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야만성, 후대에 물려줄까봐 두렵다” - 김훈 『흑산』
1801년에 한국의 수많은 천주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목숨 대신 명예를 잃었다. 그 과정에서 해결되지 못한 그늘이 남았다. 그렇게 종교가 200년간 끌어안지 못했던 그늘을 한 명의 작가가 끌어안았다.
글ㆍ사진 김수석
20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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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없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가. 그렇다면 신은 왜 인간에게 고귀한 이성의 빛을 나눠주었는가. 신이 아닌 인간이 정한 가치에 의해서 규정되어버린 교리는 없는가.

1801년에 한국의 수많은 천주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목숨 대신 명예를 잃었다. 그 과정에서 해결되지 못한 그늘이 남았다. 그렇게 종교가 200년간 끌어안지 못했던 그늘을 한 명의 작가가 끌어안았다. 그 작가에겐 빛이나 그늘이나 다르지 않았다. 그늘은 빛에 의해 생긴 어둠이기에.


면도날 같은 바람에 살이 에이는 추운 날씨였다. 평일 저녁. 집에 빨리 가서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련만, 강연장은 김훈 작가를 만나기 위한 독자들로 가득 찼다.
이날의 강연을 위해 김훈 작가는 서울의 한 성당에 들러 신부님과 2시간 30분가량의 긴 담화를 나눴다 한다. 김훈 작가는 『흑산』에 담지 못했던 깊은 고민과 간절한 소망을 털어놓았다.


“야만성을 일상성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두렵다”

김훈 작가는 『흑산』을 다섯 달 반 동안 ‘선감도’라는 섬에 갇혀서 썼다. 그곳에서 김훈 작가는 19세기 초의 야만성을 기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김훈 작가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비극과 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침통함을 느꼈다 한다. 그리고 야만성을 일상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한다.


“인간은 당대의 야만성을 들여다보는 안목이 매우 부족하거나 거의 없는 거 같다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제가 19세기 초의 야만성을 기록했듯이, 현대의 야만성을 우리의 후대가 기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당대의 야만성은 당대에 기록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오늘의 일들이 지나간 풍문으로 떠돌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김훈 작가는 야만성을 일상성으로 받아들이는 예로 지난 청문회에서 나타난 고위공직자들의 위장전입 문제를 꼽았다. 위장전입은 엄연히 주민등록법이란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모범을 보여야 할 공직자들은 이를 위반하고도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위장전입의 목적은 두 가지더군요. 하나는 자기 자식을 일류학교에 보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산의 차액을 노리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범죄입니다. 그리고 제도권에 들어가야 하는 젊은이들의 의지를 꺾는 행위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범법행위를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생각하고 처벌하지 않더군요. 이런 것이 바로 야만성이 일상화되어가는 풍경입니다.”

고위 공직자가 스스로 위장 전입을 세 번 했노라 자백하고 동사무소에 가면 전입 기록이 있는데도 처벌하지 않는 세상. 또는 “아내가 한 일이라 자신은 모르겠다”며 발뺌하는 공직자와 위장전입을 애끓는 모성에서 발생한 맹모삼천지교라 받아들이는 국민. 이러한 소소한 일상성이 사회의 정의를 흐리는 야만성을 낳는다. 그리고 김훈 작가는 현대의 야만성을 대표하는 말로 약육강식을 꼽는다.


“저는 1948년생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죠. 한국 현대사와 같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고조선 이후로 우리나라는 해마다 아사자가 나오고, 많은 이들이 밥을 굶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가 최초로 밥을 먹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요.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차별과 비리, 모순이 저질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초위에 거대한 먹이피라미드가 세워졌어요.”

김훈 작가는 현대의 야만성을 후대에 물려줄 것이 두렵다고 한다. 현대의 야만성을 무를 뽑듯이 한 번에 뽑아버릴 수는 없겠지만 작은 부분부터라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믿습니다”

김훈 작가는 천주교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복사(服事) 일을 하며 신부님을 도왔다. 김훈 작가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로 묘하게도 『흑산』에 등장하는 정약종과 같은 세례명이다.

그런 김훈 작가는 평소 여러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읽어 해박한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훈 작가를 매료시키는 것은 난해하고 복잡한 종교적 이론들이 아니다. 김훈 작가가 종교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단순성이다. 단순명료한 말들 중에서도 김훈 작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안에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천주교인들이 천주교에 매혹된 것은 삼위일체나 부활이나 창조론이 아니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은 단순명제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흑산』에는 그 단순성에 의지해서 억압받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김훈 작가는 종교가 가지는 내세관이나 기적보다는 현실을 보듬는 단순한 명제들을 더 신뢰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흑산』은 현실을 벗어난 초월적인 종교의 모습은 다루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순교자의 죽음을 묘사할 때도 종교인의 내면보다는 죽는 모습 자체를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옥에도 희망을 설정해야 합니다”

김훈 작가는 하나의 종교에 심취하지 않는다. 2천 년을 넘게 이어져 온 교리의 마침표에 다시 물음표를 붙이는 김훈 작가의 사고는 종교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맹목적인 종교인들에게 있어 김훈은 냉담한 이단자다. 그럼에도 김훈은 자신의 신념을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 김훈 작가는 종교가 말하는 ‘지옥’을 믿지 않는다 한다.


“천주교가 말하는 지옥은 형벌이 영원한 곳입니다. 즉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도 희망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성립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생각을 신부님께 이야기해봤지만, 아직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김훈 작가는 권력화된 종교가 가지는 야만성을 염려한다. 1801년의 천주교 박해를 전근대적인 조선사회의 야만성으로 규정짓기 마련이지만, 이 역시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

1801년(신유년)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가장 큰 동기는 로마교회가 북경 천주교를 통해서 한국의 제사를 금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한국의 많은 교인이 제사를 거부했다. 조선왕조는 충효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던 정치권력이었기에 제사의 거부는 반체제적인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로마교회와 북경교회는 한국의 제사를 미신이고 우상숭배라 규정했다.

“한국인에게 제사란 근본적으로 조상을 경배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미풍양속이었습니다. 미신이라는 잣대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죠. 로마교회나 북경교회는 한국의 문화적 현실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몽매했던 것입니다.”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것 역시 권력화된 종교가 보여주는 또 다른 야만성일 수 있다. 김훈 작가는 그런 권력화 된 종교의 야만성을 개개인의 삶으로 옮겨놓는다. 『흑산』에는 그런 야만성에 짓밟히고 투항하고 또다시 저항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배교자란 말은 틀렸습니다. 폭력으로 강요된 배교는 배교가 아닙니다”


『흑산』에는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물들이 나온다. 김훈 작가는 한 사람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을 두루 다루고 있다. 그 다양한 인물 중에 김훈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배교한 하급 무관 ‘박차돌’과 ‘마노리’라는 마부다. 순교를 통해 이름을 남기고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아닌 신분적으로 비천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특히 박차돌은 폭력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김훈 작가는 박차돌과 같은 인물을 배교자로 낙인찍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실제 1801년 천주교 박해에서도 많은 이들이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를 택했다. 그중에는 배교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숨이 끊긴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을 모두 배교자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김훈 작가는 신부님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저는 당시에 저질러진 일들은 배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형법에서도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폭력과 죽음 앞에서 신념을 꺾어야 했던 사람들은 다 구원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1874년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폭력 앞에 굴복한 이들도 배교자라 칭하고 지옥에 갔노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옥이란 영원히 희망이 없는 고통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일생을 고통 받고 자신이 믿는 종교마저도 ‘믿는다’ 말하지 못한 존재들. 삶의 희망을 오로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제 하나에 기대야 했던 비루한 삶을 산 사람들. 배교자의 대부분이 그런 힘없는 이들이었을진대, 천주교는 이들을 불구덩이 속에 넣고 외면해버릴 수 있는 것인가.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죽음을 선택한 이들은 물론 성인이다. 하지만 누구나 성인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성인이고 존경받는 것이다. 종교는 일상의 종교여야 한다. 죽음과 폭력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끌어안아야 진정 종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훈 작가는 세속인으로서 보편타당한 바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쩔 수 없이 배반한 자들을 모두 품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속인으로서 살아가는 저의 소망입니다.”


#김훈 #흑산
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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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하늘

2012.01.28

김훈님의 새로운 책 <흑산>이 출간되었군요. 아직 <흑산>의 출간 사실을 잘 몰랐네요. 아직 구매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에 구매하거나 빌려서 <흑산>을 한번 읽어볼 예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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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2012.01.01

최근 김근태의장이 돌아가시고나니 천당과 지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김근태의장의 종교가 없었으니 지옥불에 떨어졌을까요?
김근태의장을 짐승처럼 고문한 이근안은 목사가 됐으니 천당에서 예수님 품안에 안기나요? 종교가 그런것이라면 나는 오늘 당장이라도 세례명을 포기하고 지옥불에서 김근태의장과 고통을 함께 하겠습니다.
하지만 종교라는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것은 아니겠지요?
정의와 선에 기반되지않는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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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em

2011.12.29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네요. 그리고 야만의 일상화에 대한 경계, 권력으로 자신들의 야만을 자신들의 일상으로 만들고 있는 세상. 우리들이 기록해야 한다는 것,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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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석

http://blog.yes24.com/musician79

채널예스에서 작가와 독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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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외의 저서로 독서 에세이집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자전거여행』,『원형의 섬 진도』, 시론집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