 나이와 다르다. 영혼은 크기 위해 어두운 밤을 겪는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이 시기는 많은 것과 싸워야 한다. 악몽 같은 거다. 축제는 카오스를 만들어서 질서를 찾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운명에 대한 공포가 있다. 없다면, 인지하지 못한 거다. 단순하면 이걸 인지하지 못하고 예민하면 인지할 수 있다.”
저자는 도로시 태닝의 < Birthday >(1942), 헨리 퓨젤리의 < Nightmare >(1781), 프란시스코 고야의 < The Colossus >(1811) 등을 통해 어두운 밤에 대한 공포를 설명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1882)을 보면, 고흐는 이 여자에게서 인생의 바닥을 봤다. 고흐가 이 여자를 만났을 때는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 또 남자는 떠났고, 늙어서 아무도 찾지 않는 매춘부에 성병에 걸려 있다. 좌절한 상태의 여자인데, 고흐가 집으로 데려가서 이 그림을 그렸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 Europe >(1794)에서 마침내 질서를 찾는다.”
어리석음과 광기, 미로
바쿠스는 또한 미로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 미완의 과제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어리석음, 광기
저자는 조지 와츠 <희망>(1887)을 꺼냈다. 오바마가 좋아했던 그림으로 유명세를 탔던 이 그림은, 수금의 현이 딱 하나만 남아있다. 남은 한 줄로 연주를 마치겠다는, 눈을 가린 소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녀와 한 줄의 현, 그리고 소녀가 앉아있는 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체성과 관련된 신화의 인물은 오이디푸스다. 쟝 델빌의 < Wheel of Fortune >(1940)은 좌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영웅들을 운명의 수레바퀴로 표현하기도 했다. 보통 남녀 간 육체가 석이지 않는 정신의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는데, 실은 영혼이 상승하는데 필요한 사랑이 플라토닉 러브다. 인어공주에 대해 대개 해피엔딩으로 아는데, 실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운명의 수레바퀴다.”
성숙의 단계로 들어서는 다른 질서
바쿠스 축제는 혼돈만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질서를 찾는 과정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환영과 현실을 넘나듦
- 혼돈 속에서 찾는 질서의 씨앗
- 성숙, 깨달음, 환멸
이 단계에서 저자는 창(윈도우)가 그려진 그림을 많이 제시했다.
“윈도우는 곧 그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정의했다. 윈도우를 그린 그림이 참 많은데, 질서만으로 살면 참 답답할 것 같다. 창문을 보면서 습작하는 여인도 있고, 창문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기도 한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봄>(1889)에는 병으로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이 나온다. 창밖 세계와 대조된다. 이것은 곧 현실세계와 바깥세계의 괴리를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고 괴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리야 레핀의 <시험을 준비하며>(1864)를 보면, 남의 집을 엿보는 것도 창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도 지금 그렇다. 정치가, 연예인을 그렇게 엿보고, 얘기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Ⅰ>(1933)에는 안에 있는 것이 밖에도 있고, 밖의 것이 안에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은 틀로 격리돼 있지만, 결코 격리돼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새살이 돋아나는 순간, 재탄생
바쿠스는 혼돈 끝에 재탄생한다. 이런 의미다.
- 내 안의 빛
- 상처가 난 곳에서 새살이 돋아남
- 고통과 환희의 손잡음
보티첼리의 < The Birth of Venus >(1485)도 재탄생의 상징이다. 진주 역시 자기치유의 상징으로 진주를 만들기 위해선 고통이 따른다. 부활이라는 뜻과도 통한다. 같은 작가의 < Mistic Nativity >는 르네상스 때 유행했던, 영혼을 상승시키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즉,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을 타오르는 불이라고 해석했다. 첫 단계는 검정이다. 파멸, 해탈. 억압된 나를 죽이고 버리는. 둘째는 나를 깨끗하게 하는 하얀 불이다. 마지막으로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만나 새로운 탄생을 하는 환희의 빨강 불, 이게 연금술적인 불이다. 내가 나를 버림으로써 지혜를 얻는다는 상징이 될 수 있다. 고통과 해탈이 서로서로 끌어안는 것이다. 나는 극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거부감이 인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나? 안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는데, 뭘 또 극복해야 하지? 이런 생각. 어떤 단계에 있든 지금 타오르는 불꽃에 충실한 거다.”
그녀는 뭉크의 <인생이라는 댄스>(1900)를 예로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다. 카르페 디엠. 즉, 바쿠스의 가장 큰 의미는, ”단 한 번 그 순간”이다. 이런 것이다.
- 실패는 두렵지 않아. 후회가 두려울 뿐
- 날것 그대로의 행복과 자유
-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우리가 음미하고 싶은 것은 배가 부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을 풍부하게 해주는, 그래서 다 먹고 난 뒤에도 혀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 그런 맛입니다. 그림도 그렇게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p.11)
“살아있는 것, 생생한 것, 생기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우리는 생과 그대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생생한 그것을 고르는 것이 어떨까. 조반니 볼디니의 그림이나 인상주의는 그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려고 한다. 내가 느끼는 오감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아닐까. 영화 <원스>도 그렇다. 둘이 하모니를 만들고 사랑을 느끼지만, 각자의 길을 간다. 멋있고, 노래도 참 좋다.”
행복은 오직 그 순간에만 단 한 번 들을 수 있는 연주라고 정의하면 어떨까요? 반복할 수도 없고, 분석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약속이라든가 도덕적 가치와 어렵사리 연결시키지 않아도 되는 즉흥연주 말이지요. (p.169)
페르난도 보테로 <춤추는 사람들>(2000)도 마찬가지다. 술병과 꽁초가 널부러진 산만함의 극치인 것 같아도, 그림이 표현한 순간만큼은 즐겁다.
“카오스에서 질서를 찾고 새로운 리듬을 찾는 일, 얼마나 매력적인가. 정해진 규칙이 있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자유를 찾은 것 같지 않나? 바쿠스라는 것이 무질서, 혼돈이 아니라, 자기 파멸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다른 질서를 찾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질서를 찾았을 때 얼마나 행복하나.”
저자는 마르크 샤갈의 <산책>(1917~18)과 일리야 레핀의 <이렇게 넓다니!>(1903)의 그림을 차례로 보여준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 한 마디와 함께 노래를 들려준다.
“때론 이렇게 바쿠스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 있다면!”
속수무책의 자유로움을 전달하기에는 레핀의 그림이 더 제격인 것 같아요. 보세요.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 흙탕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는데, 멀쩡하게 제대로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가 뛰어들어 즐거워하고 있네요. 어떻게 추스를지 대책이 없기는 ?도, 옷이 젖을까 하는 염려를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시원하고 후련해졌습니다. (p.192)
노래는 에디트 피아프의 것.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 고통과 환희 모든 것을 경험한 피아프가, 1960년 12월 재기하면서 꺼낸 노래다. 피아프의 삶을 그대로 담은 삶 그 자체. 피아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과거? 후회? 그건 오늘이 아니니까, 이제 그만. 사랑하며 살고, 후회 없이 노래하리. 삶은 바쿠스!
Q&A
그림을 보고 위안을 얻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나는 글쓰다가 지쳤을 때 그림을 본다. 그림은 오감과 관련돼 있어서, 어떤 이유로든 즐거움을 준다. 감정을 정리해주는 그림도 있다. 사실 감정은 정리할 필요가 없잖나. 기쁨, 분노, 짜증, 환희, 슬픔 등 여러 감정이 있는데, 그건 다 지나간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그런 감정이 떠오를 때가 있고, 정리가 된다. 그림을 보면서 감정을 정리하면 어떨까? 그림은 상상력, 창의력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서와도 특별히 관련돼 있다. 그런 것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림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어떻게 하나? 미술시장에서 가격과 예술성은 일치하나?
나는 실기를 한 사람은 아닌데, 실기보다는 발상력을 더 중요시한다. 무엇을, 어떤 연상을 가능하게 하는가. 세상에 대해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은 발상이나 표현면에서 뻔한 생각만 한다. 그림에선 그런 건 재미가 없다.
미술시장은 여러 가지 얽혀 있는데, 콜렉터들은 미술작품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감상하고 싶은데. 남녀를 바라볼 때도, 바라보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은 다르지 않나. 개개인의 취향이다. 추상을 집에 걸어놨을 때는 이미지적인 신선함은 있는데, 이해에 어려움을 느끼는 분이 많다.
바쿠스, 술의 신이 강림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분은 꼭 이맘때 술을 곳곳에 품고 불콰해진 얼굴로 오신다. 그리고선 술 한 잔 권하며 속삭인다. 한 해 동안 수고했어. 먹고 마시고 죽자. 인생 뭐 있어? 술의 신이 권하는 한 잔은 어찌나 강력한지, 우리는 내일 있을 숙취의 고통도 까맣게 잊은 채 환락의 세계로 빠져든다. 환락의 밤은 짧고 숙취의 낮은 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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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돈키호테에 짙은 연민을 갖고 사는 저자가 말해주는 바쿠스의 세계.
바쿠스 축제의 의미
‘바쿠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술(포도주)의 신. 저자에 의하면, 바쿠스는 ‘뒤집힌 세계’를 함의한다. 남녀, 연령, 계급(장) 떼고 평등하게, 혹은 게으르게, 내키는 대로. 귀도 레니의 <와인을 마시는 바쿠스>(1623)는 그런 의미를 잘 담은 그림이다. 잘 놀면 잘 산다. 그러다 보면 깨달음도 온다. 곧, 깨달음이 축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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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와인 통 옆에 턱하니 기대어 앉은 투실투실한 술의 신 바쿠스가 한편으로는 와인을 마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줌을 싸고 있군요. 그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제 맘대로 살고픈 이 어린아이야말로 본능대로 사는 신이고, 본능을 이해해주는 신이기도 합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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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잘 놀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다. 카라바조의 <병든 바쿠스>(1593~4)는 그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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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서 바쿠스, 축제가 가진 의미는 한 번 죽고, 소멸시키고 싶은 것을 없애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바쿠스는 관능적이고 본능적으로 그려진다. 카라바지오의 <바쿠스>(1597)라는 그림을 보면, 촉각적이고 관능적이다. 오감을 자극한다.”
바쿠스가 데리고 다니는 동물이 있다. 표범이다. 표범은,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을 대표한다. 티치아노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1521)를 비롯해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1898)에는 표범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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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은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아리아드네는 잠, 꿈과 관련된 여자다. 본능, 잠, 꿈, 잘 어울리지 않나? 피테르 브뢰헬의 <게으름뱅이의 천국>(1567)을 보라. 먹고 배부르게 널부러졌다. 게으름, 성충동, 잠, 꿈, 모두 바쿠스와 관련이 있다.”
파멸,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된 본능
저자가 우선 꺼낸 바쿠스의 테마는 ‘파멸’이다.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된 본능’이자, ‘현실과 이상의 간극과 괴리’다. 장 뒤뷔페 <사팔뜨기>(The Squinter, 1953)와 영화 <양들의 침묵>을 나란히 놓은 저자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선율을 들려준다.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이 좋아하는 음악이다. 지적이면서도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그런데 한니발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다. 그건 반칙이다.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표피와 나의 괴리감을 만들 뿐이다.”
이어 난잡한 교접이 일어나는 축제의 현장을 그린 알마 타데마의 <헬리오 가발루스의 장미>(1888)를 든다. 금기된 욕망을 억누르고 살다가 중년이 돼서 이를 터뜨리는, 미국 중산층의 허위를 다룬 영화 <아메리칸 뷰티>가 조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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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금욕적인 일상을 산다. 성충동을 억누르면서.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영웅이 성장할 때 질풍노도를 제때 격지 못하면 느지막하게 일탈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파멸을 제때 겪어야 한다. 40~50대 때 겪으면 곤란해진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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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베르니니의 <성녀 테레사의 희열>(1645~52)과 <레이디 채털리>의 포스터를 비교해볼 것을 권했다. 그 표정에서 성스럽고 속된 것은 차이가 있는지, 구별이 가능한지 묻는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전족’이 아름다움과 성적인 기준이자, 잘 자란 규수라는 표준이었기 때문에 고통 받았던 여자들의 고통도 말했다. 의미와 가치, 기준과 표준이 옭아 맨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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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 World’s highest standard of Living >(1937)은 그런 허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대공황 이후, 미국(이라는 사회)은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큼을 보여준다. 사진의 활짝 웃고 있는 가족사진은 즐거운 척 하지만, 아래 노동자들의 모습은 좌절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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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월리스의 <채터톤>(1855~6)은 모든 것을 놓은 모습이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을 때도 파멸이지만,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을 때도 파멸한다. 내 환상과 현실을 소멸하는 충동이 죽음에의 충동이다. 이건 바쿠스의 자연스러운 성정이 아니다.”
채터톤은 중세의 어투를 흉내 내어 토마르 롤리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문제시되면서 갖은 혹평과 표절시비에 휘말리게 되고, 견디지 못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지요.… 약 백 년쯤 흐른 후에 헨리 윌리스라는 영국의 화가가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어요. (p.81)
공포를 품은 어두운 밤
- 침묵, 내면에의 은거
- 의미상실
- 불가해한 것에 대한 공포
“영혼의 나이는 육체의 나이와 다르다. 영혼은 크기 위해 어두운 밤을 겪는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이 시기는 많은 것과 싸워야 한다. 악몽 같은 거다. 축제는 카오스를 만들어서 질서를 찾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운명에 대한 공포가 있다. 없다면, 인지하지 못한 거다. 단순하면 이걸 인지하지 못하고 예민하면 인지할 수 있다.”
저자는 도로시 태닝의 < Birthday >(1942), 헨리 퓨젤리의 < Nightmare >(1781), 프란시스코 고야의 < The Colossus >(1811) 등을 통해 어두운 밤에 대한 공포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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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1882)을 보면, 고흐는 이 여자에게서 인생의 바닥을 봤다. 고흐가 이 여자를 만났을 때는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 또 남자는 떠났고, 늙어서 아무도 찾지 않는 매춘부에 성병에 걸려 있다. 좌절한 상태의 여자인데, 고흐가 집으로 데려가서 이 그림을 그렸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 Europe >(1794)에서 마침내 질서를 찾는다.”
어리석음과 광기, 미로
바쿠스는 또한 미로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 미완의 과제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어리석음, 광기
저자는 조지 와츠 <희망>(1887)을 꺼냈다. 오바마가 좋아했던 그림으로 유명세를 탔던 이 그림은, 수금의 현이 딱 하나만 남아있다. 남은 한 줄로 연주를 마치겠다는, 눈을 가린 소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녀와 한 줄의 현, 그리고 소녀가 앉아있는 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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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관련된 신화의 인물은 오이디푸스다. 쟝 델빌의 < Wheel of Fortune >(1940)은 좌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영웅들을 운명의 수레바퀴로 표현하기도 했다. 보통 남녀 간 육체가 석이지 않는 정신의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는데, 실은 영혼이 상승하는데 필요한 사랑이 플라토닉 러브다. 인어공주에 대해 대개 해피엔딩으로 아는데, 실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운명의 수레바퀴다.”
성숙의 단계로 들어서는 다른 질서
바쿠스 축제는 혼돈만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질서를 찾는 과정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환영과 현실을 넘나듦
- 혼돈 속에서 찾는 질서의 씨앗
- 성숙, 깨달음, 환멸
이 단계에서 저자는 창(윈도우)가 그려진 그림을 많이 제시했다.
“윈도우는 곧 그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정의했다. 윈도우를 그린 그림이 참 많은데, 질서만으로 살면 참 답답할 것 같다. 창문을 보면서 습작하는 여인도 있고, 창문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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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드 뭉크의 <봄>(1889)에는 병으로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이 나온다. 창밖 세계와 대조된다. 이것은 곧 현실세계와 바깥세계의 괴리를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고 괴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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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의 <시험을 준비하며>(1864)를 보면, 남의 집을 엿보는 것도 창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도 지금 그렇다. 정치가, 연예인을 그렇게 엿보고, 얘기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Ⅰ>(1933)에는 안에 있는 것이 밖에도 있고, 밖의 것이 안에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은 틀로 격리돼 있지만, 결코 격리돼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새살이 돋아나는 순간, 재탄생
바쿠스는 혼돈 끝에 재탄생한다. 이런 의미다.
- 내 안의 빛
- 상처가 난 곳에서 새살이 돋아남
- 고통과 환희의 손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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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 The Birth of Venus >(1485)도 재탄생의 상징이다. 진주 역시 자기치유의 상징으로 진주를 만들기 위해선 고통이 따른다. 부활이라는 뜻과도 통한다. 같은 작가의 < Mistic Nativity >는 르네상스 때 유행했던, 영혼을 상승시키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즉,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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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타오르는 불이라고 해석했다. 첫 단계는 검정이다. 파멸, 해탈. 억압된 나를 죽이고 버리는. 둘째는 나를 깨끗하게 하는 하얀 불이다. 마지막으로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만나 새로운 탄생을 하는 환희의 빨강 불, 이게 연금술적인 불이다. 내가 나를 버림으로써 지혜를 얻는다는 상징이 될 수 있다. 고통과 해탈이 서로서로 끌어안는 것이다. 나는 극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거부감이 인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나? 안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는데, 뭘 또 극복해야 하지? 이런 생각. 어떤 단계에 있든 지금 타오르는 불꽃에 충실한 거다.”
그녀는 뭉크의 <인생이라는 댄스>(1900)를 예로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다. 카르페 디엠. 즉, 바쿠스의 가장 큰 의미는, ”단 한 번 그 순간”이다. 이런 것이다.
- 실패는 두렵지 않아. 후회가 두려울 뿐
- 날것 그대로의 행복과 자유
-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우리가 음미하고 싶은 것은 배가 부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을 풍부하게 해주는, 그래서 다 먹고 난 뒤에도 혀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 그런 맛입니다. 그림도 그렇게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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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 생생한 것, 생기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우리는 생과 그대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생생한 그것을 고르는 것이 어떨까. 조반니 볼디니의 그림이나 인상주의는 그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려고 한다. 내가 느끼는 오감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아닐까. 영화 <원스>도 그렇다. 둘이 하모니를 만들고 사랑을 느끼지만, 각자의 길을 간다. 멋있고, 노래도 참 좋다.”
행복은 오직 그 순간에만 단 한 번 들을 수 있는 연주라고 정의하면 어떨까요? 반복할 수도 없고, 분석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약속이라든가 도덕적 가치와 어렵사리 연결시키지 않아도 되는 즉흥연주 말이지요.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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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보테로 <춤추는 사람들>(2000)도 마찬가지다. 술병과 꽁초가 널부러진 산만함의 극치인 것 같아도, 그림이 표현한 순간만큼은 즐겁다.
“카오스에서 질서를 찾고 새로운 리듬을 찾는 일, 얼마나 매력적인가. 정해진 규칙이 있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자유를 찾은 것 같지 않나? 바쿠스라는 것이 무질서, 혼돈이 아니라, 자기 파멸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다른 질서를 찾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질서를 찾았을 때 얼마나 행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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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마르크 샤갈의 <산책>(1917~18)과 일리야 레핀의 <이렇게 넓다니!>(1903)의 그림을 차례로 보여준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 한 마디와 함께 노래를 들려준다.
“때론 이렇게 바쿠스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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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수무책의 자유로움을 전달하기에는 레핀의 그림이 더 제격인 것 같아요. 보세요.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 흙탕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는데, 멀쩡하게 제대로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가 뛰어들어 즐거워하고 있네요. 어떻게 추스를지 대책이 없기는 ?도, 옷이 젖을까 하는 염려를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시원하고 후련해졌습니다. (p.192)
노래는 에디트 피아프의 것.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 고통과 환희 모든 것을 경험한 피아프가, 1960년 12월 재기하면서 꺼낸 노래다. 피아프의 삶을 그대로 담은 삶 그 자체. 피아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과거? 후회? 그건 오늘이 아니니까, 이제 그만. 사랑하며 살고, 후회 없이 노래하리. 삶은 바쿠스!
Q&A
그림을 보고 위안을 얻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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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어떻게 하나? 미술시장에서 가격과 예술성은 일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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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은 여러 가지 얽혀 있는데, 콜렉터들은 미술작품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감상하고 싶은데. 남녀를 바라볼 때도, 바라보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은 다르지 않나. 개개인의 취향이다. 추상을 집에 걸어놨을 때는 이미지적인 신선함은 있는데, 이해에 어려움을 느끼는 분이 많다.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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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샨티샨티
2011.12.28
gazahbs
2011.12.15
앙ㅋ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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