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적 커플의 이상적인 신체 자세 -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
사랑이 융합을 의미한다면, ‘융합적’이라는 형용사는 불필요하다. 그런데 왜 ‘융합적 사랑’(l’amour fusionnel, 서로의 구별과 경계가 없어질 정도로 하나로 합해진 사랑을 의미한다. 융합적 사랑은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때가 많다―옮긴이)이라는 표현이 존재하는 걸까?
201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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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융합을 의미한다면, ‘융합적’이라는 형용사는 불필요하다. 그런데 왜 ‘융합적 사랑’(l’amour fusionnel, 서로의 구별과 경계가 없어질 정도로 하나로 합해진 사랑을 의미한다. 융합적 사랑은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때가 많다-옮긴이)이라는 표현이 존재하는 걸까?
융합의 경험이 반드시 진정한 사랑에서만, 다시 말해 자기 자신 및 타인에 대한 초연하고 자유로운 태도 속에서만 경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융합이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융합은 고독과 결핍, 공허감을 채우는 데 필요한 것으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융합은 우리에게 황홀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는데, 두 존재가 이별하고 그 이별이 고통을 안겨줄 때 그렇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결핍을 채우려고, 좀 더 깊이 들어가 공허감을 채우려고 융합을 갈망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근원적 상처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후 어머니에게 받아들여지고, 양분을 공급받을 때 제대로 채워지지 못하고 빈 채로 남아버린 공간과 비슷하다.
융합과 융합적 사랑
융합된 사랑은 생애 최초의 경험에서 양분을 취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꼭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와 세상에 나와서 완벽한 융합을 경험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융합에 대한 갈망을 가질 만큼 이 시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에 너무나 공포스러운 경험을 한 나머지 새로운 융합을 무조건 거부하게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우리와 우리 어머니 사이에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연금술이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하게 될 사랑의 경험들, 우리에게 위안이 되거나 우리를 힘들게 할 경험들이 이 연금술에 달려 있다. 이 연금술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변화하도록 이끌고, 더 나아가 우리를 치유해줄 것이다.
내가 만난 여자 환자들 중에는 충만한 융합을 함께한 사람과 헤어진 뒤 가슴과 배에 심한 통증을 느껴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인 사람도 있었다. 신체에는 병이 없었지만 융합된 사랑에 침해를 받은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 처한 남자들도 있다. 그들은 배와 성기에 통증을 느껴 의사를 찾아갔다. 이런 것이 사랑병이다. 대개 배에 통증을 느끼는데, 그곳은 태아기 때 영양을 공급받았던 탯줄이 잘린 부분이다. 가슴에도 통증을 느끼는데,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 곳이 바로 가슴이다. 성기에도 통증을 느끼는데, 이곳은 성인이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단절, 유기, 배신, 거부, 부인, 학대, 원한, 분노, 복수욕, 소유욕, 파괴욕, 살기 등이 사랑병과 함께 온다. 융합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이 겪는 사랑의 위험이 이런 것들이다. 현재의 우리 삶이 우리가 태아기와 출생을 경험한 방법에 달려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융합적 인격
융합적 인격은 살아 있다고 느끼기 위해 융합 상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인격을 뜻한다. 융합적 인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2개의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목이 말라 물을 찾는 사람처럼 융합을 추구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으론 융합을 추구하지만 겉으론 그것이 위험이라도 되는 양 융합을 회피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이 2개의 얼굴은 융합적 사랑의 시계추와도 같은 2개의 움직임과 통한다. 시계추가 오가는 극단의 두 위치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너를 찾아냈어. 이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너를 찾지 않을 거야.’
만일 이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에 몰입하고 싶어 한다. 사랑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즉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상대방을 피하기에 이른다. 저항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처럼 융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 그 사람이 자신의 심리에 불러일으키는 것에 맞서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사랑의 위험 앞에서 나오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반응이다. 이것은 상대방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져서 하게 되는 공격은 아니다. 인정의 단계에서 긴장해 있으면 자신의 두려움과 상처를 상대방에게 투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상처받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위협으로 감지하게 된다. 융합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불가능한 융합, 지나치게 충만한 남자(여자)와 텅 빈 여자(남자)
융합이 ‘지나치게 충만한’ 사람은 냉혹한 인격을 가진 경우가 많다. 사랑에 대한 그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융합이 필요해. 나는 내 주위에 융합을 고취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융합을 물리치고 싶어. 왜냐하면 융합은 사랑만큼이나 위험하기 때문이야.’ 이런 사람은 근본적 융합의 필요성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텅 빈’ 상대방은 불안정한 인격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이 상대방을 향한 ‘지나치게 충만한’ 사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융합적 커플 신체 자세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원해.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거부해. 당신을 미워해. 나는 존재하기 위해 너를 망가뜨리고 싶어.’ ‘지나치게 충만한’ 사람은 어머니와 탐욕스럽거나 강렬한 융합을 경험했고 아버지는 너무 약해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던 경우가 많다. 그의 삶의 큰 걸림돌은 과거의 탐욕스러운 공생관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어머니라는 거미줄이 그를 질식시키는 느낌을 받고 정신적으로 항상 포로인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절연하기 위해 그 거미줄을 없애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다시 정신적 거미줄을 친다.
융합의 경험이 반드시 진정한 사랑에서만, 다시 말해 자기 자신 및 타인에 대한 초연하고 자유로운 태도 속에서만 경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융합이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융합은 고독과 결핍, 공허감을 채우는 데 필요한 것으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융합은 우리에게 황홀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는데, 두 존재가 이별하고 그 이별이 고통을 안겨줄 때 그렇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결핍을 채우려고, 좀 더 깊이 들어가 공허감을 채우려고 융합을 갈망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근원적 상처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후 어머니에게 받아들여지고, 양분을 공급받을 때 제대로 채워지지 못하고 빈 채로 남아버린 공간과 비슷하다.
융합과 융합적 사랑
융합된 사랑은 생애 최초의 경험에서 양분을 취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꼭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와 세상에 나와서 완벽한 융합을 경험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융합에 대한 갈망을 가질 만큼 이 시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에 너무나 공포스러운 경험을 한 나머지 새로운 융합을 무조건 거부하게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우리와 우리 어머니 사이에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연금술이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하게 될 사랑의 경험들, 우리에게 위안이 되거나 우리를 힘들게 할 경험들이 이 연금술에 달려 있다. 이 연금술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변화하도록 이끌고, 더 나아가 우리를 치유해줄 것이다.
내가 만난 여자 환자들 중에는 충만한 융합을 함께한 사람과 헤어진 뒤 가슴과 배에 심한 통증을 느껴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인 사람도 있었다. 신체에는 병이 없었지만 융합된 사랑에 침해를 받은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 처한 남자들도 있다. 그들은 배와 성기에 통증을 느껴 의사를 찾아갔다. 이런 것이 사랑병이다. 대개 배에 통증을 느끼는데, 그곳은 태아기 때 영양을 공급받았던 탯줄이 잘린 부분이다. 가슴에도 통증을 느끼는데,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 곳이 바로 가슴이다. 성기에도 통증을 느끼는데, 이곳은 성인이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단절, 유기, 배신, 거부, 부인, 학대, 원한, 분노, 복수욕, 소유욕, 파괴욕, 살기 등이 사랑병과 함께 온다. 융합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이 겪는 사랑의 위험이 이런 것들이다. 현재의 우리 삶이 우리가 태아기와 출생을 경험한 방법에 달려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융합적 인격
융합적 인격은 살아 있다고 느끼기 위해 융합 상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인격을 뜻한다. 융합적 인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2개의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목이 말라 물을 찾는 사람처럼 융합을 추구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으론 융합을 추구하지만 겉으론 그것이 위험이라도 되는 양 융합을 회피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이 2개의 얼굴은 융합적 사랑의 시계추와도 같은 2개의 움직임과 통한다. 시계추가 오가는 극단의 두 위치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너를 찾아냈어. 이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너를 찾지 않을 거야.’
만일 이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에 몰입하고 싶어 한다. 사랑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즉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상대방을 피하기에 이른다. 저항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처럼 융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위협: 안나의 이야기 어느 날 나는 몬트리올에서 친구 안나와 함께 아페리티프를 마셨다. 안나가 나에게 새로 사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안나는 나에게 그 남자의 장점들을 자랑했다. 많이 상처받았던 안나의 마음이 열린 것 같았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는지 안나가 나에게 그 남자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남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가 그 식당에 자주 온다는 사실을 안나는 모르고 있었다. 안나는 깜짝 놀라서 나에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안나는 말 그대로 얼어붙었고,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안나는 그 남자에게 우리와 합석하자고 권했다. 대화는 평범했고, 그들 사이에는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자가 매우 주의 깊은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친구 안나는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눈길을 피해 몸 전체를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잠시 자리를 떠나 두 사람이 단둘이 있게 해주었다. 다시 돌아와보니, 안나는 한결 안정되어 보였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갔던 것이다. 잠시 후, 안나의 남자친구가 자기 생활과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갑자기 안나가 심판자로 변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나중에는 점점 더 심하게 자기 남자친구를 공격했다. 안나가 공격하자 안나의 남자친구는 긴장했다. 안나는 갓 시작된 관계를 그렇게 망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보는 것이 서글펐다. 안나의 남자친구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가고 안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나는 안나에게 물었다.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뭘 하긴? 너와 술을 마시고 있잖아.” “그 말이 아니야, 안나. 너 저 남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안나가 나에게 대답했다. “저 남자를 파괴하는 중이지.” “저 남자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저 남자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잘생겼고, 지나치게 사랑스럽고, 지나치게 주의 깊어. 그래서 난 저 남자에게 끌리고. 한마디로 저 남자는 위험해. 내가 저 남자에게 홀딱 빠져버릴 위험이 있다고. 그것뿐이야!” “저 남자가 벌써 네 적이 된 거야? 아무래도 내가 저 남자에게 말해줘야겠어.” “그래! 결국 그렇게 되겠지. 나는 정신분석가에게 다시 상담 받으러 가야 할 거고……” | ||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 그 사람이 자신의 심리에 불러일으키는 것에 맞서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사랑의 위험 앞에서 나오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반응이다. 이것은 상대방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져서 하게 되는 공격은 아니다. 인정의 단계에서 긴장해 있으면 자신의 두려움과 상처를 상대방에게 투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상처받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위협으로 감지하게 된다. 융합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불가능한 융합, 지나치게 충만한 남자(여자)와 텅 빈 여자(남자)
융합이 ‘지나치게 충만한’ 사람은 냉혹한 인격을 가진 경우가 많다. 사랑에 대한 그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융합이 필요해. 나는 내 주위에 융합을 고취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융합을 물리치고 싶어. 왜냐하면 융합은 사랑만큼이나 위험하기 때문이야.’ 이런 사람은 근본적 융합의 필요성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텅 빈’ 상대방은 불안정한 인격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이 상대방을 향한 ‘지나치게 충만한’ 사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융합적 커플 신체 자세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원해.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거부해. 당신을 미워해. 나는 존재하기 위해 너를 망가뜨리고 싶어.’ ‘지나치게 충만한’ 사람은 어머니와 탐욕스럽거나 강렬한 융합을 경험했고 아버지는 너무 약해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던 경우가 많다. 그의 삶의 큰 걸림돌은 과거의 탐욕스러운 공생관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어머니라는 거미줄이 그를 질식시키는 느낌을 받고 정신적으로 항상 포로인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절연하기 위해 그 거미줄을 없애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다시 정신적 거미줄을 친다.
- 사랑 충동 마리 리즈 라봉테 저/최정수 역 | 옐로스톤
“사랑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가?” 『사랑 충동』은 이런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의 근원을 탐색하고 상처받은 사랑을 치유하고 우리 안의 완전한 사랑을 되살려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캐나다에서 정신신체의학 분야의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는 마리 리즈 라봉테는 오랫동안 남녀 관계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사랑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어느 날 사랑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를 위로하다가 사랑에 대한 책을 써보자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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