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외국인 소녀가 다가와 담배값 달라고…
쇼핑 스팟들 구경을 마친 후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들고 에스플라나디 공원 잔디밭에 앉는다. 에스플라나디 공원에는 그 맛과 양이 모두 흡족하기 그지없는 흰색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어울린다. 이유는 그저 비주얼적인 것으로. 햇볕을 쬐며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노라면 여유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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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플라나디 거리에는 이딸라Iittala, 마리메꼬Marimekko, 스톡만Stockmann 백화점, 아카데미아 서점Akateeminen Kirjakauppa, 아르텍Artek 등의 쇼핑 스팟들이 즐비하다. 이딸라 매장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쪽지에 한국에서의 가격을 조밀하게 적어들고 현지의 가격과 비교하며 연신 감탄을 내뱉는 우아한 아주머니를 만날 수도 있다. “좀 싸요?” 했더니 “많이 싸네요” 하셨다. 딸내미가 이것저것 사오라고 부탁을 한 모양이다. 그 물건들을 저렴하게 구해가기 위해 아웃렛을 돌아다니는 여행자들도 심심찮게 있으니 한국에서도 꽤나 인기가 있는 가정용 브랜드임에 틀림없다.
수세미양의 지인은 핀란드 여행 후 마리메꼬에서 노리던 코트를 그냥 포기하고 온 것을 몹시도 후회한다고 했는데, 사실 그 과감한 패턴의 디자인을 나라면 소화하기가 힘들지 싶긴 하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여행 가방을 잃어버린 여인은 마리메꼬의 코트를 아주 잘 소화하던데 말이다. 가로수길을 오갈 때마다 마리메꼬의 상품들을 힐끔힐끔 보기는 하는데, 보기에는 매우 아름다우나 선뜻 살 용기는 생기지 않는 나는야 여전히 소심한 취향의 중생인 것이다. 나는 좀 더 절제된 패턴의 디자인이 좋다. 사실 마리메꼬는 내 느낌에 ‘으잉? 핀란드가 웬일로?’ 하는 게 좀 있긴 하다.
쇼핑 스팟들 구경을 마친 후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들고 에스플라나디 공원 잔디밭에 앉는다. 에스플라나디 공원에는 그 맛과 양이 모두 흡족하기 그지없는 흰색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어울린다. 이유는 그저 비주얼적인 것으로. 햇볕을 쬐며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노라면 여유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거리에 즐비한 카페 1층의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으며 엘프elf 같은 언니들이 잔디밭에 누워 비키니 상의 차림으로 광합성과 멜라닌색소 제조를 동시에 하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갔을 때 다시 먹고 살 만큼 일이 들어올까 하는 의구심과, 누군가가 팔아먹을지도 모르는 인천공항에 대한 걱정을 어느 순간 놓아버리고 아, 세상 다 모르겠고 그냥 등 따시고 배부르구나,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여유만만이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찾아올 무렵, 외국인 소녀가 다가와 담배를 사야 하니 돈을 좀 달라고 한다. 밥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그 ‘비싼’, 동양에서 온 여행자들은 그 놀라운 가격 때문에 한 대 피울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는, 집에 갈 때까지 맘 편하게 한 갑 사지도 못한다는 담배를 사야겠으니 나보고 돈을 달라는 것이다. 하긴, 퇴짜 맞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니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이며 중산층이라고 해도 믿게 생겼으니, 밥을 굶을 것 같지는 않다. 핀란드는 원래 이민자를 받지 않지만 최근 들어 정치적 망명을 받곤 한다는데, 그래서 간혹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거지도 밥부터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식품부터 구걸하면 된다는 것인가! 진정한 귀족 거지에게 바라옵건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하시기를….
- 북유럽처럼 김나율 저/이임경 사진 | 네시간
디자이너이며 보통의 여행자인 두 저자가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름, 덴마크 코펜하겐 세 도시로 북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정에 얽힌 유쾌한 이야기, 먹고 즐기고 쉬기에 유익한 정보 등 여행지로서의 북유럽을 담으며 그들의 공간뿐만 아니라 디자인을 필두로 독특한 문화와 날씨, 물가 등 다양한 관심 키워드를 다룬다. 보통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적당히 놀며 쉬며 접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통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북유럽 스타일의 감성으로 삶을 덜어내고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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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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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나율, 이임경(사진)
김나율
드라마 작가와 음악가와 월세 집 주인을 최고 동경하고
처녀 귀신, 생 굴, 날아오는 공이 제일 무섭고
오로라, 한 겨울 사우나, 피오르를 만나러 가고 싶고
디자인, 산수, 집안일이 너무 두렵고
이제 막 맥주와 커피의 맛을 좀 알 것 같은
대체로 무익하지만 가끔은 유익하게 사는 적당한 사람.
서울대 디자인학부 졸업. 싸이월드, LG 전자 근무. 현 프리랜서 모바일 GUI 디자이너.
이임경
점토의 말캉말캉함과 희뿌연 흙먼지, 흐르는 땀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 도자기를 한다.
가장 맑게 그리고 거침없이 꿈꾸는 열아홉과
함께할 수 있어 수업시간은 늘 기대된다.
안목바다의 수평선 같은 조용하고 담백한 사진은
설렘을 주고 흙 작업을 하며 한껏 벌린 설거지거리를
예쁜 수세미로 닦는 시간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다.
여행은 ‘진짜’ 나를 마주하게 한다.
서울대 디자인학부, 공예대학원 졸업, 도자 공예가.
현 선화예고, 남서울대 강사.
tvfxqlove74
2013.08.28
did826
2013.03.31
스니키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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