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어릴 적에 집에 책이 없었어요. 누님과 형님에게서 물려받은 교과서(물려받았죠. 졸업식 노래에도 나오잖아요.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밖에 없었어요. 책, 하면 교과서였을 뿐이지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그때 인근 마을이 다 그랬어요. 아, 교과서 아닌 책이 딱 한 권 있었네요. ‘토정비결’ 책이었어요. 아마 동네를 통틀어 교양서적이라고는 그것 한 권뿐이었을 겁니다. 그게 우리 집에 있었던 까닭은 무학의 어머니가 토정비결 보는 법을 알았고(육십갑자에 맞춰 괘를 뽑는 여러 번의 계산법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리드미컬하게 낭독하는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었지요. 칠언절구의 한문을 띄어쓰기 없이 세로쓰기로 번역한 것이라서 읽는 사람이 호흡을 잘 넣어야 하고, 중간 중간 추임새와 뜻풀이까지 곁들여야 했는데 어머니의 솜씨가 근동을 합쳐 최고였습니다.”
“제가 책 읽기의 매력을 처음 느꼈다면 정초에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던 어머니의 토정비결 낭송 잔치 때였겠네요. 이 책은 지금도 제가 갖고 있습니다. 하여간 그 토정비결 말고는 책이 없었어요. 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복도 신발장 위에 50여 권 정도의 책이 6년 동안 바뀌지 않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죠. 책보다는 산딸기와 머루를 따 먹는 게 백배는 재밌었죠. 그때 책 안 읽고 산과 들을 헤맸던 걸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중학교 때는 《주부생활》 부록으로 나왔던 잠언모음집을 웬일인지 되풀이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어요. 화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고등학교 때 읽은 책이라면 단연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이죠. 원고지가 아닌 스케치북과 4B연필을 끼고 살 때였지만 그 책만큼은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확실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학 때는 이문열과 이청준, 김원일, 문순태를 많이 읽었던 것 같고요, 이때부터는 과제 때문에라도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등단 이후인 것 같습니다. 즐겁거나 빠져 읽었던 건 아니고요, 두려워서 읽었습니다. 소설가가 되었는데 그동안 제가 읽은 책이 너무 없는 거예요. 독서를, 몰래 숨어서 했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을 책들을 뒤늦게 읽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웃음).”
최근 여덟 번째 소설집 『별명의 달인』 을 펴낸 구효서 작가. ‘버릇처럼 숨처럼, 오로지 소설로 존재하는 사람’이라 불리는 그는 요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감각해야만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야겠다는 마음이다. 작가는 말한다. “사람의 오감은 정해져 있어서 그 이상을 감각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건데, 최소한 감각의 세계는 그래서 세계의 전부가 아니며 아주 많은 부분은 감각의 왜곡된 질서로 구조화 돼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글이라는 것도 극히 제한된(약속된) 표현법에 스스로 갇혀 작동하는 시스템이잖아요. 감각의 한계를 넘어야 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얘긴데 쉬울 리가 없네요. 과연 넘을 수 있을까? 이게 제 관심사는 아니에요. 넘지 못해도 넘으려는 노력만큼은 쉬지 말자는 게 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그래야, 감각과 언어에 속더라도, 속고 있다는 자각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인문학적인 관심사 같지만 이런 유의 관심을 지속시켜나가다 보니 당연하게도 자연과학에 가 닿게 된다. 감각의 세계를 알려고 하니 파장에 대해 알아야 하고, 중력에 관해서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작가는 묻는다. “과연 아이작 뉴턴을 읽어낼 수 있을까?” 아마 쉽게 풀이한 책들을 읽지 않을까, 싶다. 자연과학자로서의 괴테도 찾아 읽어야 할 것이고, 심지어는 양자역학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상대성이론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는 자문한다. “이럴 때 정말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군. 문과를 가면 이런 유의 책들은 죽을 때까지 안 읽게 될 줄 알았다.”며.
“글이 아니면 글을 쓸 수도 글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말이 없으면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과 같지요. 작가와 독자는 글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만 너무 곧이곧대로 글에 의지해 이해하고 감동받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로써 이해와 소통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글의 시스템에 갇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의 세상이 훨씬(무한히) 넓다는 사실을 우리 서로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붓을 적신다
구효서 작가의 서재는 심사한삼이다. 20여 년 전, 작가가 붓글씨를 열심히 쓰던 때, 가로 75cm 액자에 넣은 예서체 넉 자가 바로 서재의 이름이다. 언제나 책상 앞에 걸려 있다. ‘깊이 생각하고 붓을 적신다’ 정도의 뜻이다.
명사의 추천
쇼펜하우어 저/김재혁 역 | 육문사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계기는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죠. 교회 다니는 친구가 성경을 읽듯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어요. 철학가의 책 치고는 쉬웠기 때문이기도 했겠죠. 흔히 그를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좀 부정적으로 말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그의 염세의 언어와 논리가 매우 통쾌했어요. 그리고 곧 그의 철학이 염세도 뭣도 아닌, 다만 세상을 정확히 꿰뚫어보자는 노력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하여튼 고2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한 권의 책을 외우다시피 읽다 보니 그의 언어와 태도가 제 안에 오롯이 들어앉았겠지요. 세상을 곱게 보지 않는 버릇이 그때 생긴 걸까요? 아닐 거예요. 원래 그런 기질이 제 안에 가득했는데 쇼펜하우어를 만났을 뿐이겠지요. 세상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이 험난한 세상을 제대로 버텨나가는 한 방법이라는 걸 그를 통해 알게 되었고, 나중에 니체를 반갑게 받아들였던 것도 그의 독서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저에게 염세와 허무가 아닌, 끝까지 버티는 힘을 주어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안정효 역 | 문학사상사
이 소설은 마르케스가 노벨문학상을 타기 훨씬 전에, 이어령 선생이 경영하던 월간 『문학사상』에 번역 연재되던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쓱 보고는 덮었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리고 1982년에 한 번 더 읽으려다 실패했어요.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소감을 적어 내라는 과제가 떨어진 거예요. 저는 복학생이었죠. 열심히 읽으려고 했으나 낯설고 정신 없어서 반밖에 읽지 않고 대충 과제물을 제출했습니다. 제대로 읽은 게 등단 직후였어요. 그때 저는 부천시 역곡동에서 광화문까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출퇴근 때의 1호선 전철은 콩나물시루였죠. 이 책이 있어서 콩나물이 되는 줄 몰랐고 콩나물이 되어도 좋았습니다. 『인생론』 이후 오랜만에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던 것 같아요. 안정효 선생이 영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거니까 중역이었죠. 스페인어-영어-한국어.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사정없이 사로잡혔던 이유를 저는 안정효 선생의 훌륭한 번역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신기 혹은 한없이 멋들어진 귀기라고 생각했어요. 소설 안목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 같아 많이 뿌듯했고, 이후로 미친 듯 마르케스를 읽었고, 저도 모르게 마르케스 풍의 소설을 몇 편 연달아 썼고, 당시 한창 유행이던 인터넷 통신의 첫 등록 아이디로 MARQUEZ를 썼습니다. 그때를 행복하고 아름답던 시절로 기억하게 하는 책이죠.
가라타니 고진 저/박유하 역 | b(도서출판비)
속표지에다 제가 ‘놀라운 책’이라고 흘림체로 적어놓은 걸 얼마 전에 봤어요. ‘놀랍기까지야.’라고 중얼거렸지만 첫 독서 때는 많이 놀랐나 봐요. 저는 이 책을 일본에 관한 책도 아니고 문학에 관한 책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이 좀 이상하다면, 이 책은 일본에 관한 책만도 문학에 관한 책만도 아니라고 고쳐 말하지요. 이것저것 다 빼니까 ‘근대’만 남네요. 저는 이 책을 ‘근대성’을 아는 입문서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근대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근대를 알면 전근대와 후근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근대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책은 많지만 한 나라의 문학연구를 통해 근대성의 핵심을 찌르는 책은 저에겐 이것이 여전히 최고가 아닌가 싶네요. 근대를 아는 일은 다른 말로 하면(제 방식으로 말하면) 인간을 아는 일이기도 하지요.
토머스 핀천 저/김성곤 역 | 민음사
김성곤 선생이 1986년에 번역한 이 소설을 읽었죠. 저는 1987년에 단편으로 등단했는데 그때 이미 장편을 구상하고 있었어요. 이 소설의 충격으로. 그렇게 나온 것이 제 첫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이었고, 뒤 이어 제 평생 처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두 권짜리 『비밀의 문』이 출간되었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제 두 장편소설에 각각 등장하는 ‘나림의 무리’와 ‘비밀회좌 집단’은 모두 이 작품의 ‘지하 우편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약음기가 달린 나팔’ 그림을 본 따서 저도 소설 속에 버섯 모양의 비표(秘標)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장편소설 『악당 임꺽정』과 『랩소디 인 베를린』, 그리고 최근의 『동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제 소설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끝없는 방법론적 부정이 시도된다면, 그 영향은 단연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 온 것입니다. ‘트리스테로’라는, 핀천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설적 탐색에 동의하는 것으로써 저의 방법론적 부정은 정당화됩니다.
노자 저/오강남 풀이 | 현암사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아마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도덕경』도 그 중 하나겠지요. 다른 사람들도 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이니, 그래서 중복될 터이니 피해가자, 이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책을 ‘타나토스의 빛나는 효용’이라고 불러요. 다들 잘 살고 잘 먹고 떵떵거리려고 매진하다가 보면 지레 스트레스로 숨 넘어가기 십상이지요. 그러기 전에 미리 죽어버리면 어떨까 싶어요. 내 안의 욕망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왜냐면 살기 위해서죠. 이런 얘기를 그럴싸하게 해줄 그럴싸한 스승이 노자 아닐까요. 번역자에 따라 그 스승이 그 스승이 아닐 수도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여러 번역본을 틈틈이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노자가 하나가 아니겠네요. 그것도 괜찮네요.
박솔뫼 저 | 자음과모음(이룸)
1985년생 젊은 작가의 첫 장편이며 등단 소설입니다. 전 이 소설을 읽고 놀랐고 행복했고 부러웠고 겁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 온 소설작법을 송두리째 흔들었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이전부터 조금씩 흔들려 왔고, 그 균열과 진동이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이 소설이 미적거리는 저를 꽝 쳤습니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네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가야겠습니다. 이유를 모르는데도 놀라고 행복하고 부럽고 겁이 난다는 게 신기합니다. 신기해서 또 읽습니다.
벨라 타르/에리카 보크, 야노스 데르즈시
최근에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를 연이어 세 편 봤어요. <토리노의 말>,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사탄 탱고>에요. 선택이 아니라 우연히 <토리노의 말>을 보게 되었죠. 그리곤 쉬지 않고 두 편을 더 봤는데 <사탄 탱고>는 7시간 25분짜리 영화에요. 전부 흑백영화고 느리고 긴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영화인데 그걸 열심히 본 이유는, 감각과 언어뿐만 아니라 속도(시간)라는 것도 우리를 속이는구나 싶었어요. 익숙한 속도, 기대 속도 혹은 허리우드 식 속도를 배반하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보지 못했던) 것들이 마구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감각세계를 넘어서는 한 방법을 본 거죠. 시간과 감각세계와의 상관관계.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을 어서 구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었어요.
왕가위/금성무,임청하,양조위,왕정문 | 리스비젼
<토리노의 말>을 보고 다시 보기 시작한 게 왕가위의 영화들이지요. <중경삼림>,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한결같이 사랑 얘기 같지만 ‘만날 수 없다’는 얘기들이더군요. 사람이든 일이든 뜻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만나 무언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만날 수 없는(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례를 끝없이 보여줌으로서 왕가위는 감각세계의 질서에 매이거나 속거나 머물지 않으려 하네요. 영화를 보면서 저도 <화양연화>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 한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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